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임종 칼럼]보고 듣고 느낀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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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졸업 후 신성여중 급사로 취직하여 처음으로 직장생활을 시작하게 된 나는 어린 나이임에도 세상 물정을 터득하기 시작했다.
신성여중 재학생 가운데 공부도 잘했지만 누가 시키지 않는 궂은 일을 말없이 맡아 하는 학생이 있어 눈여겨 보아 왔다. 그녀는 제주사범 졸업후 초등학교 여선생으로 사회에 진출한 H 여선생이다.
H 여선생은 불우한 가정에서 어렵게 자랐지만, 마음씨가 착하고 부지런하여 주위의 많은 도움을 받으며 공부를 마칠 수 있었다. 신성여중을 거쳐 제주사범을 졸업한 그녀는 초등학교 여선생으로 발령받고 희망찬 출발을 시작했다. 그녀는 공부도 잘 했지만 똑똑하고 영리하여 무슨 일에서나 모든 이의 칭송을 받았다.
그녀는 불우한 처지의 남학생을 교회에서 알게 되었고, 여중시절부터 계속 친하게 지내며 서로 사랑하는 사이로 발전하였으나, 남들에게도 굳이 숨기려 하지도 않았다. 남학생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군에 입대하여 육군 대위까지 승승장구 잘 나가고 있었고, 초등학교 선생인 그녀는 결혼식 올릴 시가만 기다리며 하루하루 세월을 보냈다.
오랜기간 교제 끝에 둘은 서울의 어느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고 1주일의 달콤한 신혼여행도 다녀오게 되었다. 신혼여행 후 신랑은 전선의 부대로 복귀하고, H여선생은 고향 제주의 학교로 돌아왔다. 결혼과 신혼여행등으로 학교를 비웠던 그녀는 밀린 일들을 처리하느라 정신없는 나날을 보냈다.
간신히 짬을 내어 혼인신고를 하려고 제주시청을 찾았던 그녀는 기절 초풍할 사실을 발견하고야 말았다. 신랑의 호적에는 이미 부인이 있었고, 자녀도 3명나 입적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처자를 거느리고 있음에도 불고하고 뻔뻔스럽게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신혼여행까지 다녀왔으니, 실망과 배신감으로 분노가 겹쳐 눈앞이 캄캄했다.
신랑은 군부대가 있는 곳에서 결혼식 없이 노리개삼아 여자를 데리고 살았고 그 사이에서 아이가 세 명이나 태어났음에도 양심에 가책도 없이 첫 애인인 자신과 당당하게 결혼식을 올린 것이다.
세 명의 자녀가 태어나도록 동거하였으면 그 여자에게도 어느 정도 애정이 있었을 터인데 첫사랑이던 H 선생과 결혼한다는 사실을 그녀에게도 알리지 않고 몰래 결혼 파렴치범이다. 두 여자를 속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그는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노리개로 최급했던 그 여자는 남편의 앞날을 예감했던지, 남편 몰래 혼인신고를 하고 아이들까지 입적시켜 놓았던 것이다. 남자는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혼인신고도 못해 보고 둘은 다시 만날 필요없이 영영 헤어지고 말았으니 여선생이 받은 충격은 엄청났다. H여선생은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일상생활에도 의욕을 상실하여 결국 교직에서도 그만 떠나고 말았다.
한참 세월이 흐른 뒤 나는 은행 지점장회의 참석차 부산에 출장을 갔는데, 길거리에서 우연히 고향사람 K를 맞추쳤다. 그는 나에게 반가이 인사하며 “돈, 좀 빌려줍서.(빌려주세요.)제주 가는 여비가 모자라서....고향 가서 드리쿠다.(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했다.
평소 그 분의 평판이 그리 좋지 않음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나도 출장 온 몸이고, 이제 다시 서울ᄁᆞ지 올라갔다 돌아갈 예정이라 출장비 밖에는 없습니다. 얼마나 필요하신 겁니까?”
하고 물었다.
“여유있는 대로 빌려 주시면 됩니다.”
하기에 지갑에서 5만원을 꺼내어 드리며
“여우가 없어서 죄송합니다.”
하고 헤어졌다.
지점장 회의가 끝나고 점심 식사 끝에 지점장 일행들과 다방에 들어갔다. 그런데 다방 구석에 아까 마주쳤던 그와 H여선생이 마주않아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일단 못 본 척 외면했다.
서울로 가는 비행기를 탔는데, 또 그 남자를 마주쳤다. 제주로 돌아가는 여비가 부족하다던 그를 서울가는 비행기 안에서 또 만나게 된 것이다. 그는 나를 보자 멋쩍은 표정으로 미소지었으나 더 이상 서로 말없이 각각 자리를 잡았다.
그 뒤 빌려준 돈 갚겠다는 말은 전혀 없었고, 그와 H여선생이 재혼하였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나는 혼자 속으로 ‘아!H 여선생이 또 다시 남자에게 속는구나!’ 하고 긴 한숨을 쉬었다. 아니나 다를까! H 여선생은 딸 하나를 낳았지만 재혼에도 실패하여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뜨고 말았다.
꿈 많던 여학생, 잘 나가던 여선생이 남자를 잘못 만남으로 인하여 말로가 이렇게 허망할 수가 있을까....첫사랑이던 남자는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 그 자신도 고향에 돌아올 체면이 없었던지 행방이 묘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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