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영민 역사장편소설

   
▲ ⓒ뉴스제주

불길은 높게 솟아올라 이문경과 삼별초 군사들의 뒷모습을 완전히 가렸다. 그 주변에 있던 탐라사람들은 모두 괴성과 함께 사방으로 달아나기 분주했다. 나 역시도 소리만 안 질렀을 뿐, 다리를 빠르게 움직였다. 붉게 타오르던 불은 점차 시커먼 연기를 몰고 오더니 금세 눈앞까지 들이닥쳤다.

“가게 마씸!”

옥사에 함께 있었던 그가 뒷덜미를 끌어당겼다. 눈동자가 시뻘겋게 달아오른 그, 연기를 들이마시더니 기침을 멈추질 못했다. 뒷덜미를 잡던 손이 바닥에 떨어졌고, 도리어 내가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어렴풋하게 보이는 민가의 담장으로 다가가 몸을 바짝 붙였다. 높아지는 불길만큼 뜨거운 기운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성주청 안에서는 간간이 불화살이 몇 개씩 날아올랐다. 사방에서 빗발친 비명 사이로 칼이 부딪치는 소리가 섞여 있었다. 짙게 퍼지는 연기 사이로 움직임이 날랜 그림자가 하나둘씩 나타났다. 

얼른 담장 안쪽으로 자리를 옮겼고, 등을 벽에 바짝 기댄 채 몸은 최대한 웅크렸다. 함께 있던 그와 최대한 숨을 참았지만, 낯선 발소리가 우리 쪽으로 점점 커져만 갔다. 돌 틈 사이로 두 개의 그림자가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모습이 분명하게 보였다. 마침 바닥에 떨어진 돌멩이 하나를 주워들고 그림자의 동태를 살펴보았다. 그들 뒤로 재빠르게 움직이는 다른 그림자들, 점점 날을 세우는 비명들. 불길의 붉은 기운은 많이 수그러들었지만 시커먼 연기는 어느덧 하늘까지 뒤덮을 지경이었다. 바람이 바뀌면서 연기는 돌 틈 사이로 스며들더니 눈을 금세 가리고 말았다.

눈을 비비려고 할 때, 낯설지 않은 예리한 날이 내 목에 닿았다. 애써 계속 숨을 꾹 참았으나 터져 나오는 기침은 막을 수 없었다. 머리채가 잡힌 난 몸부림 할 새도 없이 질질 끌려갔다. 연기 때문에 눈을 깜빡거려도 뜰 수 없었으나, 양옆으로 터지는 비명은 귓속에 더욱 선명하게 박혀왔다. 칼은 계속 내 목을 겨누고 있었으나 베거나 파고들진 않았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몇 차례 지나고, 칼에서 나온 굉음으로 머릿속을 울릴 때쯤. 머리채를 붙잡던 손이 떨어져 나갔다. 등 뒤로는 여전히 사람들의 비명이 끊이지 않았다. 최소한 내가 엎드린 이곳만큼은 적막함이 더 무겁게 자리 잡았다. 콧속으로 연기도 더 이상 스며들지 않았고 눈도 조금씩 뜰 수 있었다. 어둑하게 내려앉은 촛불들 사이로 낯익은 군복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수십 개의 다리를 넘어 나와 정면으로 얼굴을 마주본 자는 바로 영암부사였다.

“어찌 우리가 이리 보아야만 하는 것이냐?”

그의 얼굴부터 온몸이 피로 얼룩졌고, 손에 쥔 칼은 핏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의 곁을 지키던 군사들의 모습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어둑해서 정확한 건 아니지만, 최소한 성주청의 건물 중 한 곳은 분명했다. 내가 입을 떼기 전에, 군사 중 한 명이 갑자기 바깥으로 나가더니 다시 돌아오진 않았다. 김수는 내 이마에 칼끝을 들이밀었다.

“다시 묻겠네. 어찌 이리 되었는가?”

글쎄, 그가 내게서 어떤 답을 원한 걸까. 삼별초가 탐라 사람들과 규합하여 성주청까지 밀고 온 건 사실이 아니던가. 설령 내가 고여림 장군과 따로 얘기한 걸 밝힌들, 저 칼이 피로 더욱 진하게 물들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을 테니. 나의 사실은 그에게 진실이 될 수 없을 뿐, 그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말의 전부였겠지만. 이마저도 마른침과 함께 삼켰다.

“자네를 믿었건만, 어찌 역심을 품었단 말인가.”

역심이라니, 코웃음이 나도 모르게 터져 나왔으나 어떤 말도 내뱉을 수 없었다. 그의 칼끝에서 흐른 피는 내 얼굴을 타고 바닥에 떨어졌다. 더 이상은 그의 눈빛은 내 얼굴에 닿지 않았다. 칼도 역시 금세 거두고 말았다. 물론 그의 의지가 아니었다. 바깥에 울리던 비명은 금세 이 공간까지 들어섰다. 왼편에 있던 문들이 부서지고, 창과 도끼, 화살들이 비바람처럼 쏟아졌다. 바로 양옆으로 서 있던 군사들이 쓰러졌고. 영암부사는 몇몇 군사들과 함께 서둘러 몸을 피하였다. 바로 코앞으로 창 하나가 날아들었으나 스쳐서 반대편 벽에 박히고 말았다.

“이보시오, 어찌 여기에!”

이문경이 나를 보자마자 앞으로 달려왔다. 영암부사 못지않게 온몸이 피범벅이 된 그는, 내게 손을 내밀어서 일으켜 세웠다. 비명은 점차 바람과 함께 사라지고 있었다.

성주청의 마당은 온통 붉게 물들어있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게 시뻘건 핏자국 그 자체였다. 비명이 사라지자 하늘을 뒤덮은 까마귀의 울부짖음으로 대신했다. 성주청 바깥의 불길은 완전히 잡혔고 검은 연기는 아직 그 기운을 완전히 거두지 않은 상태였다. 시체들을 바깥으로 내보낸 군사들이 이문경 앞에 섰다. 그 옆으로는 살아남은 탐라 사람들도 모여들었다. 그중엔 나와 함께 숨어있던 자도 함께였다. 이문경의 바로 앞에는 내가 서 있었다.

“탐라는 오늘부터 역당으로부터 해방되었노라. 잔재들은 하루빨리 쓸어버리자!”

이문경, 그의 목소리에 사람들은 모두 함성을 내질렀다. 곧이어 전투 중에 붙잡힌 고려군 포로들이 삼별초 군사들의 손에 이끌려왔다. 모두 줄에 묶인 채, 몸부림을 쳤으나 그들에게 돌아가는 건 욕지거리가 섞인 발길질이었다. 탐라 사람들 중엔 돌멩이를 던지는 이들도 제법 많았다. 이문경을 향해 머리를 땅에 붙인 그들은, 하나같이 얼른 죽여 달라고 소리쳤다.

“좋다, 그리하지.”

이문경, 그의 칼은 조금도 망설임이 없었다. 맨 오른쪽에 있던 고려군의 목이 날아가자 나머지는 조금 전보다 목소리를 줄어들었다. 이문경은 한 사람들 칼을 목에 겨누고, 영암부사와 고여림의 행방을 물었다. 속 시원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온몸을 떨며 그저 올려다보다가 목이 달아난 자가 있었고, 살려달라고 울부짖었다가 가슴팍에 칼이 깊숙하게 박힌 자도 있었다. 다섯 명이 그의 칼에 쓰러지고 그다음 사람, 뒷모습이 낯설지 않았다. 나 혼자만 그리 느낀 것도 아니었다. 탐라 사람 중 몇몇이 일어나더니 얼굴을 벌겋게 붉힌 채, 달려들려고 했으나 군사들의 손에 막히고 말았다.

“자이는 나신디 줍써!”

바로 목을 내리치려던, 이문경의 칼이 탐라 사람들의 목소리에 멈추었다. 잠시 내려다보던 이문경은 자신의 바로 아래 있는 자를 일으켰다. 뒷덜미를 꽉 붙든 채 우리 쪽으로 몸을 돌렸다.

“이 자는 누구인가!”

난 입을 다물지 못 했다. 비록 얼굴은 피투성이였지만 한 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바로 그, 지슬. 나와 눈이 마주치자 몸을 어쩔 줄 몰라하는 건 바로 그였다. 이문경의 시선은 바로 내게로 향했다.

“아는 자인가?”내가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탐라 사람들은 지슬의 행동을 숨김없이 쏟아냈다. 탐라 사람들을 제 손으로 죽이고 고려군에 부역하도록 앞장선 건, 누가 뭐라 해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를 알고 있었다. 그런 행동 자체가 어디서부터 나왔는지를. 탐라 사람들도 모르진 않을 것이다. 다만, 지금은 스스로 알지 못 해야 할 뿐. 그들의 시선은 다시 내 쪽으로도 향했다.

“자이도 어디서 봐신디!”

그중엔 고려군과 함께 있던 나를 기억하는 자가 여럿 있었다. 자신에게로 향한 나의 얼굴을 본 그들은 점점 눈이 커졌다. 그 부분, 내가 굳이 숨길 게 없었다. 지슬이 어떤 자인지 먼저 밝혔다. 내가 영암부사와 함께 있었던 건, 이문경에게 익히 말해뒀던 터라 어떤 의미로 이해했는지 모르겠으나 그 부분은 별다른 언급이 없었다. 다만 흰자위가 잔뜩 드러난 지슬의 눈을 바라보는 이문경은 갑자기 입꼬리를 올렸다. 순간 말문이 막혔고, 동시에 탐라 사람들도 잠잠해졌다.

“네놈 눈빛이 예사롭지 않구나. 살고 싶으냐?”

지슬은 고개를 내저었다. 대신 누군가 꼭 죽여야 할 사람이 있다고 대답한 걸, 내가 해석해주었다. 처음 탐라에서 깨어났을 때, 만나고 수차례 도움을 줬던 부분도 얘기했더니 이문경의 눈썹이 들썩였다. 아직 처리하지 않은 나머지 고려군을 하옥시킨 이문경은 직접 자신의 처소로 지슬을 이끌었다. 나도 함께 따라오라고 하며 군사들과 탐라사람들을 모두 해산시켰다. 도대체 이문경은 무슨 생각이란 말인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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