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영민 연재 역사장편소설

   
 

어둠을 가르고 솟아오른 불화살이 눈앞에서 재빠르게 떨어졌다. 왕자는 억, 하고 신음을 내뱉더니 무릎이 땅바닥에 붙고 말았다. 손에서 칼을 떨어뜨렸고, 오른쪽 어깨는 아직도 불타오르는 화살이 깊게 박혀 있었다. 그걸 시작으로 검게 물든 하늘은 어느새 불화살로 차츰차츰 뒤덮였다. 왕자 곁을 지키던 수하들은 우왕좌왕하다가 몇몇이 눈 깜짝할 사이에 쓰러졌다.

“기습, 기습이다!”

왕자를 비롯한 주변에 있던 모든 이의 시선은 불화살로 향하였다. 내 옆으로 몇 발의 화살이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왕자와 수하들은 서둘러 전열을 가다듬었으나, 계속해서 날아드는 불화살에 좀처럼 자리를 못 잡았다. 각자 피하거나 막거나 그대로 맞고 쓰러지기에 바빴다. 왕자는 수하들을 방패 삼아 엎드린 채, 이를 꽉 깨물고 있었다.

그사이 나는 엉덩이를 살짝 들고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그들의 대열이 완전히 깨지고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질 때, 난 허리를 바짝 숙인 채 살짝 일어나서 그곳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어깨와 다리는 감각이 무뎠고 뼈마디가 쑤시는 터라, 몸을 온전하게 일으킬 수 없었다. 결국 돌부리에 바닥을 뒹굴고 말았다.

서둘러 다시 일어나려다가 여의치 않아서 네 발로 기어서 조금씩 벗어났다. 그리 멀리 달아나진 못 하고 큰 바위 뒤로 몸을 숨기는 게 당장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왕자와 그의 수하들 중 누구도 내 쪽으로 시선을 돌린 자가 없었다.

“쳐라!”

함성과 함께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과 함께 등장한 이들은 고려군이었다. 고여림이 직접 앞장섰고 수하들은 화살과 창을 던지며 뒤따라왓다. 그러나 군사들의 수가 두 눈으로 다 헤아릴 만큼 얼마 되지 않았다. 그들이 쏘는 화살은 왕자 쪽 사람들을 몇몇 더 쓰러뜨렸지만 그 이상 위력은 못 발휘했다. 어느새 진영 가운데 횃불 하나를 놓고 고여림과 왕자가 마주 섰다.

“네놈이, 결국, 나라를, 팔았구나.”

고여림이 한마디 내뱉을 때마다 피가 섞인 기침이 튀어나왔다. 왕자는 땅바닥에 내리꽂은 칼로 몸을 지탱하며 일어섰다. 어깨에 박힌 화살은 반쯤 부러뜨려놓기만 할 뿐이었다. 고여림과 왕자,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보고 서 있었다.

“언제 우리를 한 나라 사람이라 여겼느냐?”“역당 주제에 말이 많구나!”

“너희 고려는 항상 우리를 못 괴롭혀서 안달이지 않느냐?”“전하가 베푸신 은혜를 잊은 게냐?”

“전하가 베푼 은혜는, 고작 네놈들 뒤처리뿐이었더냐.”

“네 이놈!”

두 사람은 전혀 목소리를 낮추지 않았다. 수하들까지 합세하여 서로 욕지거리를 주고받았다. 그러나 이들을 목소리를 잠재운 건, 전혀 다른 방향에서 날아든 불화살이었다. 조금 전 보았던 것처럼 검게 물든 하늘은 불화살로 뒤덮었다.

그들은 갑자기 하나의 대열을 맞춰서 방어 태세로 전환하였다. 그러나 날아드는 화살에 비해 그들은 숫자가 적었다. 한두 명씩 쓰러지더니, 금세 대열은 무너지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아주 큰 진동을 일으키며 등장한 이들은 바로 삼별초였다.

“한 놈도 살리지 마라!”

그 선봉에는 이문경이 있었다. 그러나 주변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지슬의 모습은 없었다. 대신 지슬과 함께 했던 자들은 몇몇 보였고, 누구보다 앞장서서 고려군에게 돌격하였다. 정작 당황한 건, 왕자 쪽이었다. 달려드는 삼별초에 선뜻 반격도 못 한 채, 뒤로 물러나기만 하던 그들.

“왜, 왜들 이러시오!”

왕자의 외침이 하늘 위로 솟구치더니 힘없이 찢어졌다. 칼이 부딪치는 소리보다 비명이 더 진한, 삼별초의 기습. 그리 오래 되지 않아 그 주변은 소리가 잠잠해졌다. 곧이어 하늘을 뒤덮는 건, 삼별초 군사들의 우렁찬 함성이었다. 고려군 진영에는 삼별초 깃발이 올라갔고 횃불이 곳곳에 놓였다.

난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 걸었다. 악취는 더욱더 진하게 내 콧속을 스며들었고. 왼쪽 어깨는 축 늘어져서 좀처럼 말을 듣질 않았다. 하늘은 먹구름으로 뒤덮여 사방이 온통 어두컴컴했고, 질펀한 바닥은 발을 계속 끌어당겼다. 이젠 정말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어둠을 헤치고 지난한 걸음 끝에 다다른 곳은 그의 집이었다. 숨이 멎을 때까지 끝내 자신의 이름조차 제대로 밝히지 않았던. 호기롭게 전장에 뛰어들었다가 마지막 인사를 나눴던. 이젠 수많은 그저 하나의 시체로만 땅에 스며들고 바람에 날릴 그.

집도 주인과 운명이 닮은 걸까, 어둠이 서서히 물러나면서 드러난 형체에 나도 모르게 멈칫하고 말았다. 지붕은 바람에 날아가고 오른쪽 끄트머리가 와르르 무너진 상태였다. 흙벽도 사방 곳곳에 부서졌고 온통 금이 쩍쩍 갈라져 있었다. 이보다 나를 더 놀라게 한 건, 인기척이었다.

가래 끓는 걸걸한 기침 소리가 연달아 터져 나왔다. 난 잠시 멈춘 상태에서 몸을 숙이고 바닥에 널브러진 뾰족한 돌멩이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 자세를 유지한 채 집 앞까지 다가가며 발소리를 죽였다. 낯선 그림자가 눈에 들어오자, 나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누게꽈?”

눈앞에서 사라진 그림자는 어느새 등 뒤로 다가와 있었다. 뒤돌아보지 않아도 목소리만으로 알 수 있었다. 바로 그, 지슬이었다. 고개를 돌려 눈이 마주치자, 놀란 건 오히려 그였다.

“아, 아니 어떵 이디까지…….”

오히려 내가 묻고 싶은 말이었다. 도대체 어찌 여기에 있느냐고. 얼굴에는 붉은 칼자국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깊게 나 있었다. 온몸은 시커먼 재로 가득했고, 왼손은 축 늘어뜨린 채 마음껏 움직이지 못 했다. 그와 함께 집 안으로 들어섰다.

갈라진 벽보다 눈에 먼저 들어오는 건, 짙은 핏자국들이었다. 바닥은 군데군데 시커멓게 그을린 자국이 선명했다. 함께 있던 사람들은 어디로 갔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그는 벽에 기대어 앉더니 잠시 침묵을 지켰다.

“아맹 영 허도 경 되실 줄은 몰라신디.”

햇볕이 방에 서서히 들어설 때쯤, 그는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그들의 목표가 바로 이곳이었다는 얘기에 내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무슨 얘기인가 하니, 지슬의 별동대는 선봉에 나섰다가, 진짜 목표를 향해 따로 빠지는 것.

그중 하나가 이곳의 거처하는 자였다고. 고려군을 무너뜨리더라도 이 자 때문에 언제든 다시 살아날 수 있다던데. 정작 지슬이 여기서 맞닥뜨린 건 고려군이었다. 그것도 김수의 부장이 직접 이끄는 별동대였다. 자리를 선점하고 기다리고 있던 그들에게 지슬의 별동대는 금방 무너지고 말았다.

그러나 사방에 핏자국만 가득할 뿐, 주변에 시체는 단 하나도 없었다. 이건 어찌된 일이냐고 물었더니, 지슬은 고개를 내저었다. 함께 있던 자들이 지슬만 홀로 두고 퇴각해버린 것.

고려군은 그들을 뒤쫓았고 그사이 지슬은 다른 곳에 숨었다가, 발각되어 죽을 뻔 했으나 지붕이 무너지면서 겨우 살아난 것. 지붕에서 떨어진 흙과 돌을 맞은 군사는 먼저 빠져나갔고 지슬은 그걸 굳이 쫓아가지 않았다. 왼쪽 어깨도 그렇거니와 허리에도 칼로 베인 자국이 선명했고 아직도 피가 조금씩 흐르고 있었다.

“더는 힘들 거 닮은디.”

지슬은 허리를 붙잡으며 숨을 힘겹게 내뱉었다. 그동안 몇 차례 함께 생사를 넘나들었지만, 이번만큼은 그의 상태가 너무 안 좋아보였다. 이대로 놔둘 수도 없는 노릇, 윗옷을 벗어 그의 허리를 감쌌다.

“이젠 안 될 거우다. 혼저 피합써, 이디도 어떵 될지 모르난.”

그가 내 팔목을 살포시 잡았다. 난 고개를 내저었다. 먼저 허리를 곧게 펴 보았다. 나도 모르게 이를 꽉 깨물었다가 다시 몸을 풀었다. 여전히 뼈마디 구석구석이 쑤셨지만 양팔에 감각은 어느 정도 돌아왔다. 허리도 이를 꽉 물면 곧게 펼 수 있었다.

지슬을 일으켰고, 먼저 바깥으로 이끌었다. 그는 다리만큼은 힘이 아직 있어서 곧잘 따라왔다. 옆에서 계속 자신을 놔두고 가라고 했지만,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갔다. 그것도 잠시.

내리막을 따라 걷다가 하천이 눈앞에 보일 때쯤, 우리에게 달려오는 자들이 있었다. 당장 주변에 피할 곳도 보이지 않았고,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들은 우리 코앞까지 다가왔다.

“네놈들이!”

그중 한 명이 우리를 향해 소리쳤다. 그는 바로 고려군, 김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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