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영민 역사장편소설
북의 울림이 온몸을 휘감았다. 바닷물은 탐라를 눈앞에 두고 길을 쉬이 열어주지 않았다. 낯설지 않은 거센 물결이었지만, 뱃속에 창자는 이미 뒤엉킨 듯 도무지 허리를 제대로 펼 수가 없었다. 여기서 한 가지 확실한 건 배가 쉬이 길을 열지 못 할 뿐 기대치보다 안정적으로 움직였다.
군사들은 하늘로 바짝 내지르던 환호를 거두자마자 각자 자리에 돌아갔다. 닻과 물건들을 재정비하면서 역풍에 꿋꿋하게 버티기 시작했다. 물론 넘어지고 아예 배 바깥으로 떨어진 자도 있었다. 모두 그들에게 시선이 가고 움직이고 싶었겠지만, 각자 자리를 지키는 자체도 버거워하고 있었다. 갑판 한가운데에 꼿꼿하게 선 이문경 곁으로 다가갔다. 이러다가 배가 뒤집어질지도 모르겠다고 했더니, 고개를 슬쩍 돌린 그는 웃음을 드러냈다.
“부서질지언정 뒤집히진 않을 거요.”
단호했다, 그 말이 틀리지도 않았다. 분명 높은 물결에 배가 옆으로 바짝 기울어져도, 금세 제자리를 찾았다. 파도가 사방으로 몰아쳐도 흔들리고 닻이나 배의 일부가 부서졌지만 전혀 뒤집어질 기미가 없었다. 오히려 비바람의 흐름을 따라 내 몸만 휘청거릴 뿐이었다. 정작 군사들은 과감하게 닻을 펼쳤고 바람에 맡기기까지 했다.
결국엔 탐라 땅 위로 피어난 불빛을 두 눈으로 담아낼 수 있었다. 그것도 잠시, 닻은 불빛과 멀어지더니 다시 사방이 어두컴컴한 바다 위를 천천히 누볐다. 물결의 잠잠해질 때쯤, 달빛에 어스레하게 비친 돌이 보였다. 닻을 올려 속도를 조절한 배는 그대로 들이받듯 바짝 붙였다. 파도가 부딪힐 때와 다른 묵직한 진동이 배를 뒤덮었다. 거기다가 여전히 거친 바람이 비를 몰고 따라왔으나 군사들의 움직임에 큰 영향을 주진 않았다.
“서둘러라!”
배 곳곳에 피운 횃불이 꺼졌다. 그림자들이 오로지 달빛에 의지하여 분하게 움직였다. 난 기둥을 붙잡고 눈앞에 스치는 그림자들만 멀뚱하게 지켜보고만 있었다. 이문경 역시 군사들과 함께 움직였던 터라, 지금 무얼 하는 중인지 알려줄 기미가 딱히 보이지 않았다. 다른 곳으로 몸을 움직여보려다가 뒤에서 달려오던 그림자와 어깨를 부딪쳤다. 넘어진 건 나뿐이었고 그림자는 유유히 가던 길에 충실했다. 잠깐이었지만 쇠몽둥이에 부딪친 것처럼 머리끝까지 아릿아릿했다.
뱃머리로 그림자들이 모여들더니 횃불이 서너 개 피어올랐다. 눈 앞에 드러난 군사들의 움직임은 도무지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비바람이 세차게 때리는 절벽에 하나둘 달라붙더니 맨손으로 올라가는 게 아니던가. 잠시 어두웠던 사이, 절벽 위에 이미 올라가서 줄을 내린 자들도 있었다. 이문경은 군사들 곁에 서서 한 명씩 올려 보내고 있었다. 거의 몇 명 남지 않았을 때, 그의 눈이 나를 향했다.
“얼른 오시오!”
횃불 아래로 빠르게 움직이는 그의 손에 시선을 애써 피하고 있었다. 결국 아직 올라가지 않은 군사들이 다가와서 직접 줄 앞에까지 데려다주었다. 포구에 정박하면 될 것을, 어찌 이러냐고 물었으나 몰아치는 비바람과 함께 흩날리고 말았다.
물기에 젖은 아무리 꽉 잡아도 미끄러지기 일쑤였다. 손바닥이 따끔거렸고 팔에는 도무지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옆에서는 연달아 한숨이 터져 나왔고, 위에서는 얼른 올라오라는 큰소리가 울렸다. 가까스로 몸집이 우람한 군사의 도움을 받고 살짝 올라갈 수는 있었다. 이를 꽉 깨물고 엉덩이까지 조였으나 더 이상 올라갈 수 없고 그저 대롱대롱 매달린 형태였다.
“내 참, 어찌 사내가!”
밑에서는 한껏 격앙된 이문경의 목소리가 내 뒤통수를 찔렀다. 그냥 놓으라고들 했으나 손가락에 감각이 무뎌지니, 그마저도 내 의지를 따를 수 없었다. 결국 아래에서 순서를 기다리던 두 사람이 맨손으로 내 옆까지 올라왔다. 한숨과 함께 줄을 당기더니 내 발목과 허리를 꽉 묶더니 먼저 올라갔다. 그들도 손이 몇 번 미끄러졌으나 나무 오르듯 금세 올라갔다. 나를 묶은 줄이 점차 올라가면서 손도 자연스럽게 놓았다. 매달려서 비바람까지 멈추지 않으니 돌부리와 부딪쳤고 끝까지 올라왔을 땐 머리부터 발끝까지 안 긁힌 곳이 없었다.
“준비되었느냐!”
마지막으로 올라온 이문경이 손을 들자, 군사들도 함께 움직였다. 배는 절벽 아래에 놔둔 채, 풀숲과 돌밭을 해치며 계속 전진하였다. 민가를 맞닥뜨렸을 땐, 군사 서넛을 먼저 보냈다. 마을 자체는 티 나지 않게 빙 두르거나 조용히 지나쳤다.
함께 움직이는 인원은 대략 쉰 남짓. 적지 않은 수였지만 이들은 어둠 속에서 발소리를 죽이며 거침없이 나아갔다. 바람 속에 숨는 방법을 안다고 할까나. 반면에 나는 점차 그들과 거리가 벌어지더니 희미한 그림자의 뒤꽁무니만 겨우 쫓을 지경이었다. 멈추지 않을 것만 같았던 그들의 행진은 바로 성을 앞에 두고 주춤하였다. 성루에 설치된 횃불들 사이로 군사들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들은 성 주변을 살폈으나 내가 있는 쪽은 전혀 알아보질 못 하였다.
이문경의 신호에 따라 군사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으나 어둠이 한계치까지 짙어졌는데도 앞으로 나아가는 자가 없었다. 갑자기 뒤로 전열을 조금씩 물리더니 우리가 왔던 방향으로 되돌아가는 게 아닌가. 도대체 어딜 가냐고 묻자 이문경은 그저 가볍게 턱짓하면서 가장 선봉으로 나아갔다. 중간 중간에 그냥 지나쳤던 마을로 군사들을 몇몇 보내면서 상륙했던 절벽까지 되돌아왔다. 설마 다시 내려가겠느냐고 묻자, 이문경은 고개를 내저었다. 대신 절벽에 줄을 던지고 기다리더니 갑자기 군사들과 함께 도로 당기기 시작했다. 그 줄의 끝에는 나무로 된 상자들이 매달려 있었다. 거의 열댓 상자를 끌어올린 뒤 다시 성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미리 마을에 들어 간 군사들이 이문경 앞으로 다가오더니 상자를 하나씩 받아갔고, 성문과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마을엔 이문경이 나머지 군사들과 함께 들어섰다.
“불을 피워라.”
듬성듬성 자리 잡은 민가들 한가운데에 선 이문경이 목소리를 키웠다. 군사들은 그를 중심으로 사방에 횃불을 피웠다. 사람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는데, 모두 얼굴에 핏기가 사라진 상태였다. 군사들을 바라보는 눈빛엔 낯설지 않은 두려움도 잔뜩 서려 있었다. 군사들이 모이라고 채근했으나 각자 어떻게든 거리를 두느라 여념 없었다. 그것도 오래가진 않았다. 이문경이 군사들과 함께 챙겨 온 상자에는 식량이 가득했기 때문.
“뭣들 하시오. 아직 배가 덜 고프나 보오!”
군사들이 직접 식량을 챙겨 한두 사람에게 건네주자, 나머지 사람들은 알아서 몰려들기 시작했다. 상자 속 식량은 금세 동이 났고 이문경은 군사들을 뒤로 물리고 사람들 앞에 섰다.
“여러분, 이제 때가 왔소이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송구하외다.”
무슨 말일까, 때가 됐다니. 그의 목소리에 귀를 바짝 세웠다. 내용을 듣던 사람들은 웅성거렸으나 난 팔다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이문경과 함께 한 이들은 앞바다에서 제법 오래 버티고 있었는데, 중간중간 작은 배로 사람을 보내서 이미 탐라를 살펴보던 중이라고 한다. 그들은 이미 마을사람들과 내통하여 탐라가 돌아가는 파악했다고 한다. 왜 곧장 성이 아니라, 외곽 마을 사람들과 내통한단 말인가. 나의 궁금증이 입 밖으로 내뱉기 전, 이문경이 두 팔을 뻗었다.
“몹쓸 것들로부터 해방합시다. 우리와 함께 배고프지도 맙시다!”
몹쓸 것, 해방 당장 무엇을 뜻하는 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두 손을 하늘 높이 들었다. 아주 짧고 굵게 환호를 드러내고야 말았다. 이문경의 손짓에 갑작스럽게 뿔뿔이 흩어진 백성들의 손에는 낫과 죽창을 들고 다시 모였다. 횃불 너머로 드러난 얼굴은 여전히 상접한 피골이 역력하지만, 눈빛만큼은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오히려 내가 저 성 안에서 봤던 백성들의 모습이 무기력하고 하찮아 보일 정도였다.
“역적 개경 놈들부터 몰아내야 하오!”
이 말만큼은 내 귀를 의심하고 싶었다. 역정 개경 놈들, 단순히 영암부사만을 가리키는 걸까? 그와 잠시 나눴던 이야기를 다시 떠올려보았다. 어둠이 점점 물러나면서 드러난 그와 군사들의 옷차림에 더욱더 눈길이 갔다. 지금 내 머릿속에 번뜻 들어온 생각이 틀리지 않다면, 이들은 바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