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영민 역사장편소설

   
▲ ⓒ뉴스제주

그의 허리를 지키는 칼에 난 더 이상 침묵을 지킬 수 없었다. 고려군과 그에 동조한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 있었다. 대부분 투항과 동시에 전향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중 고여림과 김수의 수족 같은 몇몇은 끝까지 버티다가 결국 목이 날아가고 말았다.

“어찌할 것이냐?

내 손등을 꽉 붙잡은 김통정의 손아귀에 힘이 한껏 실렸다. 옆에서 내려다보는 이문경의 눈에도 힘이 실렸다. 두 사람의 기운에 숨이 턱턱 막혀왔고 내겐 다른 선택은 없었다. 막사 바깥에 줄지어 서 있는 그림자들이 내 고갯짓으로 생사를 결정짓는 게 아니던가.

“쉬운 결정이 아닐 터, 예우는 확실히 하겠네.”

김통정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고 바깥에서 군사들이 의복을 챙겨왔다. 한동안 입지 못 했던 멀끔한 옷이었다. 분명 여기로 나를 이끌고 올 때까지만 해도 발길질과 욕지거리도 아끼지 않았던, 군사들이 깍듯하게 예를 갖췄다.
막사 바깥으로 나가니, 투항했던 자들이 모두 삼별초 군복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그들도 나를 보자마자 머리부터 숙였다. 이문경이 옆에서 넌지시 일컫기를, 개경의 고위 관료가 삼별초와 뜻을 함께하기도 했다고 군사들에게 알린 것. 졸지에 난 그 개경의 고위 관료가 된 셈이었다. 김통정, 이문경 그다음으로 예우를 갖추라고 전 군사에게 명을 내린 상태였다. 전향한 군사들은 개경의 정예 군사로서 구국을 위해 뒤늦게 합류한 것으로 얘기가 퍼졌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성안 탐라사람들에게는 김통정은 조정이 직접 이곳을 보호하려고 보낸 대장군이자 새로운 성주로 소개되었다.

탐라사람들끼리 나누는 얘기를 슬쩍 들어보니, 그동안 외부 사람이 단 한 번도 성주의 자리에 앉아본 적이 없었다고 했지만. 그들끼리 속삭이듯 나눴을 뿐, 딱히 널리 얘기를 퍼뜨리진 못 했다. 성주청은 금세 김통정과 그 수하들이 완전히 장악해서 자리를 잡아갔다. 이문경과 그 군사들은 성주청 외부와 성안 곳곳에 주둔하여 백성들의 동태를 직접 살피었다. 
난 성주청 안에 아주 작은 공간을 배정받아 침소 겸 일도 병행했다. 단지 예우만 깍듯할 뿐, 김통정이 직접 내게 어떠한 직책을 내리겠다는 말은 전혀 없었다. 성주청 안에서 마주치는 군사들도 모두 특별한 호칭 없이 예만 형식적으로 갖출 뿐이었다.

이 와중에 지슬은 어디로 간 건지. 도대체 그는 어디로 갔다가 언제 나타날지 모를 인물이었단 말인가? 그 전투에서 도망쳐서 숨은 고려군들은 하루에 몇 명씩 성주청 안으로 끌려왔지만, 지슬과 닮은 자는 단 한 명도 보이질 않았다. 도망치다가 잡힌 자들은 고려군이든 그에 동조한 탐라 사람이든 모두 자세한 이유를 묻질 않고 처형시키고 말았다.
간혹 아이와 늙은 노모가 직접 성주청 앞까지 찾아와서 자신의 남편 혹은 아들을 살려달라고 애원한 적은 있었으나. 끝내 김통정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무릎 꿇고 머리까지 바닥에 붙이며 빌고 또 빌어도 칼은 그들의 목을 어김없이 내리쳤다.
성주청 앞을 지키던 몇몇 가족들도 얼마 시간이 지나자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 며칠이 더 지나자 성주청 안팎으로는 점점 조용함이 깃들었다. 심지어 김통정은 군복까지 벗고 평상복으로 군사들에게 보고를 받기까지도 했다.

“궁금하지 않소?”

성주청 앞마당에서 훈련 중인 군사들 앞을 지나치던 중 김통정과 맞닥뜨렸다. 곁을 지키던 수하들은 뒤로 물리고 내 앞에 바짝 다가왔다. 도대체 어떤 게 궁금하지 않느냐고 묻는 건지. 뒷짐을 진 채 나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에 그저 말없이 쳐다보기만 하였다.

“이 땅을 밟은 날부터, 이상한 꿈을 꾸고 있소. 들어보겠소이까?”

난 별 대답 없이 가만히 서 있었지만, 그는 얘기를 굳이 이어나갔다. 거친 파도가 출렁이는 바다를 두 발로 걸어가다가 그들이 세운 왕, 승화후와 만났다는 것. 앞으로 나라의 운명을 부탁한다며 두 손에 뭔가를 쥐여 주었다는데. 그게 바로 옥새였다고 한다. 내가 알기로는 고려에 옥새는 단 하나. 그것도 개경에 있을 터, 저들이 과연 옥새를 가지고 있을까? 의문이 들려고 할 때, 그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갔다.
그 옥새는 승화후가 직접 개경에 가서 챙겨왔고, 그걸 김통정이 받았다는 건데. 거기다가 자신의 극진히 모시던 배중손 장군이 갑자기 바닥에 엎드려 예를 갖췄다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그에게 승화후와 배중손은 이제 끝까지 살아남아 나라를 구해달라고 부탁한 뒤 사라졌다고 한다. 이런 꿈을 한 번도 아닌, 탐라에 발을 닿은 그 날부터 한 치의 틀림없이 매일 꾸며 밤까지도 지새웠다는데.

“그래서 어찌 생각하는지, 꿈을 풀어낼 수 있겠소이까?”

오히려 내가 묻고 싶은 말이었건만 그의 입에서 먼저 나왔다. 설마, 옥새를 받았다면?
두 눈이 동그래지고 말았다. 그의 얘기대로라면 자신이 그 자리에 올라가겠다는 것인가. 내게 질문은 했으나 그의 표정에서 이미 답을 얻은 듯, 미소를 머금었다. 끝내 나는 어떤 대답도 하지 않고 고개를 살짝 숙인 뒤 처소로 돌아왔다. 김통정, 개경에서는 물론이거니와 강화, 진도에 있을 때도 왕족과 어떤 혈연관계를 맺은 적이 없고. 그의 조상 중에서도 왕족은 단 한 명도 없는 걸로 알고 있다. 그래서 그런 걸까, 아니면 이미 이곳에 내려올 때부터 마음을 정녕 굳게 먹었던 걸까, 그것도 아니면 진정 두 사람이 죽기 직전 그에게 나라를 부탁했던 걸까?
 
한 가지 확실한 건, 지금의 평온함이 단순하지 않다는 것. 군량까지 마음껏 탐라사람들에게 나눠주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성주청 내부에 군사들의 훈련은 날이 갈수록 강도를 높여나가기도 했다. 이문경은 얼마 전부터 성주청에 아예 들어오지 않은 중이기도 하고. 조용히 살펴보면 과연 이들이 무슨 생각으로 무얼 꾸미고 있는지 의뭉스러운 구석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지금으로서는 아무 것도 알아낼 방도가 보이지 않았다. 그저 하루하루 성주청에 갇힌 듯 자유롭게 그의 수하들이 움직이는 모습만 살펴보며 지내왔다. 김통정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딱히 내게 말을 걸지 않았고, 내가 말을 걸어도 모두 은근슬쩍 피하기 바빴다.

성주청 바깥으로 나가는 일은, 당장 원하는 게 아니었지만. 문을 지키는 군사들이 나만 보면 더 꼿꼿하게 서 있었다. 하루는 김통정에게 혼자서 슬쩍 성안 사정을 둘러보겠다고 넌지시 얘기했으나, 돌아온 대답은 이미 자신의 수하가 하는 중이니 걱정 말라는 것.
달포가 흘렀을 즈음, 김통정이 친히 내 처소 앞으로 찾아왔다. 그의 곁을 지키는 군사가 내 손에 보자기 하나를 건네주었다. 그 속에 담긴 건, 나무로 둥그렇게 만든 인장이었다. 그동안 예우만 해줬지, 실질적으로 일을 맡기지 않은 자신의 불찰이라는 말을 보태었다. 수하 중 손재주가 좋은 자가 며칠에 걸쳐 직접 만든 것이니 잘 부탁한다는 얘기도 덧붙였다.

그 다음 날부터 내게 소일거리 아닌 소일거리가 생겼다. 군사들이 성 밖으로 나갈 때 문서 하나를 챙겨왔다. 자신의 부장이 쓴 출입증인데 내가 받은 인장으로 찍어주면 되었다. 딱히 군사들과 말을 섞은 건 아니었다. 그저 인장과 함께 따라온 ‘군감’이란 직함에 예를 갖출 뿐이었다. 그 밖에는 여전히 성주청을 표류하듯 이리저리 떠도는 게 일과였다. 그 사이 어깨와 다리는 점점 회복하였고 얼굴에 난 상처들도 그 흔적을 거의 감추고 있었다.
다시 달포가 흐를 즈음, 김통정은 수하들을 모두 앞마당에 모이게 했다. 그중 몇몇은 얼마 전까지 군복 차림이었지만 관복으로 바뀐 상태였다. 이문경도 여기서 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저번에 볼 때보다 훨씬 더 그을린 얼굴에 군복은 곳곳에 닳아버린 흔적도 있었다. 김통정은 양쪽으로 줄지어 선 수하들 사이로 자리를 잡고 서 있었다. 곁을 지키던 수하에게서 황금색 보자기를 건네받더니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일순간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그곳으로 향하였다.

“난 이곳에 처음 발이 닿은 그날부터, 꿈을 꾸었소.”

또다시 그 얘기란 말인가. 다른 사람들은 눈만 멀뚱멀뚱한 채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다. 그다음 흘러나오는 말은 역시나, 내게 했던 내용과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다만 얘기가 끝나기 무섭게 황금색 보자기를 풀어버렸다. 그 속엔 금으로 된 장식이 있는 목함이 있었다. 다시 사람들은 시선을 그쪽으로 향하였고 모두 숨소리도 잠재웠다.

“모두 잘 보시오. 이게 선왕 폐하께서 친히 내게 주신 것이오.”

순간 내 귀를 의심하고 말았다. 도대체 이건 무슨 말인가, 선왕 폐하라니. 설마 승화후? 나 역시도 그의 말에 집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매일 꿈만 꾸다가 어젯밤 성 밖 근처 바다로 갔더니, 이게 자신의 앞에 떠밀려온 것이라고 했다. 함에서 나온 건, 다름 아닌 옥쇄였다. 직접 본 적은 없었지만, 보통 인장과는 그 모습이 확연히 달랐다. 온통 금빛으로 감돌았고 모양은 멀리 떨어져서 잘 보이지는 않았으나 계속 쳐다볼 수도 없었다. 저걸 보자마자 주변 사람들이 모두 바닥에 엎드려 머리를 붙였다.

“다들 보았소이까? 내가 이 나라를 구하겠소이다!”

그의 목소리에 내 등줄기에 땀이 한 방울 맺혀서 아주 천천히 흐르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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