차영민 역사장편소설

▲ 차영민 역사장편소설 <펜안허우꽈?>. ⓒ뉴스제주

주변 공기가 점점 싸늘하게 굳어갔다. 방금까지만 해도 뒤덮였던 고성과 울음소리는 영암부사의 기침에 맥없이 바스러져 바닥에 흩날렸다. 그를 올려다보는 탐라 사람들의 눈빛은 날이 바짝 섰지만 결코 예리하진 않았다.

“하옥하라!”

그의 손짓에 군사들은 발길질을 아끼지 않았다. 쓰러진 탐라 사람들은 하나둘씩 차례차례 줄을 세워 옥사로 이동했다. 지슬은 고여림 장군의 수하들이 따로 붙들었는데, 영암부사가 직접 그 앞에 섰다.
“다시 묻겠다, 그동안 어디 있었던 게냐?”

지슬은 일단 대답 없이 고개를 돌렸다. 탐라 사람들의 그림자가 점점 희미해질 때야, 기침과 함께 고개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내게 곁으로 다가가 듣고 해석하여 전달하였다.

그 내용인즉슨, 어머니의 안위가 걱정되어 잠시 집에 갔는데 아무도 없었다는 것. 그 주변 집들도 사람이 빈 건 마찬가지였다. 옆 마을까지 샅샅이 살펴봤으나 해만 질 뿐 그림자조차 볼 수 없었다. 지나치면서 봤던 집들은 모두 문이 열려있었고, 머릿속에 뭔가 스칠 때쯤 갑자기 낯선 그림자들이 몰려들고 말았다.

눈이 가려진 채, 끌려간 곳은 탐라의 중심에 있는 두무악 중턱쯤이었다. 깊숙하게 판 굴에는 군데군데 사람들이 몸을 웅크리고 앉아있었다. 그중 마을 사람들이 여럿 얼굴을 비췄고, 모두 어찌된 영문으로 여기까지 온 것인지 알 수 없다고 입을 모았다.

이틀이 지나도록 햇빛을 볼 수 없었고, 어머니의 생사도 알 수 없었던 지슬은 결국 굴에서 빠져가기로 마음먹었으나. 그 생각이 미처 싹을 틔울 새도 없이 낯선 자들에게 또다시 끌려나가고 말았다.

천으로 가려진 눈을 풀어주기도 전에 사람들의 기합으로 낌새를 알아차렸고, 낯설지 않은 목소리가 호령하자 두 다리가 후들거리기 지슬. 그 목소리가 주인공은 다름 아닌 왕자였다. 산 중턱에 넓게 펼쳐진 평야 끄트머리에는 거대한 막사가 마련되었는데, 거기서 성주가 얼굴을 드러냈다. 평야 한복판은 장정들이 대열을 맞춰서 훈련에 집중하고 있었다. 어느새 지슬도 그 무리에 속하였고.

“육짓것들을 모사불자!”

왕자의 호령에 사람들은 더 기합을 크게 넣었다. 지슬은 그들 틈에 서서히 스며들었으나, 그것도 오래갈 수가 없었다. 그들 중 한 사람이 성주청 전투 때 하필 지슬과 직접 맞붙었던 자였다.

“야이 어떵 해불라!”

간자로 지목받았고 왕자와 직접 대면하기에 이르렀다. 왕자는 곧장 칼을 빼들어 내리치려고 했으나 성주가 제지하여 따로 마련된 막사에 구금되었다. 비슷한 이유로 이미 갇힌 자들이 있었으니, 날이 밝으면 처형될 것이라 하였다.

사방을 둘러싼 철통감시에 어떤 것도 할 수 없었으리라, 여겼던 바로 그날 새벽녘부터 구름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비바람이 거세게 몰아치더니 감시하던 자들이 모두 다른 데로 급히 피신하기에 이르렀다.

그때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지슬과 사람들은 그곳을 빠져나왔다. 물론 이를 발견한 자들이 금세 뒤쫓았으나, 각각 다른 방향으로 흩어진 터라 추격하는 자들의 숫자도 자연히 줄었다. 무엇보다 비바람에 작은 나무들이 한둘 쓰러지고 물기로 가득한 흙바닥에 도망치는 이나 쫓는 이나 넘어지기 일쑤였다. 지슬은 낭떠러지를 미처 확인 못 하고 아래로 떨어지기까지 했다. 쓰러진 나무들 덕분에 충격은 거의 받지 않았고 쫓아오는 발소리가 잠잠해졌다.

쉬지도 않고 걸으며 성안까지 들어오다가 지금 이 지경에 이른 것이라고, 내가 이해한대로 내용을 전달했다. 지슬에게 내가 설명한 게 맞는지 물었더니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용히 듣고 있던 영암부사와 고여림 장군의 얼굴에 그림자가 짙게 드리웠다.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영암부사의 목소리 끝이 갈라졌다. 그러나 지슬은 입을 선뜻 떼지 않았다. 내가 옆에서 혼잣말처럼 얼른 말하라고 했으나, 그저 숨을 깊게 내뱉을 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지금까지 있으면서 멀리서 내다본 두무악은 한마디로 웅장함 그 자체였다.

저곳의 중턱이라면 어찌 알 수 있겠는가. 잠시 침묵을 지키던 지슬의 대답이 내 생각과 다르지 않았다. 그가 한 가지 확실하게 털어놓은 건, 성주가 따로 모은 인원이 많고 무장 상태도 만만찮다는 것. 영암부사는 재차 지슬에게 사실을 확인한 뒤 척후를 불렀다.

다음날, 동이 틀 때쯤 돌아온 척후는 지슬이 말한 것처럼 마을에 사람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고 고하였다. 밤새 한숨도 눈을 감지 않은 영암부사는 부관에게 이르러 모두 모이게 했다. 군사들과 가짜 왕자에 협조하지 않은 탐라 사람들이 성주청 앞을 금세 가득 메웠다.

“이시간부로, 탐라부와 성주청은 즉시 해산한다. 영암부사 김수 장군이 통감기구를 임시로 설치하여 탐라를 통할함을 공포하노라.”
영암부사가 건넨 종이를 부관이 받아들고 목청을 높였다. 모든 사람이 눈만 멀뚱멀뚱하게 뜬 채,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지슬은 미간에 주름을 살짝 잡고 영암부사를 올려다보았다. 그보다 내 시선은 여전히 멈추지 않는 부관의 입술을 향했다. 공포 내용은 영암부사의 탐라 관할뿐만이 아니었다.

비상사태의 선포와 함께 백성들의 통행을 성안으로 제한하였다. 무단으로 성 밖으로 통행하면, 이유를 불문하고 그 자리에서 처형할 수 있다는 조건이 붙었다. 성안에서도 불시로 검문할 터인데, 자신의 신분을 명확히 밝히지 못 할 시. 무조건 압송되거나 반항하면 역시 이유 불문 처형하는 부분과 모든 집의 식량과 가축, 농기구 등은 무조건 고려군에 넘기며 필요시 나눠준다는 내용이 이어졌다. 사람들은 일제히 웅성거렸지만 영암부사가 앞으로 한 걸음 나오자,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혼란일수록 합심해야 정도니라. 어찌 무지몽매하단 말인가, 혹여 역당의 잔재가 여기 있더냐, 나오너라. 내 친히 목숨만큼은 살려줄 터이니!”

탐라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며 영암부사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다. 아예 바닥에 얼굴을 갖다 붙인 사람들도 제법 있었다. 그중 혼잣말로 구시렁거렸던 한 사내는 곧장 군사들에게 몽둥이질을 당하더니 몸이 축 늘어진 채로 어딘가 끌려가고 말았다.

그 모습을 슬쩍슬쩍 살펴보던 탐라 사람들은 모두 허리까지 숙인 채 호흡조차 조심스러워 했다. 각자 집으로 돌아가서 해질녘까지 돌아오라는 말에 살금살금 뒷걸음질하다가 재빠르게 뿔뿔이 흩어졌다. 흙먼지가 그득히 올라온 바닥에는 군데군데 흙이 눅진하게 젖어있었다.

“자네가 나를 도와줘야겠네.”

영암부사가 나를 향해 손짓했다. 정작 그의 앞에 서 있는 건, 지슬이었다. 난 몇 발자국 뒤에서 멀뚱하게 서 있기만 했다. 영암부사가 나지막이 이르기를, 아무래도 탐라 사람들과 직접 부딪치는 일은 자신이 아직 버겁다는 것. 군사를 얼마 내어줄테니 지슬이 직접 그들에게서 거둘 것들을 챙겨오라 하였다. 뒷걸음질까지 하며 고개를 내젓는 그에게 드리운 건, 부관의 칼이었다.

“내가 직접 나서길 원하진 않을 걸세, 아닌가?”

영암부사는 손바닥에 침을 뱉더니 칼자루를 문질렀다. 희미하게 드러낸 미소에 지슬은 고개를 내게로 돌렸다. 그의 눈에는 초점이 흔들렸고 턱부터 이마까지 땀으로 가득했다. 나는 그저 고개를 살짝 끄덕일 뿐, 어떤 말도 건넬 수가 없었다. 다리를 휘청거리면서 군사들의 부축을 받아 숙소로 향한 지슬, 도무지 그의 뒤를 따라갈 수 없었다. 대신 막사로 돌아가려는 영암부사에게 손짓했다. 사람이 어찌 그럴 수 있는지, 묻고 싶었으나 한 발자국 다가갈 새도 없이 그가 손을 내저었다. 군사들이 내 앞을 가로막았고 막사로 들어 간 영암부사를 살린 부관이 다가왔다.

“장군께선 사담을 나눌 시간이 없으시네. 이만 돌아가시게.”

말투는 나긋나긋했으나 내 어깨를 밀어내는 그의 손바닥은 돌이 따로 필요하지 않았다. 결국 발길을 돌리고 고여림 장군의 막사도 찾아갔으나 끝내 독대는커녕 부관과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처소로 돌아가면서 바쁘게 움직이는 군사들의 그림자를 잠시 바라보았다. 영암부사는 말단군사에게까지 그 나름의 임무를 상세히 부여했고, 탐라 사람인 지슬과 몇몇 자들을 따로 불러냈건만. 끝내 내겐 누구도 어떤 일을 하자고 손 내밀지 않았다. 도대체 난 지금 여기서 어디로 가야하고, 정녕 무얼 해야 한단 말인가. 무심결에 올라다 본 하늘은 구름이 붉게 물들어있었다. (계속)

▲ 차영민 소설가. ⓒ뉴스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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