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영민 역사장편소설

   
▲ ⓒ뉴스제주

어둠 속에서도 빛을 머금은 칼이 내 목으로 다가왔다. 그러니 끄트머리가 부러진 칼과 바람에 흔들리는 김수의 팔이 눈에 먼저 들어왔다. 지슬은 왼쪽 무릎을 땅바닥에 대고 기침만 연신 내뱉었다.

“용케 살아있었구나. 패악한 것들!”
김수의 목소리는 굵직했지만 아주 옅은 바람에 금세 사라졌다. 내 목에 바짝 붙이려던 칼끝마저도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이미 그의 곁을 지키던 두 사람은 바닥에 주저앉아 숨만 겨우 내쉬었다. 어느새 내 무릎 아래로 김수의 머리가 붙어 있었다. 칼을 쥐었던 손은 바닥에 축 늘어졌다. 등은 화살이 깊게 박혀있었고 어깨는 검붉은 피가 조금씩 흘러내렸다.

“하아, 내 기필코 네놈들을 잊지 않겠다.”

쓰러진 몸과 달리 목소리는 여전히 힘이 실려 있었다. 그가 쥐였던 칼은 어느새 지슬이 들고 있었다. 김수는 나와 지슬을 번갈아가며 살펴보더니 목덜미를 드러냈다. 그 사이 김수와 곁에 있던 자들은 이미 바닥에 얼굴을 파묻고 숨소리조차 내뱉지 않았다.

“더 이상 나를 욕보이지 마라.”

지슬이 내리친 칼에 김수는 내 발밑에 머리를 파묻었다. 주변 공기는 싸늘히 식어갔고 지슬은 나를 슬쩍 쳐다보더니 칼에서 손을 뗐다. 바닥에 주저앉으려던 그를 다시 일으키려고 할 때, 말발굽 소리가 진동을 일으켰다. 저 멀리서 서서히 드러난 그림자는 금세 우리 앞으로 다가왔다. 우리에게 먼저 창과 칼을 겨눈 이들은 바로 삼별초였다.

“네놈들은 누구냐!”

그들이 자신들의 군영까지 안내했다. 물론 두 팔을 꽉 묶은 채였지만. 기름내와 피비린내가 묘하게 섞여 묵직하게 이 공간을 뒤덮였다. 주변엔 시체들은 없었으나 곳곳에 핏자국이 여전히 선명했다. 우리처럼 줄에 묶인 고려 군사들은 모두 피와 땀, 눈물. 그리고 자신들도 못 알아차린 어두운 그림자가 얼굴을 뒤덮었다. 한 명씩 삼별초 군사들에게 끌려갈 때마다 남은 자들은 고개를 푹 숙이기에 바빴다. 그들 곁에 우리도 한 자리씩 차지하고 무릎을 꿇었다. 삼별초 군사들은 한 명 내지 두 명씩 군영 안쪽으로 끌고 들어갔다. 그곳에는 비명 하나 없이 오히려 거기서부터 풍겨 나온 적막감의 농도가 짙어졌다. 어느새 우리 주변에 다섯 정도가 더 남아있었다. 그중 한 사람은 온몸을 떨며 바짓가랑이가 푹 적셨고, 또 다른 한 사람은 연신 어머니를 부르며 눈물만 하염없이 쏟아냈다.
“일어나라!”

삼별초 군사들의 그림자가 딱 우리 앞에 멈춰 섰다. 양팔은 그들의 손에 붙들렸고, 두 발등으로 바닥을 긁었다. 군영 안에 들어서자, 사방은 조금 전까지 함께 있던 자들의 주검이 식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날이 뭉뚝한 도끼를 든 군사가 나와 지슬을 한 번씩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 곁에 서 있던 비쩍 바른 군사가 앞으로 오더니 내 얼굴부터 유심히 살펴보았다.

“아니, 네놈은!”

그는 바로 나와 지슬을 알아보았다. 팔에 묶인 줄을 풀어주기는커녕 오히려 자신들의 무기부터 하나같이 들이밀었다. 그중 하나가 “장군!”하고 소리치자, 높게 친 천막 너머에서 낯익은 그림자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다름 아닌 이문경이었다. 얼굴에 핏자국을 선명하게 드러낸 그는, 나를 보자마자 눈부터 부라렸다.

“허허, 이게 누구신가?”

그의 손이 내 턱을 들어올렸다.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는 입가엔 피비린내가 진하게 퍼져 나왔다. 도끼를 들고 있던 군사는 더 말할 것도 없이 당장 찍어버리자고 했으나, 이문경이 손을 내저었다. 대신 다른 손으로 뽑은 칼을 지슬의 목에 갖다 붙였다.

“내 앞에 얼굴을 들이밀 자신이 있었더냐?”

코웃음을 내뱉는 그에게 지슬은 그저 마른 침만 꼴깍 삼키며, 침묵으로 주변의 공기를 무겁게 끌어내렸다. 동시에 자신도 바닥으로 얼굴을 파묻어야 했다. 발로 지슬의 볼을 짓이긴 이문경은 수하에게 도끼를 건네받았다. 움직이려고 했으나, 이미 내 팔은 다른 군사들의 손에 꽉 붙들린 상태였다.

“함께 있던 놈들은 어디 있느냐, 오랑캐 놈들과 내통한 것이더냐!”

흙과 돌에 얼굴이 파묻혀도 지슬은 여전히 어떤 말도 내뱉지 않았다. 보다못한 내가 무슨 헛소리냐고, 소리쳤다. 미쳐도 곱게 미치라는 말도 굳이 보탰다. 금세 내게로 향하는 주변의 시선에 어서 입을 꾹 다물었지만. 이문경은 눈을 크게 뜨더니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침을 바닥에 내뱉으며 손짓하고 뒤돌아섰다. 군사들이 다시 나와 지슬을 일으켜서 다시 무릎부터 꿇리더니, 도끼를 든 자가 앞으로 다가왔다.

“소리 없이, 잘 가거라.”
도끼가 달빛을 머금고 먼저 내 정수리로 떨어지려고 할 때, 저 멀리서부터 희미하게 깃발이 나부끼는 모습이 보였다. 점점 땅을 울리던 말발굽 소리는 바로 코앞까지 다가와서 멈추었다. 말에서 내린 군사는 숨을 헐떡거리며 이문경 앞으로 다가갔다. 그의 거친 호흡보다 더 눈길을 끈 건, 손에 든 사람의 머리였다.

“장군, 적장의 머리를 가져왔사옵니다!”
“뭣이?”

미간에 굵은 주름으로 가득한 이문경의 눈이 동그래졌다. 직접 건네받더니 한참을 말없이 쳐보다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어찌된 일이냐고 물었더니, 그 군사는 주변을 살피다가 숨어있던 김수와 격렬한 전투 끝에 쓰러뜨렸다고 했다. 지슬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지만 내가 눈을 크게 뜬 건, 군사의 거짓말 때문이 아니었다. 얼굴을 시뻘겋게 붉히며 거침없이 발길질로 배를 걷어찬 이문경, 그의 행동 자체가 의아했다. 군사가 다시 몸을 일으킬 새도 없이 그는 발길질로 배를 연신 걷어찼고, 이를 곁에서 지켜보던 다른 군사들이 온몸으로 말리고 나서야 차분해졌다. 군사는 피가 섞인 기침을 내뱉으면서 억울하다고 소리쳤다. 이문경은 칼집에 잠시 손을 붙였다가, 들고 있던 머리를 바닥으로 내던졌다.

“네놈 눈으로 똑똑히 보아라. 계속 그리 고할 것인지!”

김수의 목에 칼자국이 두 개가 있었는데, 그 방향이 서로 다른 건 물론이고 모양도 확연히 달랐다. 그러나 군사는 잠시 살펴보는 척하더니 다시 억울하다는 말을 내뱉었다. 그건, 그가 숨 쉴 동안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되고 말았다. 얼굴에 튄 피를 닦던 이문경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른 군사들은 모두 시선을 땅바닥으로 돌리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와 눈을 똑바로 마주친 건, 오로지 나뿐이었다.
“난 누구보다 뛰어나고 싶은 그대들의 욕심을 좋아한다. 누구보다 맹렬하며, 누구보다 강인한 그대들의 뜨거운 심장을 좋아한다. 그러나 눈앞에 결과물이 어떻든 욕망은 허용할 수 없다. 어찌 거짓으로 희롱하는 자, 결국 우리를 위태롭게 할 것이다. 다신 내게 하찮은 욕망을 드러내지 말거라. 이건, 대장군의 뜻이기도 하다.”
이문경은 말을 끝내자마자 자신의 막사로 들어갔다. 그와 동시와 도끼를 들고 뒤에 서 있던 군사는 옆으로 물러났고. 우리를 묶었던 줄은 그들의 손으로 돌아갔다. 이문경의 막사에서 나온 군사가 다가오더니 먼저 헛기침을 슬쩍 하더니 그늘진 나무 아래로 이끌었다.

“장군께서 약간의 오해가 있었다 하오.”

이문경은 그동안 나와 지슬을 행적을 더 이상 묻지 않겠다며, 지금부터 할 일이 많으니 함께 도우라고 했다. 특히 내게는 직접 얼굴을 보기가 민망하여 수하에게 대신 전하게 점은, 너그러이 이해해주길 바란다고 했다.

“그리고 별동대에 합류했던 자들은 하나둘씩, 돌아오고 있다는 보고도 방금 올라왔소이다. 지금부터는 별동대는 해산하고, 뒷정리에 힘을 보태주시오.”

지슬은 여전히 몸도 제대로 못 일으키는 터라, 의원에게 갔고. 난 다른 군사들과 함께 전장의 흔적을 정리하였다. 나도 몸이 성치 않다고 말했으나, 누구도 깊이 들어주지 않았다. 그저 싸늘하게 식어서 퀴퀴한 냄새까지 강하게 풍기는, 송장들을 치우느라 분주했다.
금세 노을이 두 번 저물었고 세 번째 동이 트는 모습에 잠시 눈을 붙였다. 다시 눈을 떴을 때도 여전히 사람들은 똑같은 일에 바빴지만. 그들의 작업이 갑자기 멈춘 건, 저 멀리서 낯익은 깃발을 나부끼며 다가오는 큰 배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막사 안에서 며칠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이문경도 바깥으로 얼른 나오더니, 바다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대장군이시다!”

가장 바다와 가까이 서 있던 군사가 소리치자, 나머지는 잠시 서로 눈짓만 하더니 함께 함성을 내질렀다. 대장군, 대장군, 대장군, 과연 누구를 말하는 건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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