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영민 연재 역사장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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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울었다. 피비린내가 짙어질수록 사방에서 몰아치는 바람의 울음은 땅바닥에 곤두박질하였다. 내 목에 스민 칼도 바람과 함께 떨리고 있었다. 눈앞에 쓰러지는 사람들은 늘었지만 정작 난 똑바로 서 있을 뿐이었다. 삼별초 군사들은 군영에서 뿔뿔이 흩어졌고 그 자리는 낯선 그림자들이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횃불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는데 다름 아닌 고여림과 그의 수하들이었다. 나처럼 붙들린 자들은 하나둘 고여림 앞으로 끌려갔다.

“오랑캐는 살릴지언정 역당은 그럴 수 없지.”

그가 팔을 뻗자, 바로 앞에 무릎 꿇었던 삼별초 군사의 목이 금세 달아났다. 연이어 그의 앞에 무릎 꿇은 자들은 예외 없이 바닥을 피로 적셨다. 마지막으로 그의 앞에 앉은 건, 나였다. 어김없이 칼을 들어 올린 그를 말린 건, 함께 있던 그의 수하들이었다.

“아니, 자네. 이게 어찌된 일인가.”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몰렸다. 딱 그뿐이었다. 삼별초 군사들이 흩어졌던 사방에서 불길이 점점 치솟고 있었다. 군영이 불길에 둘러싸인 건 순식간이었다. 산발적으로 날아든 화살에 고려군은 하나둘씩 쓰러져갔다. 이 와중에 고여림은 쓰러진 막사 뒤로 밀어내더니 몸을 바닥에 숙이라고 소리쳤다. 바로 내 뒤통수를 아슬아슬하게 스친 화살에 생각할 새도 없었다. 바닥에 엎드리고 재빨리 쓰러진 막사 뒤로 이동하였다. 날아드는 화살은 점점 늘어났고 머리 위로도 몇 개 지나가기도 했다. 고려군은 빠르게 전열을 정비하며 화살을 피하려고 했으나, 이미 절반 정도만이 겨우 버티고 있었다. 고여림은 칼로 걷어냈으나 이미 화살 하나가 왼팔을 관통한 상태였다. 불길의 기운이 잦아들려고 할 때, 삼별초는 저들이 했던 것처럼 동시에 몰려들었다. 결국 고려군은 다급하게 물러나기 시작했다. 이때, 고여림이 내 이름을 불렀으나 대답할 수가 없었다. 이미 난 삼별초의 군사들에게 부축을 받고 있었으니.

“다시 정비하라, 지금부터 시작이다.”
이문경이 바닥에 내뱉었다. 삼별초는 다시 군영을 탈환하였는데, 불길과 난전까지 치렀는데
도 내부 상태가 그리 손상되지 않았다. 막사 몇 개만 쓰러졌을 뿐. 그보다 더 입을 다물 수 없었던 건, 이문경과 그의 수하들 대부분이 멀쩡하게 살아남았다는 것. 고여림의 손에 목이 달아난 삼별초 군사들은 알고 보니, 탐라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왜 고려군에 붙잡혔던 건지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이문경이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었다. 게슴츠레하게 위아래로 훑어보는 그 눈빛 말이다.

“당신은 참으로 명줄이 질기군. 하늘이 이리도 돕는단 말이오?”

흘리듯 내뱉은 말이었지만, 그의 목소리에 한껏 힘이 들어갔다. 자신의 막사로 들어가려던 그를 막아 세우고 눈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미세하지만 눈꼬리에 들어간 힘이 예사롭지 않았다. 역시, 이미 눈치챘던 걸까. 그의 손짓에 부하들이 재빠르게 달려왔다. 뒤에서 다가온 두 사람이 양팔을 붙들려고 할 때, 더 이상 머릿속으로 생각할 틈이 없었다. 등골을 타고 정수리까지 오르는 저릿함이 저절로 움직이게 했다. 머리로 이문경의 얼굴부터 들이받고 팔꿈치로 뒤에 붙은 두 사람의 얼굴도 밀어냈다. 갑작스러웠지만 세 사람은 바닥에 쓰러졌다. 주변에 시선이 갑자기 내게 몰리더니 금세 달려들기 시작했다. 코를 부여잡고 일어서려던 이문경을 발로 한 번 더 걷어차고 뛰었다.

“저놈 잡아라!”

순식간이었다. 정예 군사 셋을 쓰러뜨리고 쫓아오는 수십 명을 뒤로 한 채, 도망가는 순간
까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은 어둠 속이었지만 그저 발이 닿는 대로 달리고 또 달렸다. 역풍이 불어서 속도가 나지 않았으나, 한편으로는 화살이 따라붙을 수 없기도 했다. 중무장한 군사들이라 바람에 맞서서 빠르게 따라오지 못 했다. 오히려 군사들의 목소리는 귀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물론 그들의 시야에서는 완전히 벗어날 수 없었고 여전히 뒤쫓기도 했다. 귓가에 조금씩 커져가는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난 왜 이랬을까, 어찌 보면 혼자만의 추측일지도 모를 텐데. 머릿속과 달리 다리는 오히려 더 힘이 들어가고 양팔은 빠르게 휘젓고 있었다. 하늘에 먹구름이 뭉치더니 갑자기 천둥까지 울리는 게 아니던가. 등 뒤까지 쫓아오던 말이 앞발을 들고 크게 울더니 몸부림과 함께 다른 방향으로 틀었다.

 앞으로 달려갈수록 숨이 가빠왔다. 바람도 바람이지만 평지에서 멀어지니 끝없는 오르막의 연속이었다. 발에 돌부리는 계속 걸렸고 땅은 울퉁불퉁하여 중심이 흐트러졌다. 많이 멀어지긴 했으나 나를 따라오는 횃불이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천둥을 서너 번 더 울리던 먹구름에서는 비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이제 난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숨이 넘어가려고 할 때쯤, 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비바람 영향이겠지만 끈질기게 따라오던 횃불은 일단 보이지 않았다. 딱히 호흡을 차분하게 고를 수도 없었다. 나뭇가지와 함께 날아드는 비바람에 이미 얼굴과 팔이 수차례 긁히고 말았다. 온몸에 한기가 돌고 기침까지 났고 두 눈이 급격하게 무거워지려고 했다. 이대로 바닥에 쓰러질 수는 없었다. 이를 부서질 듯 깨물며 몸을 겨우 일으켰다. 감각이 무뎌진 왼발은 질질 끌면서 앞으로 계속 나아갔다. 바람은 멈추지 않았으나 비는 점차 잦아들었다. 어느새 어딘지 모를 숲속에 들어와서 헤매는 꼴이 되고 말았다. 그것도 잠시, 저 멀리 어렴풋하게 불빛이 보였다. 오로지 그곳만 보며 다시 다리에 힘을 쏟아냈다.

 불빛을 따라 도착한 건, 지붕이 반쯤 무너진 민가였다. 주변에 다른 집들은 보이지 않았고, 담장이나 다른 시설들도 없었다. 오로지 딱 그 집 한 채뿐. 문앞까지 몸을 거의 끌다시피 나아갔다. 불빛에 비친 그림자를 보다가 나도 모르게 눈이 감기고 말았다. 이러면 안 되지만, 당장 온몸은 내 말을 듣지 않았다.

 “여보게, 여보게.”

정신을 차려 보니, 눈앞엔 뿌옇지만 사람의 형체가 보였다. 목소리는 제법 굵었지만 힘이 미세하게 나가는 게, 세월의 흔적이 묻어난 듯했다. 눈앞은 쉬이 선명해지지 않았고 콧속에 시큼털털한 냄새가 스며들었다. 약간 퀴퀴하기도 했고. 여기는 어디고 당신은 누구냐고 물었다.

“제 발로 찾아온 자가 할 말은 아니네만. 댁은 뉘시오?”

머릿속에 어지럼증이 가시니, 정신을 잃기 전 보았던 불빛이 떠올랐다. 눈앞에 형체는 여전히 선명해지지 않았지만, 어쩌다가 몸을 피할 신세라는 정도만 밝혔다. 그와 잠시 말을 주고받다가, 머릿속에 번뜩 스치는 게 있었다. 이곳은 탐라가 아니던가, 말투가 여기 사람은 아니었다. 나도 모르게 발길질과 함께 뒤로 물러났다. 양손으로 바닥을 짚었으나 딱히 잡히는 건 없었다. 꺼칠꺼칠한 나무 바닥이라는 것만 알았을 뿐.

“댁도 여기 사람이 아니구려.”

그는 혀를 차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밖으로 나가려는 형체가 보여서 얼른 그의 앞에 기어서 다가갔다. 손을 뻗어서 다리를 붙잡고 외쳤다, 제발 살려달라고. 얼굴도 갖다 대면서 아예 매달렸다. 거의 뼈밖에 잡히지 않는 다리였지만, 그 뼈 자체가 여느 사람들보다 훨씬 더 굵직했다. 내 몸 전체가 끌려다닐만큼 힘도 보통이 아니었다. 팔에 도저히 힘은 더 들어가지 않았으나 목소리라도 더 크게 내질렀다.

“허허, 이것 참! 소피 좀 보고 오겠시다!”

결국 그의 다리를 풀어줬다. 벽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가 뜨기를 반복했다. 대체 어찌 눈에 말썽이 생긴단 말인가. 금방 돌아온 그는 바로 내 앞에 마주 앉았다. 이마와 손목을 손으로 짚어보더니 혀를 끌끌 찼다.

“대체 여기서 뭘 하고 다닌 게요?”

한결 나긋나긋한 말투에 잔뜩 뭉쳤던 어깨가 약간은 힘이 풀렸다. 이곳은 산으로 올라가는 길목이라 하였다. 마을은 따로 있는 건 아니고, 그저 홀로 길을 지킬 뿐이라고 했다. 자신도 이곳 사람이 아니라고 밝혔으나 더 자세한 건 더 이상 밝히지 않았다. 이제 나는 어떻게 되는 거냐고 물었을 때, 그의 대답이 돌아오기도 전에 바깥이 소란스러웠다. 등에 땀이 맺히더니 다리가 떨렸다.

“여기 누구 없소!”

바깥에 한 명이 소리치자, 내 앞에 앉아있던 그가 슬슬 몸을 일으켰다. 난 황급히 몸을 웅크렸다. 헛기침과 함께 바깥으로 나간 그는, 갑자기 소리를 내질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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