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영민 연재 역사장편소설

   
▲ ⓒ뉴스제주

고성은 금세 비명으로 뒤덮었다가 적막이 되어 돌아왔다. 잠시 기다리다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바닥에는 쓰러진 그림자가 둘 있었고, 눈앞은 방금 나와 마주 보았던 그가 서 있었다.

“도대체 여기서 무슨 일이 있는 게요?”

쓰러뜨린 군사들의 머리채를 잡고 담장 안으로 끌어내는 그가 내뱉은 말에 입을 다물지 못 했다. 설마, 몰라서 내게 묻는 걸까? 당장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담벼락에 밀어 넣은 군사들의 얼굴은 핏기가 완전히 사라진 상태였다. 그중 하나는 이미 얼굴에 퍼런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바닥에 널브러진 멍석을 그들 위에 턱 하니 얹어놓으니 일단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멍석 밖으로 삐져나온 발바닥이 계속 거슬렸을 뿐.

“오랜만에 힘을 썼더니, 배가 살살 아프네. 측간에 좀 다녀오겠소.”

뒤도 돌아보지 않고 측간으로 사라져버린 그. 멍석에 깔린 그들은 전혀 움직임이 없었다. 팔다리, 온몸이 칼로 찌른 듯 쑤셨지만 이를 꽉 깨물고 일으켰다. 천천히 그들 앞으로 다가가서 멍석을 살포시 걷어내 보았다. 아이고, 두 사람 모두 눈을 똑바로 떴으나 초점은 없었다. 얼굴은 조금 전보다 더 시퍼렇게 질려있었다.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그와 동시에 숨을 깊게 내뱉을 수 있었다. 이들이 돌아가지 않는다면, 여긴 어떻게 될 것인가.

“보아하니, 이런 거 한두 번 본 게 아니구먼. 아까부터 물었소만, 여기 무슨 일 났소?”

측간에서 돌아온 그는 코를 연신 홀짝거리며 다가왔다. 정작 궁금한 건, 나였다. 탐라 사람도 아닌 이가, 외딴곳에 있단 말인가. 정예 군사를 아주 짧은 시간 간단하게 쓰러뜨린 건 또 무엇이고. 그와 난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갔다.
앉아서 주변을 슬쩍 둘러봤으나 그저 사람 하나 누이는 좁은 공간에, 천장은 낮고 벽은 흙으로 대충 발라서 말려놓은 상태였다. 옷가지도 보이지 않았고 다른 물품들도 전혀 없었다. 바닥에 물을 한 잔 내려놓고 통성명부터 하였다. 예상대로 그는 탐라 사람이 아니었고 개경 인근에서 태어나 오랫동안 살았던 자였다. 그러나 이름은 알려주지 않았다. 머리카락이 희끗했으나 막상 얼굴은 까무스름한 낯빛에 주름이 굵었으나 목소리만큼은 청아했다. 겉모습과 전혀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끝내 이름을 밝히지 않은 그가, 탐라에 내려온 건. 강화에서 한창 몽골과 대치할 때쯤이었다. 고려 전역에서 장정이란 장정은 모조리 색출하여 전장으로 내보내던 시기이기도 했다. 도성보다는 지방에서 강제로 차출된 이들이 제일 앞장섰던 터라, 아예 달아나는 자들도 적지 않았다. 대체로 끝내 붙잡히거나 몽골군에 끌려가서 고려를 향해 창을 들이미는 신세가 되기도 했다. 유구나 왜, 탐라 등등 바다를 건넌 이가 많은 줄 소문으로 익히 들었다. 그중 한 사람을 눈앞에서 만날 줄은 몰랐지만. 그러나 좀 더 얘기를 들어 보니, 꼭 그런 사람 중 하나도 아니었다. 고려군에 소속된 자였다. 부하를 어느 정도 거느린, 부장급 군사였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된 게요. 피를 더 이상 보기 싫어서 여기까지 왔건만.”

그는 잠시 바깥에 나가더니 술병을 들고 돌아왔다. 겉에 흙이 잔뜩 묻은 병이었지만 술은 가득 채운 상태였다. 어디서 가져온 건지, 알려주지 않았고 딱히 물어보지 않았다. 그와 나, 한 모금씩 나눠 마시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도대체 언제까지 통곡이 이어져야 한단 말이오.”

한껏 격앙된 그의 목소리만큼 눈가가 촉촉이 젖어 들었다. 그는, 지금의 탐라가 휘말린 피바람 말고도 그동안 성주가 일삼았던 모든 일들도 제대로 알지 못 했다. 처음 탐라에 발이 닿자마자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이곳까지 며칠을 걷고 또 걸었다고 한다. 완전히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은 아니나, 최소한 그를 간섭하는 이가 없었다. 주인 없는 빈 땅에 흙과 나무로 집을 지었고, 척박한 땅을 일궈 자신이 먹을 만큼만 작물도 재배하며 살아왔던 것. 아주 간간이 성안을 갔다지만 딱히 별문제가 없었다는 게 그의 얘기였다.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얘기해주자, 처음엔 아예 믿지 않는 눈치였다. 여전히 몽골과 대치하거나 또다시 다음 전쟁을 준비하는 줄 알고 있었다. 고려 조정과 삼별초가 분열된 사실에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까지 놀라워했다.

“이게 말이 되오? 조정의 일은 알지 못 하나, 어찌 오랑캐에 무릎을 꿇다니. 어찌 역모를 일삼다니,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소이다!”

술병은 거의 다 비워가고 있었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그는, 갑자기 눈물을 폭포수처럼 쏟아내기 시작했다. 조금 전 자신이 쓰러뜨렸던 고려군은, 나를 위한 게 아니었다. 자신을 쫓으러 온 줄 알았던 것.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다며 눈물로 바닥을 흥건히 적셨다. 난 그에게 남은 술을 마저 권하였다.

“그러니까, 지금 고려군과 삼별초가 곧 전면전을 치른단 말이오?”

그는 술병을 내려놓으며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벌겋게 스친 눈물 자국엔 주름이 깊게 팼다. 재차 내 입으로 확인을 마친 그가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마당으로 나가더니, 멍석부터 걷어내었다. 군사들의 옷을 벗기면서 내게도 손짓했다.

“뭣하시오, 어서 돕지 않고.”

내가 묻고 싶은 말이었다. 지금 무얼 하려는 건지. 벗겨놓은 옷은 곧장 자신이 입었고, 나머지는 머뭇거리던 나를 밀어내고 마저 벗겨냈다. 어느새 그와 나는 고려군으로 변장했고, 옷을 벗겨놓은 자들은 다시 멍석으로 덮어버렸다.

“어서 갑시다!”

기껏 달아났건만, 다시 돌아가고 있다니. 변장까지 하고서 말이다. 그가 하도 빠르게 발을 움직였던 터라, 따라잡는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버거웠다. 바람은 등지고 나아가니, 확실히 움직임이 빨라지긴 했고. 어느새 시야에서 두 진영의 깃발이 보였다. 그와 나는 큰 나무 기둥을 뒤에 서서 상황부터 지켜보기로 했다. 지난 전투 이후 삼별초 진영은 확실히 뒤로 물러나 있었다.

“큰일이군.”

그가 한숨을 깊게 내뱉었다. 양쪽 진영 모두 머릿수는 많았으나, 고려군의 움직임이 너무 잦았다. 이는 전열 자체가 제대로 정비되지 않았다는 점. 김수와 고여림, 왕자까지 있다면 지휘 체계 자체가 엉망일 거라는 게 그의 의견이었다. 선뜻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으나,
조금 더 살펴보니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삼별초 진영은 큰 대열 하나를 중심으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인 반면, 고려군 하천에 내려간 군사들의 엄폐조차도 엉성하였다.
어둠이 서서히 물러날 때쯤, 삼별초 진영의 불이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이를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고려군의 진영을 여전히 어지럽게 뒤섞였고. 몇몇의 이탈자들도 보였다. 가만히 지켜보던 그는, 내 어깨를 두드렸다.

“갑시다, 이러다가 다 죽을 지도 모르오.”

그는 고려군 진영에 들어가서 먼저 일면식이 있는 김수부터 만나겠다고 했다. 자신의 말이라면 분명 들어주리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내 처지를 다시금 설명했으나, 자신과 함께라면 큰일이 없을 것이라며 먼저 앞장섰다.
고려군 진영으로 넘어가려면 하천부터 넘어야 했다. 그러나 상류층으로는 진입로가 마련되지 않은 상태였다. 거의 절벽을 내려가야만 했는데, 이미 내려간 그와 달리 난 위에서 방향만 맞춘 채 따라갔다. 중반쯤 다다르자, 얼른 내려오라고 소리치는 그. 여전히 가파른 절벽 아래로 내려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결국 그가 다시 올라오더니 별다른 말없이 발로 엉덩이를 밀어냈다. 나도 모르게 비명까지 내지르며, 아래로 떨어졌으나 생각보다 그리 아프지 않았다.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니, 내 신장과 높이가 별반 차이가 없었다.

“거참, 사내가 나약해서는!”

그는 발을 점점 더 빠르게 재촉하였고, 난 따라가면서도 선뜻 힘이 나지 않았다. 김수와 고여림, 둘 중 누구라도 마주친다면. 과연 가만히 두겠는가? 정녕 나의 염려는 기우였던 걸까, 고려군 깃발이 가까이 보이자. 하늘 위로 화살이 치솟아 오르기 시작했다.

“멈추시오!”

그의 외침은 허공에서 바람과 함께 흩날렸고. 이미 비명이 공기와 함께 하늘로 치솟기 시작했다. (계속)

   
▲ 소설가 차영민. ⓒ뉴스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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