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영민 역사장편소설

   
▲ ⓒ뉴스제주

사람들은 모두 외쳤다. 새로운 전하가 즉위하셨노라고. 천세를 외치는 목소리가 하나로 모여 김통정의 주위에 둘러쌌다. 그것도 잠시, 이문경이 갑자기 일어나서 두 팔을 번쩍 올리던, 만세를 우렁차게 외쳤다. 금세 성주청은 만세라는 함성이 가득 채웠다. 나도 다른 사람들을 따라 일단 두 팔을 들었다가 내리기를 반복했다. 곁눈질로 슬쩍 내다보니, 그는 눈을 지그시 감고 옥쇄를 한 손으로 쓰다듬고 있었다. 그러나 갑자기 눈을 번쩍 뜬 그는 손바닥으로 사람들의 목소리를 잠재웠다.

“자중들 하시오, 자중!”

옥쇄를 다시 담아둔 그는 보자기에 감싸고 꽁꽁 묶어두었다.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하면서 그의 행동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옥쇄를 감싼 보자기는 김통정의 곁을 지키던 수하에게로 넘어갔다. 자신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사람들을 찬찬히 둘러보더니 한 발자국 앞으로 성큼 걸어 나왔다. 사람들은 모두 그가 걸어 나온 만큼 뒤로 재빠르게 물러났다.

“난 왕이 아니오.”

그의 한마디에 사방은 갑자기 정적으로 공기를 꽉 채웠다. 눈짓으로 눈치를 살피던 사람들은 조금씩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이때 이문경이 사람들 사이로 뛰어나와 자리를 잡더니 칼을 내뽑았다. 칼끝을 양쪽으로 한 번씩 겨누더니 도로 집어넣으며, 김통정에게 무릎을 꿇었다.

“어찌 해괴한 말씀을 하십니까, 하늘에서 옥쇄를 내려준 건 사실이 아니옵니까?”

잠시 이문경에게 향하던 시선이 다시 김통정의 얼굴로 바뀌었다. 그는 다시 눈을 감았다가 뜨더니 왼손으로 칼자루를 꽉 쥐었다. 오른손으로는 왼쪽 가슴을 천천히 두드렸다.

“어찌 감히 전하의 자리를 탐한단 말이오.”

한 글자씩 내뱉은 그의 목소리에 사람들이 눈동자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옥쇄는 무엇이고, 꿈은 무엇이며, 여태껏 만세 소리를 듣다가 갑자기 왜 이러는 건가. 나라를 구하겠다고 조금 전에 큰소리로 외치지 않았던가.

“다만 전하와 대장군이 뜻을 따르고자 하오.”

김통정은 수하에게 문서를 건네받자마자 바로 펼쳤다. 앞으로 이 땅에서 해낼 계획을 발표하였다. 첫 내용부터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이문경 또한 머리를 들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 사람들을 살펴보았다. 그 첫 내용이 바로, 탐라를 도성으로 삼겠다는 것. 진도 용장산성에서 물러나고 여기까지 온 이상, 다른 거점은 없는 사정은. 충분히 알 법 하지만.
단순히 몽골과 고려군과 싸워서 몰아낼 때까지가 아닌, 전란을 모두 진정된 이후도 바로 이곳이 황궁이요. 나라 전체를 대표할 도성으로서 역할을 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탐라 사람들은 그저 눈만 끔뻑끔뻑할 뿐이었고. 오히려 김통정과 함께 온 자들이 더 크게 웅성거렸다. 그중엔 얼굴까지 시뻘겋게 달아오른 상태에서 김통정 앞으로 다가가더니. 정녕 몽골과 고려군과 싸움이 두려운 것이냐고 물었다. 그에 대한 대답은 순식간이었다.

김통정의 곁을 지키는 수하가 곧장 칼에 피를 묻히고 말았다. 그걸 굳이 옆에서 말리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발갛게 물들어가자, 눈짓으로 양옆에 선 군사들을 흘겨보았다. 순식간에 조금 전 그 군사의 모습은 갑자기 눈앞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나라가 어지럽지만 이럴 때 일수록 더 큰 꿈을 품어야 하오. 그게 전하의 뜻이기도 하오.”

탐라가 고려에 복속하기 이전부터 인근 나라와 자주 교역했던 건, 나도 익히 들은 바였다. 다만 고려의 한 지방으로 복속한 이후에도 꾸준한 교역을 진행했던 것도 역시 알고 있었다. 다만 여기서 직접 들은 얘기는 그 교역의 결과가 성주와 조정에서 보낸 자들만 배를 불려왔다고 한다. 김통정은 다른 문서를 잠시 꺼내더니 사람들을 향해 펼쳐보았다.

바다 건너 조금 멀리 떨어진 왜국에 보낸 서신이었다. 그 내용은 다름 아닌 몽골과 고려군에 맞서 싸울 구원병을 보내달라는 것. 옥쇄가 찍혀 있었고, 고려 조정이란 말도 들어가 있었다. 김통정의 뜻은, 탐라가 도성이 된다면. 앞으로 바다를 통해 주변 나라, 저 너머 멀리 있는 나라들까지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 다음 이어진 내용도 사람들의 시선을 한 번에 사로잡았다. 도성을 삼기 위해선, 결국 더 탄탄하게 인근부터 방비하고. 왕궁도 새롭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 이에 탐라 사람들은 침묵을 깨뜨리고 서로 얘기를 나누었다. 그러다가 목소리가 커지기도 하고, 약간의 주먹다짐도 오갔다. 이번엔 김통정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수하의 움직임도 제일 먼저 막아내었다.

“과연, 여기 백성들이 동조하겠소이까?”

조용히 지켜보던 이문경이 탐라 사람들의 눈치를 슬쩍 살피었다. 누구보다 직접 탐라 사람들을 겪은 자가 아니던가. 나 역시도 과연 이곳을 도성으로 만드는 데 탐라 사람들의 반응이 궁금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건, 김통정은 여기 모인 사람들에게 묻고 싶은 점은 하나도 없었다. 두 손으로 쥐고 있는 문서 속 내용을 통보만 할 뿐.

정말 여기 사람들이 놀란 건, 문서의 마지막 내용이었다. 더 이상은 막아내기만 하는 전투는 멈추겠다고 운을 뗀, 김통정의 입에서 나온 말은. 지금부터 공격의 차례가 왔다는 것.
탐라 사람들을 삼별초의 용맹한 무관으로 합류하여, 빼앗겼던 남해안부터 도로 가져오고.
더 나아가, 개경까지 진격하겠다는 것이었다.

“대, 대장군. 어, 어찌 그리!”
김통정과 함께 내려온 군사 중 한 명이 그 자리에서 다리가 풀려 주저앉았다. 그 옆에 있던 몇몇 군사들도 다리를 오들오들 떨기 시작했다. 김통정의 눈꼬리가 올라가더니, 얼굴이 살짝 붉게 달아올랐다. 먼저 주저앉은 군사는 그 자리에서 얼굴이 바닥으로 파묻혔다. 조금 전 소리쳤던 그 군사처럼 재빠르게 모습을 감추었다.

“두려운 순간, 우린 항복한 것이나 마찬가지요. 가슴이 뜨거운 순간부터 승리의 맛을 볼 때만 기다리면 되오.”

김통정의 차가운 눈빛에 함께 내려 온 군사들부터 먼저 자세를 다시 바로잡았다. 이문경도 마찬가지로 자세를 바로잡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삼별초는 모두 얼굴이 굳어갔지만 오히려 탐라 사람들은 그 반대였다. 그중 한 사람이 손을 들고 앞으로 나왔다. 정말 이 땅을 도성으로 삼겠냐고 재차 물었고, 그게 거짓이 아니라면 기꺼이 목숨까지도 바치겠다고 했다.

“내 어머니의 고향이 여기올시다. 어찌 따로 모략을 꾀할 수 있겠소. 부디 도와주시오.”
다시 한 번 탐라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말이었다. 그의 어머니가 고향이라니. 당장 그걸 확인할 방도는 없었다. 그러나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진실로 받아들였다. 오히려 여기에 있는 탐라 사람들은 오히려 자신들이 사람을 더 모으겠다는 뜻도 내비쳤다. 그제야
김통정은 눈에서 날을 거뒀고 입가는 엷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자신은 새로운 왕이 이 땅에 올 때까지 대장군으로서 소임을 다 하겠다는 말과 함께 자신의 처소로 돌아갔다. 이문경은 여기 모인 사람들을 바로 해산시키지 않았다. 지금부터 탐라 전역에서 사람을 모아, 앞으로 해야 할 일에 투입하겠다고 밝혔다. 특히 탐라 사람들에게는 제일 많은 인원을 데려 온 이는, 특별한 대우를 해줄 것이라 밝혔다. 그때 처음 보았다. 탐라 사람들이 이들에게 환한 웃음을 드러내며 여느 때보다 빠른 발놀림으로 움직이는 모습을.

며칠 사이, 성주청 앞으로는 인파가 끝도 없이 밀려들었다. 어디서 왔는지 모를 아주 멀끔하고 건강한 장정들부터 시작하여, 어린아이와 노인들도 그 자리를 가득 채웠다. 오히려 삼별초 군사들은 너무 어리거나 너무 나이가 많은 이들부터 골라내어 먼저 돌려보내기 분주했다. 돌려보낸 자들은 빈손이 아닌, 약간의 식량을 쥐여 주었다. 그 때문일까, 날이 갈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성주청 바깥으로 출입하는 것 자체가 엄두를 낼 수 없을 지경으로. 내게서 도장을 받고 나간 군사들도 금방 되돌아오기 일쑤였다.

성주청 내 마련해둔 군영부터 새로운 사람들이 하나둘 들어오기 시작했고, 들리는 얘기로는 이문경이 관리는 외부 군영도 거의 꽉 차고 있다는 것.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 밤새 고민을 해보았다. 도저히 잠이 오질 않아, 처소 앞에서 혼자 빙빙 한 발자국씩 돌았다.

“무슨 생각을 골똘히 하시오?”
그림자처럼 조용히 내 앞으로 다가온 건 김통정이었다. 그것도 곁에 누구도 없이 혼자였다.

“부탁이 하나 있는데, 들어주시겠소?”
얼굴을 가까이 붙이면서, 내 손에 차갑고 묵직한 걸 슬쩍 올려놓았다. 그건 바로 단검이었다. 고려군 문양이 새겨진.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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