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영민 역사장편소설

 

고여림은 그날부터 입가에 미소의 자취를 완전히 거뒀다. 수문장의 장례를 극진히 치르고 하루이틀은 평소처럼 활동하더니 갑자기 처소에 들어가더니 그림자조차 내밀지 않았다. 그의 부하들조차 그에게 다가갈 수 없었고, 모두 얼굴에 그늘을 드리운 상태로 각자 할 일만 조용히 맡았다. 영암부사도 몇 번 이건 그의 처소 앞을 서성거리며 화를 내고 달래기도 했으나 번번이 헛걸음이었다. 멀리서 내다본 그의 얼굴은 누구보다 짙은 그림자를 묻히고 다녔으나, 내 눈을 완전히 피할 순 없었다. 분명 자신의 처소에 들어갈 때쯤 묘하게 서린 미소를 감추지 않았다. 그의 곁을 지키던 부장과 몇몇 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지슬은 그때부터 나와 눈도 마주치지 않았고 특히 탐라 사람들과 마주치기라도 하면 일부러 가던 길까지 되돌렸다. 그를 향한 탐라 사람들의 눈빛은 하나같이 예리하게 날이 서 있었다. 몇몇은 대놓고 욕지거리를 했으나 그건 그저 허공에 공기와 함께 흩날릴 뿐이었다. 그마저도 더욱더 노골적일 수 없었던 건, 지슬의 몸에서 떠나지 않은 군복이 아닐까. 나 역시도 그에게 발이 선뜻 움직이지 않았고 그저 낯설기만 했다.

“야이 데령가민 몬딱 죽어마씨, 살려줍써.”

수문장의 장례를 마친 바로 다음 날부터, 군사들은 특히 마을 곳곳에 젊은이들을 찾아서 끌고 가기 시작했다. 내가 봤던 가족들은 대부분 온몸으로 막아섰으나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동안 사내들은 끌려가서 군영 곳곳에 노역을 도맡게 했으나, 여인들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끌려간 여인들은 막사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다. 내가 성내 곳곳에 조용히 살펴보면서 몇몇 집을 일부러 더 찾아 가본 결과, 끌려간 여인들이 돌아온 집 역시 한 곳도 없었다.

그나마 안면이 있는 군사들에게 은근슬쩍 물어봐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영암부사를 독대하여 내가 본 것들을 이야기했으나 특별히 대답은 내놓지 않았다. 다만 내가 앞에 있는데서 부장을 불러내더니 괜히 소란 일으키지 말라며 그의 따귀를 후려친 게 그나마 대답이라면 대답이었을까? 이후에도 막사는 끌려 온 장정들이 오히려 더 늘어났고 어디론가 끌려가는 여인들의 모습도 더 자주 보였다. 바깥에서 군사들이 나랑 마주치면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일부러 거리를 두기도 했다.
지슬은 주로 영암부사 막사 근처에서 자주 마주쳤는데, 역시 서로 의도적으로 피하기에 급급했다.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가만히 쳐다보는 게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은밀히 스며든 적막함은 하루하루 공기처럼 성안 곳곳을 가득 메웠다. 군사와 탐라사람들은 같은 공간에서 보이지 않게 선을 그었고 가끔 둘 중 하나 선이 넘으면 늘 칼을 뽑은 군사의 미소가 마무리였다. 달포가 지났을 때쯤부터 고려 군영 앞으로는 탐라 사람들의 모습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그나마 보이는 자들도 막사에 부역하는 장정들의 가족들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여전히 고려군에 의식주만 약간 의탁한 채, 하루 한두 번은 성안을 전체적으로 둘러봤다. 영암부사가 의복을 따로 챙겨준 덕에, 성문 앞으로 아무리 지나쳐도 지난번처럼 불미스럽게 대하는 군사가 없어졌다. 오히려 영암부사 곁에 서 있던 나를 기억하고 먼저 달려와서 인사하는 자들도 생길 정도였다. 탐라 사람들과도 역시 가볍게 인사 정도는 나눴으나 내게도 경계를 풀지 않은 눈치였다. 간혹 어린아이들이 다가와서 먹을 것 좀 달라고 애걸하는 모습이 그나마 가장 가까이 대한다고 할까? 군량 조달 문제 때문이라도 개경으로 올라가거나 내려와야 할 터인데, 이에 대해서 누구도 속 시원하게 대답해주지 않았다.

언제일지 모르겠으나 돌아갈 때를 대비하여 잠을 청하기 전, 필히 탐라에서 있었던 일들을 하나하나 기록해두었다. 내가 거의 죽을 뻔했던 순간들과 지금 영암부사와 그 군사들의 행적들도 하나도 빠짐없이.

며칠이 지난 늦은 밤, 내가 기록했던 서책들이 사라지고 만 것. 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게 영암부사의 얼굴이었다. 막사는 어둠이 짙게 깔렸지만 그의 처소를 곧장 찾아갔다.

“장군은 지금 잠을 청하였소.”

처소 앞을 지키던 군사들이 나를 막아 세웠다. 당장 봐야겠다고 소리치자, 칼집을 만지작거렸다. 깊게 심호흡하고 눈에 힘을 줬다. 감히 조정의 관료를 능멸하는 것이냐고 목소리에 힘을 줬더니, 어깨를 밀어내던 그들이 잠시 주춤했다. 서로 눈치를 보는 사이, 처소에서 영암부사의 기침 소리가 흘러나왔다.

“모시어라.”

쭈뼛거리던 군사들을 내 손으로 직접 밀어내고 처소에 들어섰다. 뜻밖에도 영암부사는 침소가 아니라 탁자에 앉아있었다. 서책을 살펴보는 중이었는데 바로 내가 기록하던 그것이었다. 탁자 앞에 마주 앉아 도대체 이게 무슨 경우냐고 소리치며 그를 노려보았다.

“그대는 어찌 여기에 있는가?”

서책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찻잔만 연신 비워내고 있었다. 계속 항의했으나 기록된 부분을 끝까지 읽고서야 나와 눈을 마주쳤다. 입술을 삐죽거리던 그는 뒤로 기대앉아 다리를 올린 채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서책을 거둬가려고 하자, 그의 발이 손을 가로막았다. 탁자가 흔들리면서 찻잔이 떨어졌고 바깥에 군사들이 급히 들어왔다.

“내가 오해가 있었나보군.”

영암부사의 발이 내 손을 탁자에서 걷어냈다. 중심을 잃고 넘어지려는 나를 뒤에 서 있던 군사들이 붙잡아줬다. 영암부사의 손짓에 군사 중 하나가 발로 내 무릎을 꺾었다. 바닥에 찻잔 파편이 있는 건 딱히 신경 쓰지도 않았다.

“난 우리가 같은 생각을 하는 줄 알았지. 아닌가?”

영암부사가 손에 든 서책은 아직 먹도 마르지 않은 최근 기록이었다. 특히 얼마 전, 고여림의 수하와 있었던 일이 마지막인데 이를 다시 찬찬히 읽던 그의 얼굴은 짙게 물들었다. 그의 허리춤을 지키는 검이 괜히 눈에 더 선명하게 들어왔다. 나를 내려다보는 눈빛은 검보다 더 예리하게 날이 서 있었고.

“설마, 조정에 이를 그대로 갖다 바칠 셈인가?”

그는 내게 계속 질문을 던졌으나, 대답은 하나도 듣지 않았다. 그의 질문이 하나하나 늘어날수록 몸 어느 한 곳이 꺾이거나 비틀리거나 묶일 뿐이었다. 서책을 되찾는 건 고사하고 군사들에게 완전히 포박되고 말았다.

“나를 원망하지 마시게.”

그의 고갯짓에 군사들은 나를 옥사로 재빠르게 이끌었다. 왜 들어가야만 하는지, 계속 물었으나 돌아오는 건 다시 바닥을 향해 꿇은 무릎뿐이었다. 이번엔 그 충격이 강한 터라, 오른쪽 다리가 똑바로 펴지지도 않았다. 바닥이 눅눅하고 냄새도 낯설지 않은 옥사에 나 혼자만이 자리를 차지했다. 문이 잠기고 군사들이 사라지자 주변에 다른 사람의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돌로 쌓은 벽들에 둘러싸이고 몸을 곧게 펼 수 없는 좁은 바닥이 전부였다. 영암부사,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리한단 말인가. 서책은 내 손을 떠났지만 그의 행적은 내 머릿속에서 오히려 더 선명하게 드러났다.

해가 뜨고 지는 걸 네댓 번 볼 동안, 이곳엔 아무로 발길을 두지 않았다. 물론 벽 너머에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아무도 내 목소리에 답하지 않았다. 입술은 메말라가고 머리통이 점점 조이는 듯 통증으로 몰려오자, 도저히 내 의지대로 앉을 수도 설 수도 없었다. 썩은 내로 가득한 지푸라기 바닥에 얼굴을 뉘었다. 꺼끌꺼끌한 목구멍을 타고 그저 헛웃음만 호흡 대신 내뱉는 게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서서히 빛이 자리를 물릴 때쯤, 온몸에 한기가 스며들었고 눈앞이 아득하게 젖어 들었다.

“여보게.”

그 때문일까, 바로 앞에 서 있는 그림자를 미처 알아차리지 못 했다. 첫 번째 들렸던 목소리는 아무 생각 없이 넘겼으나 거듭 부르는 목소리에 귀가 절로 움직였다. 눈에 힘이 들어가면서 보인 건, 문 너머에 있는 군화였다.

“어서 일어나시게!”

나를 내려다본 그의 목소리가 귀에 분명 익었다. 횃불 너머로 드러난 얼굴과 손에 쥔 것에 갑작스럽게 숨이 들이마실 수가 없었다. 어떻게 여기에, 저것을! (계속)

▲ 소설가 차영민. ⓒ뉴스제주
저작권자 © 뉴스제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