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영민 역사장편소설

▲ 차영민 역사장편소설 <펜안허우꽈>. ⓒ뉴스제주

바닷물이 얼굴을 뒤덮었다. 따끔거리는 눈을 떠 보려고 했으나 칼로 찢어지는 고통에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양쪽 귓속으로는 물살이 부딪치는 소리보다는 낯선 자들의 웅성거림이 더 깊숙하게 파고들었다. 동시에 어깨부터 시작하여 팔다리까지 스며드는 통증에 온몸을 좀처럼 움직일 수가 없었다. 발끝을 힘껏 오므리면서 소리를 한 번 크게 내질렀으나 누구도 이에 반응하지 않았다. 오히려 세차게 들이친 바닷물에 몸이 견디지 못 하고 옆으로 밀려났다. 뭉툭한 기둥이 허리를 거칠게 후려치면서. 금세 머리까지 올라오는 찌릿함에 절로 눈이 떠졌다.

주변은 어둠이 내리깔렸지만 뒤덮인 허연 안개가 눈에 들어왔다. 사방에서 바닷물이 바람과 함께 세차게 들이찼다. 고개를 돌려보니 난 낯선 배의 갑판 위에 누워있었고, 머리 위로는 바람과 맞서는 큰 돛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당장 눈에 보이는 자들은 모두 군복을 입은 듯했으나 자세하게 보이진 않았다. 나와 동행했던 자들은 당장 주변에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배가 기우는 대로 내 몸은 절로 굴렀고, 곳곳에 기둥과 상자에 허리부터 온몸이 구석구석 부딪쳤다. 의도치 않게 본능적으로 몸을 일으켰으나 그마저도 쏟아지는 비바람에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따라와!”

바닥에 엎드려 거의 기고 있을 때, 낯선 손길이 내 뒷덜미를 끌어당겼다. 난 반쯤 일어났다가 뒤로 나동그라지면서 어디론가 질질 끌려 들어갔다. 내부로 들어서자 당장 바닷물은 들이닥치지 않았으나 물건들이 제자리를 잃고 여기저기 나뒹굴었다. 나를 끌고 온 자도 날아든 그릇에 얼굴을 맞고 쓰러졌다. 내 뒷덜미는 또 다른 손이 붙잡았고 안쪽에 있는 문을 열고 끌고 들어갔다. 아직 쓰러지지 않은 탁자 하나만 눈에 들어오는 작은 공간이었다. 탁자에 기대어 선 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자인가?”

묵직한 목소리와 함께 뒷덜미가 잡아당기는 손길에서 놓였다. 배가 갑자기 오른쪽으로 바짝 기우는 터라, 몸은 자연스럽게 벽으로 붙었다. 산발적으로 터지는 괴성에, 나를 데려온 자는 급히 바깥으로 나갔다. 이 공간엔 나와 맞은편에 꼿꼿하게 기대고 있었다. 어두워서 그의 얼굴은 제대로 볼 수 없었으나 떡 벌어진 어깨와 작은 체구만큼은 확실히 눈에 들어왔다.

“자넨 누구인가.”

바로 앞까지 다가왔으나 오히려 짙어진 그림자에 얼굴은 더 어둠 속으로 파묻혔다. 목소리는 차분하면서도 한 글자 한 글자 내뱉은 발음이 명확했다. 주변 상황과 달리 오히려 거칠어 오르는 호흡을 절로 가라앉혀줄 정도였다. 여전히 팔다리에 감각이 온전히 않았으나 이를 꽉 깨물었다. 허리를 곧게 펴고 그의 그림자와 마주 보았다. 얼굴은 확실히 내 턱보다 아래에 있었다. 그러나 나를 올려다보는 눈빛에 어깨가 절로 움츠러들었다. 잠긴 목을 가다듬고 여긴 어디냐고 되물었다. 금방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점점 더 기우는 배와 점점 더 크게 쏟아지는 괴성만으로도 충분했다. 다만 내가 여기까지 들어오는 동안, 함께 배에 올랐던 자들의 자취가 묘연한 게 당장 의아할 뿐. 그들의 행방을 조심스럽게 물었다.

“동료인가?”

대답 대신 또다시 질문이 돌아왔다. 미묘했지만 그의 목소리가 살짝 거칠어졌고 눈길이 차가워졌다. 내가 굳이 숨길 건 없었다. 당장 조정으로 돌아가야 했고, 의도한 건 아니지만 그들과 동행은 어쩔 수 없었던 부분이라고. 괜스레 등에 땀이 맺혔지만 거짓을 고한 건 아니었다. 그의 헛기침에 나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거렸고 다시 호흡이 가빠졌다. 기울었던 배가 제자리를 찾았으나 난 엉거주춤한 자세에서 움직일 엄두가 나질 않았다.

“그분의 명을 받들었는가?”

그분, 탐라에 내려와서 처음 들은 단어. 어찌 잊을 수가 있겠는가, 이럴 줄도 모르고 내려온 게 그분의 명이었거늘. 내가 되물었다. 혹여 그분을 알고 있느냐고. 부디 영암부사와 고여림 장군만 그분이 보낸 게 아니길 믿고 싶었다. 그가 양손으로 내 어깨를 붙들고 갑자기 세차게 흔들었다.

“살아있었구려!”

조금 전과 달리 목소리가 한껏 격앙되었다. 나를 부둥켜안기까지 했다. 내가 살아있다는 자체로 기뻐해준 자가 거의 처음이었다. 선뜻 미소를 머금을 수 없었던 건, 그분이 나를 내려보낸 건 어찌 알았단 말인가. 의아함을 속을 삭이지 않고 입으로 내뱉었다.

“난 그대와 뜻을 함께 하러 왔소.”

함께할 뜻이라, 난 그저 그분의 명을 따라 탐라의 사정만 살펴보면 될 뿐인데 또 다른 무엇이 있단 말인가. 괴성이 줄어들고 배의 요동이 사라지자, 그는 탁자로 돌아갔다. 불을 밝히자 바닥은 서책과 무기, 온갖 물건들로 난장판이었다. 쓰러진 의자를 직접 세운 그는 손짓으로 권했다. 서로 마주 앉고서야 제대로 그의 얼굴을 살펴볼 수 있었다. 아래로 처진 눈은 크기가 제각각이었고 뭉툭하게 솟아오른 큰 코 아래로 두툼한 입술이 아래로 꼬리를 내렸다. 수염은 인중과 턱을 모두 덮었는데 제법 가지런하게 정돈된 상태였다. 내 얼굴을 찬찬히 살펴본 그는 한숨부터 내뱉었다.

“초면이지만 낯빛부터 얼굴이 영 아니올시다.”

비단 얼굴 뿐만이 아니었다. 바닷물에 젖은 옷은 팔다리부터 곳곳에 발갛게 달아오른 살이 드러났다. 발바닥은 상처가 무르고 터져서 허옇게 질린 상태였다. 한두 번도 아니건만, 하루하루 나 스스로도 헛웃음이 터져 나올 지경이었다. 반면에 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의복을 정갈하게 갖춰 입었고 허리에 넓은 칼자루를 찬 상태였다. 혀를 끌끌 차던 그는, 물부터 권했고 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옷을 집어 들더니 직접 걸쳐주기까지 했다.

그는 탁자와 주변에 널브러진 물건들을 발로 밀어내고 다시 앉으면서, 자신은 그분이 친히 선봉대로 보냈다고 밝혔다. 이름은 이문경, 대몽항쟁 그 이전부터 지방을 떠도는 장수였다고 한다. 그래서였을까, 그분에게서 그의 이름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조정에서는 탐라를 몽골과 강화 이전부터 예의주시해왔다던데. 그분은 내가 도통 소식을 전하지 않아서, 심히 걱정이 많았다고 했다. 그 밖에 돌아가는 사정을 알 수가 없는 터라, 결국 자신이 탐라로 내려가는 중이라던데. 언뜻 영암부사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미 고여림 장군까지 두 차례 보냈는데 어찌 자신이 제일 처음 내려오는 것처럼 말한단 말인가. 다른 지방에 주둔하던 중 그분의 서찰을 받은 것이니, 조정에서 먼저 보낸 것 자체를 모르는 눈치였다.

“탐라 상황은 어떻소?”

오직 나만 기다리는 터라, 탐라와 관련된 어떤 소식도 알지 못 한 그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차분히 밝혔다. 시간이 흐르면서 더 이상 배는 요동하지 않았고, 중간중간 그의 수하들이 오갈 때도 별다른 소식은 없었다. 역풍이 사그라지지 않아서 앞으로 나아가는 속도가 느린 게 탈이라면 탈일까.

그가 따로 챙겨준 약간의 술과 음식으로 허기를 해결하였다. 문득 다시 나와 함께 왔던 자들의 소식이 궁금했다. 아까 물었을 땐, 속 시원한 대답이 없었던 터. 다른 이야기와 함께 은근슬쩍 물었더니, 그가 목을 가다듬었다.

“그들이 누군지 아시오?”

알 리가 있나, 고여림 장군이 숨겨둔 수하라는 것밖에. 그 역시도 정체를 정확히 모른다고 했다. 나를 바다에서 건질 땐, 나와 함께 있던 자들 대부분 부분 숨을 거뒀다고 했다. 그나마 숨이 붙어 있던 마지막 한 사람도 내가 깨어나기 전에 이미 숨이 끊어졌다고. 물결이 잠잠해지지 않는 와중에 나를 건져내고 살려낸 건, 자신의 수하들이 목숨을 건 덕분이라며 목에 한껏 힘을 실었다. 그에게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고개를 연신 숙였을 때, 탁자에 난 구멍 사이로 떨어진 깃발이 보였다. 어째, 그 문양이 낯설었다. 이내 잠시 바깥으로 나가자는 그의 손짓에 더 자세히 보진 못 하였다.

바깥은 여전히 어둠이 짙게 깔렸고 안개가 바다를 넓게 뒤덮었다. 배는 돛을 내린 채, 바람을 거스르며 천천히 나아갔다. 군사들은 곳곳에 널브러진 물품을 정리하느라 분주했다. 갑판 한가운데로 축 늘어진 것을 차곡차곡 쌓아뒀는데 가까이 다가가보니 사람이었다. 모두 피로 범벅이 되었고 얼굴은 푸른빛이 감돌았다. 이보다 나 등골에 한기를 돌게 한 건, 입고 있던 군복이 낯설지 않았던 것. 오히려 시체를 나르는 자들의 군복이 미묘하게 낯설었다. 내 옆에 선 이문경, 이 자의 군복도 내가 그동안 봐 왔던 것들과 문양부터 달랐다. 도대체 이들은 누구란 말인가. 안개 속에서 희미한 불빛이 드러나기 때쯤, 북소리가 갑자기 울리기 시작했다. 환호하는 군사들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식은땀이 온몸을 뒤덮었다. (계속)

▲ 소설가 차영민. ⓒ뉴스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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