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영민 연재 역사장편소설

   
▲ ⓒ뉴스제주

화살과 함께 쏟아지는 비명 속에서도 지슬의 얼굴이 제일 먼저 보였다. 나와 여기까지 함께 온 이는 그저 몸을 잘 숨기라는 한마디만 내뱉고 서둘러 고려군 진영으로 달려갔다. 그 역시, 몇 발의 화살이 아슬아슬하게 스쳤으나 금세 고려군 진영 속으로 그림자를 감추었다.

“쏘아라!”
“몬딱 모사불자!”
화살은 불과 함께 하늘을 뒤덮었다. 양쪽 진영에서는 그 아래로 달려들더니 금세 뒤섞였다. 칼로 쓰러뜨린 자가, 화살에 금세 쓰러지고, 다시 일어난 자가, 가까스로 일어나려는 자에게 칼을 내리치는 모습의 반복들. 심지어 아군의 화살에 등을 맞고 쓰러진 자도 적지 않았다. 화살의 출발은 명확했으나 도착은 누구에게 향할지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거의 메말랐던 하천은 쓰러진 자들과 거기서 흘러나온 시뻘건 핏물이 차츰차츰 쌓여만 갔다.

“으악!”

지슬은 난전의 중심에 서 있었다. 양쪽에서 쏟아지는 화살을 가까스로 피하며, 달려드는 적들과 부딪치고 피하고 다시 부딪치기를 수차례. 얼굴과 온몸은 흙과 피투성이가 되었고. 손에 든 칼은 반쯤 부러져서, 날아오는 화살을 걷어내기조차 버거워하였다. 오히려 달려드는 적들의 등이 화살을 막는 좋은 방패막이로 보일 정도였다.

그의 주변에 쓰러지는 자들은 점점 쌓였지만 난 한 발자국도 선뜻 나아가질 못 했다. 손발은 한겨울 바람에 에인 듯 떨렸지만 조금도 움직여지질 않았다. 침은 혀끝에서 메말라서 삼킬 수도 없었고. 눈앞에 펼쳐진 뜨거운 피들은 해가 저물 때까지도 멈추지 않았다.

양쪽 진영 누구도 먼저 퇴각을 명하지 않았다. 대신 화살은 더 이상 하늘을 뒤덮진 않았다. 그 사이 지슬은 팔다리에 화살을 여러 대 맞고 반쯤 쓰러진 상태였건만, 아군이 달려와서 그를 뒤로 물러나게 하였다. 상대편도 지슬에게까지 팔을 뻗지 못 하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양쪽 모두 하나둘씩 달려들었지만, 움직임은 급격하게 둔하였고 바로 코앞에서도 허공으로 칼을 내뻗기도 하였다. 고려군 진영에서 나온 군사 중 하나는 달려 나가다가 갑자기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한참 전에 쓰러진 시체를 붙들더니 큰소리로 울부짖었다. 그마저도 자신의 머리로 날아든 도끼에 멈추고 말았다.

하늘은 달이 올라왔으나 먹구름으로 조금씩 모습을 감추었다. 차가운 기운을 몰고 온 바람은 사방에서 몰아쳤고, 양쪽 진영의 횃불은 점점 힘을 잃어갔다. 그나마 하나둘씩 계속 나오는 군사들의 움직임이 멈췄고, 짙게 내리깔린 어둠처럼 정적이 함께 뒤덮었다.

그제야 난 나무 기둥에 등을 기대었다. 코끝을 살포시 스치는 진한 피비린내에 눈시울이 따끔거렸다. 눈을 비빌수록 더욱더 따끔거렸고 결국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눈을 꾹 감으며 잠시 심호흡하는 동안, 내 곁으로 발소리가 지나쳤다. 얼른 눈을 뜨고 고개를 올리자, 나와 눈동자 여럿이 나와 마주쳤다. 그러나 그들은 딱히 나를 신경 쓰지 않고 그저 가던 길에 충실하였다. 어둠 속에서 어렴풋하게 드러난 옷 색깔로 보아, 삼별초 쪽 사람들이었다. 눈은 괜찮아졌으나 가슴이 답답하게 꽉 막혔고 목덜미까지 조이는 듯했다.

바람은 여전했지만 먹구름이 옅어지자마자 눈앞에 보이는 건, 희미하게 올라온 불길이었다. 고려군 진영 쪽이었는데, 찬찬히 몸을 일으켰다. 불이 올라온 쪽으로 몇 발자국 나아가다가 다시 멈추었다. 바람이 부는 방향에 따라 몸집을 키운 불길, 그 주변으로 수십 개의 그림자가 비쳤는데 그들이었다. 조금 전 내 곁을 조용히 스쳐 지나갔던 삼별초. 솟아오르는 불길에 다시금 비명도 함께 치솟았다. 손발은 여전히 떨렸지만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돌보다 더 자주 밟히는 질퍽한 물체들은 굳이 눈으로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몇몇은 내 발목을 잡아당기는 느낌에 등골이 시릴 정도였다. 불길이 점점 솟아오르는 고려군 진영은 좀처럼 가까워지지 않았다.

하천 바깥으로 나아가면 절벽을 올라야 했는데, 물기로 흥건해서 미끄러웠고 돌부리는 바람에도 쉽게 부서져 내렸다. 조금 더 바다 방향으로 나아갔다. 고려군 진영은 좀 더 멀어졌고 대신 비린내가 섞인 바람이 콧속으로 스며들었다. 내 몸집보다 약간 더 높은 절벽이 눈에 들어왔다. 물기는 적었고 돌부리도 손으로 두드려보니 제법 단단하였다. 주변을 한 번 둘러 보고 벽에 오르려고 할 때, 누군가 발목을 끌어당겼다. 잘못 밟은 게 아니라, 확실히 사람 손이 발목을 붙잡았다.

“이, 이, 이보시오.”

발목처럼 사로잡힌 건 귀도 마찬가지였다. 분명 똑똑히 들었다. 바로 발아래에서 올라온 사람의 목소리를. 전혀 처음 듣는 목소리도 아니었다.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찬찬히 바닥에 주저앉았다. 고개를 슬쩍 돌리자, 발목을 붙잡았던 손이 금세 오른쪽 뺨에 닿았다. 결국 중심을 잃고 축축한 바닥에 몸이 뒤로 넘어가고 말았다. 나도 모르게 살려달라는 말이 터져 나왔고.

“이, 보시오. 나, 나요.”

손을 걷어내고 대신 두 눈에 힘을 주었다. 바로 코앞에 피비린내를 잔뜩 풍기는 낯선 자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바로 그였다. 나와 함께 여기까지 왔던, 그. 
분명 자신이 어떻게든 해보겠다고 나를 두고 홀로 전장에 뛰어들지 않았던가.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되었단 말인지. 물어볼 새가 없었다. 절벽 바로 위로 말발굽 소리가 빠르게 스쳤다. 그와 난 바닥에 얼굴을 댄 채, 잠잠해지기를 기다렸다.

“내, 내가 큰 착각을 했소이다. 그들은 예전에 그들이 아니올시다.”

숨을 거칠게 내뱉으며 한마디씩 내뱉는 그. 내 발목을 붙잡은 손만 빼고 모두 화살이 한둘 씩 깊숙하게 박혀있었다. 스스로 걷기는커녕 일어날 수 있을 상태도 아니었다. 숨소리도 심상찮았고 나와 있는 잠시 동안에도 피를 몇 번이나 토해냈다.

“지, 지금 어, 어딜 가시오.”

그는 고개를 미세하게 흔들었다. 내 발목을 끌어당기더니 왔던 방향으로 밀어내려고 했다. 여기서 갔다가는 자신보다 먼저 저쪽으로 갈 수 있다는 말을 겨우 덧붙이면서. 더 말을 꺼낼 줄 알았으나, 딱 거기까지였다. 한 번 더 말발굽 소리가 스치는 동안, 그의 숨은 서서히 멈추고 말았다. 축 늘어진 팔에서 더 이상 피는 흐르지 않았다. 다만 그의 온몸을 휘감던 피비린내가 더욱 진해졌다.

“거기 누구냐?”

미처 감지 못 한 그의 눈을 손으로 직접 감겨놓고 일어선 순간. 나를 향한 수많은 눈빛과 딱 마주쳤다. 귓가에는 말발굽 소리가 여전히 들렸고. 서넛 정도의 그림자가 말에서 내리더니 눈 깜짝할 사이 내 코앞까지 다가왔다. 몸을 숨기거나 몸부림이라도 칠 새가 없었다. 양팔과 뒷덜미는 금세 그들에게 붙들렸고 더 이상 저항도 포기한 채 조용히 끌려갔다.

“이게 누구신가?”

눈앞엔 치솟는 불길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내 멱살을 꽉 움켜쥐고 위아래로 훑어보며 코웃음조차 아끼지 않은 자의 얼굴도 명확히 보였다. 바로 왕자. 정작 고려군 진영 주변과 내부로는 삼별초 군사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우왕좌왕하며 아직 몸을 피하지 못 한 고려 군사 몇몇은 왕자의 부하들이 달려들자 금세 바닥에 고꾸라졌다. 점점 치솟는 불길은 밤하늘까지 잡아먹을 듯 바람과 함께 격렬하게 흔들렸다. 고려군 진영에 있던 막사는 대부분 재가 되어 바람과 함께 흩날렸고, 곳곳에 쓰러진 고려 군사들이 그대로 불길 속으로 휩쓸렸다.

“이리저리 잘도 숨는 쥐새끼가 바로 네놈이구나.”
멱살을 잡은 손이 뒷덜미로 자리를 옮겼다. 내 몸은 바람 앞에 잡초처럼 힘없이 뒤흔들렸다. 분명 고려군과 왕자 쪽 사람들은 함께 진영을 꾸리지 않았단 말인가. 탐라 군사들은 어찌 삼별초 군복 차림으로 고려군 진영을 잿더미로 만들 수 있다는 건지.

“이번에는 하늘이 네놈을 도와주지 않을 게다.”

왕자는 나를 바닥에 내던졌다. 발로 배를 지그시 밟더니 목에 칼끝을 갖다 붙였다.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는 그의 얼굴 너머로 눈에 들어온 그것. 오히려 웃음이 나는 건, 이제 바로 나였다. (계속)

   
▲ ⓒ뉴스제주
저작권자 © 뉴스제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