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영민 역사장편소설

   
 

이문경은 포구에 서서 두 손을 번쩍 들었다. 그 곁을 지키고 있던 군사들이 합세하였다. 이내 군영 곳곳에 있던 다른 군사들도 하나둘씩 이문경을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모두 두 손을 힘껏 올린 채, 점점 가까워지는 배를 향해 서 있었다.

돛의 맨 위에 달린 깃발은 검은색 바탕이지만 붉게 물든 새 그림이 가운데를 떡하니 차지하였다. 이문경과 군사들의 시선은 모두 깃발 속 새 문양을 향하였다. 조정의 것과 비슷하지만 크기와 색깔부터 다른 저 깃발. 정녕 여기까지 삼별초의 수장이 벌써 내려왔단 말인가.

그들의 수장이라면 대장군 배중손 아니던가. 이미 진도 용장산성에서 자신들만의 나라를 선포한 그들. 이문경은 배에서 한 명씩 내리는 군사들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대, 대장군 만세!”

도대체 이문경은 얼마나 급하게 움직였기에, 그가 묵고 있던 막사 앞에 단검이 하나 떨어져 있었다. 그 곁으로 여럿이 지나쳤지만 누구도 그걸 발견하지 못 했다. 결국 뒤춤에 살포시 담아두고 그들과 함께 일단 두 손부터 번쩍 들었다. 대신 입은 굳게 다 물고.

“만세, 만세!”

함성이 커질수록 뱃머리는 눈앞에 점점 가까워졌다. 정박한 배 아래로 이문경이 제일 먼저 달려가 무릎부터 꿇었다. 나머지 군사들도 모두 땅바닥에 한쪽 무릎을 붙였다. 삼별초 군사들은 모두 움직임이 빨랐지만, 탐라 사람들은 잠시 눈치만 살펴보다가 이내 동참하였다.

나도 그들 중 하나였고, 잠시 곁에 있던 삼별초 군사들의 따가운 시선을 모았다. 그러나 그들의 시선이 돌아간 건, 배에서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 사내였다.

체구가 다른 군사들보다 머리 하나 정도 더 컸으나, 어깨가 다소 좁은 편이었다. 투구 아래로 드러난 얼굴은 콧날이 오뚝했고 턱은 날카로웠으며 짙은 눈매가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생김새는 이문경보다 한참은 어려 보였다. 장군의 갑옷을 갖춰 입었으나 그를 호위하는 군사들보다 엉성하게 갖춰 입은 모습이었다.

이문경은 서서히 바닥에서 무릎을 떼고 내려오는 그와 마주보았다. 나머지 군사들도 마찬가지로 하나둘 무릎을 탁탁 털고 일어섰다. 아직도 무릎을 떼지 않은 탐라 사람들에게 어서 일어나라는 고성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배는 포구를 뒤덮을 만큼 거대했지만 정작 내린 사람들은 수십도 되지 않았다. 젊은 사내와 함께 있던 군사들의 얼굴은 어두운 빛으로 뒤덮여 있었다. 눈빛이 탁했으며, 그중 몇몇은 한숨만 연달아 내뱉을 뿐이었다. 젊은 사내 역시, 오른쪽 다리를 살짝 절뚝거리며 땅에 발을 딛다가 넘어질 뻔했다. 이문경이 재빨리 손을 내밀어 그의 어깨를 붙잡고 일으켜 세웠다.

“대장군은 아직 안 나왔소이까?”

“우리가 전부이외다.”

젊은 사내는 어깨에 얹힌 손을 슬며시 걷어냈다. 뒷짐을 진 채 주변부터 살펴보았다. 이문경의 낯빛은 어두워졌고 턱에 힘이 잔뜩 실렸다. 허리춤에 찬 칼을 살짝 만지작거렸으나 이내 표정부터 풀고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무슨 말씀이오, 일행이 더 없다니?”“당신은 눈을 어따 달고 다니는 게요? 아님 귀가 막혔소이까!”

젊은 사내는 얼굴과 목까지 시뻘겋게 붉혔고, 이문경의 어깨를 치고 몇 걸음 앞으로 더 나아갔다. 그러자 이문경의 곁을 지키던 군사들이 달려와서는 앞을 가로막았다. 배에서 내린 군사들은 아예 칼을 뽑아서 겨누기까지 했다.

탐라 사람들은 눈치를 살피면서 각자 뒤로 물러났고, 난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지켜보고 있었다. 이문경은 헛웃음과 함께 젊은 사내의 어깨를 잡아당기며 눈에 불을 일으켰다.

“지금 뭐하자는 게요?”

“감히 나를 능멸하는 거요?”

오히려 목소리에 날을 바짝 세운 건, 젊은 사내였다. 보이지 않으나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다른 군사들의 시선을 끌어당겼다. 이문경은 마른침을 억지로 삼키더니 살짝 한 발자국 물러났다. 젊은 사내는 자신의 칼을 뽑더니 바닥에 내리꽂더니, 그 손으로 이문경의 어깨를 세차게 밀어냈다. 여전히 가로 막는 군사들에게는 뺨을 한 대씩 휘갈겼다.

이를 지켜보던 탐라 사람들은 하나둘씩 귓속말을 주고받더니 금세 주변이 술렁였다. 삼별초 군사들은 더 이상 사내의 앞을 막아서지 않았다. 힘없이 뒤로 넘어진 이문경은 사내가 꽂아 둔 칼을 뽑으려고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두 손을 사용해도 발로 걷어차도 칼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몇 발자국 더 나아가서 군영을 살펴보던 사내는 다시 이문경 앞으로 돌아왔다. 태연하게 한 손으로 자신의 꽂아둔 칼을 뽑아들었다. 칼끝은 금세 이문경의 코끝에 아슬아슬하게 닿은 상태였다.

“전쟁은 세월로 하는 게 아니외다. 이게 뭐요, 시간과 군사들만 허비하고.”

“대장군은 어디 갔느냐고 분명 물었다. 어찌 새파랗게 어린놈이 나를 희롱하는 게냐?”얼굴에 이미 땀으로 흠뻑 젖은 이문경은 이를 꽉 깨물었다. 눈동자는 더욱 붉게 타올랐으나 다리를 심하게 떨고 있었다. 코웃음을 크게 한 번 내뱉은 사내는 다시 눈에 힘부터 실었다. 칼끝은 어느새 이문경의 왼쪽 가슴팍으로 향한 상태였다.“저 깃발은, 대장군이 친히 내게 물려주신 것이외다. 알겠소?”

그의 곁에 가장 가까이 있던 군사가 문서를 꺼내 펼쳐 들었다. 여전히 시선을 모으는 가운데 큰소리로 읽어내려 간 내용은 이러했다. 현재 진도 사정은 당장 다음날 새벽에라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이고, 언제든 자신을 대신 할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명시해두었다. 만약 여몽연합군에 자신이 잘못 되더라도 곧장 직무를 이어받아 삼별초의 안정부터 도모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설마!”

이문경은 더 이상 어떤 말도 선뜻 내뱉지 못 했다. 문서상 내용에 이어 사내가 부연 설명한 건, 진도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니. 배에 올라탄 순간부터 대장군으로 직책을 이어받은 상태다. 저 깃발 역시 자신을 뜻하는 것이니, 지금이라도 예를 똑바로 갖추라고 다시 한 번 강조하였다. 이문경은 문서를 빼앗듯 가져와 두 손에 들고 한참 살펴보더니, 결국 무릎을 바닥으로 갖다 붙이고 말았다.

“무례함을 부디 용서하시옵소서.”

그제야 사내부터 모든 군사가 꺼내들었던 칼을 거두었다. 앞장서서 군영으로 향한 그는, 군사들을 모두 모이라고 명하였다. 군영 한가운데 자리를 잡은 주변부터 다시 살펴보더니 허리에 손을 얹었다.

“지금 반역 세력이 오랑캐와 손을 잡으니, 나라가 사라질 운명에 처했소이다. 용장산성에서 결국 폐하와 대장군이 돌아가셨소이다.”

아직 말이 끝나지 않았지만 삼별초 군사들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것도 잠시, 젊은 사내는 칼자루를 바닥에 내리치며 시선을 다시 모았다.

“난 폐하와 대장군의 유지를 받들어 끝까지 맞서 싸우고자 하오. 탐라는 반역 세력이 모두 진압되었다고 하니, 이제부터 시작이외다. 우리 힘을 모아봅시다!”

그는 목에 굵은 핏줄까지 세웠지만 군사들은 모두 눈치만 살필 뿐 계속 술렁이기만 했다. 탐라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러다 우리 모두 몰살당하는 거 아니냐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이때 이문경이 사내의 바로 앞에 자리를 잡았다. 칼을 높이 치들더니 바닥에 바로 내리꽂았다.

“겁낼 것 없다. 우리는 이젠 선택할 생각조차 없다. 이젠 이 땅에서부터 오랑캐와 반역 세력을 몰아낼 준비를 더욱더 단단히 해야 할 것이다. 대장군, 만세!”

이문경이 두 팔을 높이 들었다. 그의 곁을 지키던 군사도 함께 들더니, 삼별초 군사들 역시 하나둘 팔을 들었다. 함성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이문경이 목청을 더 크게 높였다.

“나는 여러분과 끝까지 함께 할 김통정 대장군이올시다!”젊은 사내도 역시 칼자루를 머리 위로 들더니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김통정, 과연 그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란 말인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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