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영민 역사장편소설

   
▲ ⓒ뉴스제주

그 칼은 자연스럽게 내 손에 올라와 있었다. 곧이어 김통정은 혼잣말처럼 내뱉었다. 나무가 올곧게 자라려면 쓸데없는 가지는 과감히 쳐내야 한다며. 때로는 그 가지가 자신이 쓸데없을 줄은 절대 모를 수도 있다고도 했다. 그래서 도대체 내게 무얼 원하는지 물었다.

“그저 우연히 가지를 쳐내길 바랄 뿐이오.”

김통정, 그가 바라보는 방향은 다름 아닌 이문경이 주둔한 성주청 외곽 좌측이었다. 이곳에 꽉 메인 몸, 어찌 그쪽까지 간단 말인가. 그러나 내 근심은 기우에 불과했던 걸까. 며칠이 지난 밤, 으슥한 기운과 함께 김통정이 혼자 몸으로 처소 앞에 서 있었다. 안으로 들어오라고 했으나, 손을 내저었다.

“며칠 전, 했던 그 얘기를 기억했으리라 믿소이다.”

미처 내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그의 그림자는 자취를 감추었다. 이걸로 도대체 어떡하란 말인가, 설마 직접 공격하라는 것도 아닐 터. 깊어지는 어둠만큼이나 고심했지만 별다른 답은 내리지 못 한 채, 동이 트는 모습을 보았다. 눈꺼풀은 한껏 무거워졌고, 어깨가 축 늘어졌지만 도무지 자리에 누울 수가 없었다. 잠시 뒤로 좀 기댈까, 싶던 차에 군사들이 갑자기 문 앞으로 다가왔다.

“대장군의 명이옵니다.”

김통정은 군사들과 함께 이문경의 군영을 차근히 살펴보게끔 준비를 해놓았다. 성주청 바깥으로 나가는 게, 얼마만이더냐. 열댓 명 되는 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성주청 바깥으로 나왔다. 탐라 사람들은 나의 일행을 보자마자 서로 피하기에 급급했다. 심지어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 했고, 우는 아이의 입을 틀어막은 아낙네의 모습도 들어왔다.

성주청에서 조금 더 멀어지자, 사람들의 모습이 도저히 제대로 살펴보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흙을 파서 벌레를 입으로 넣는 아이부터, 누렇게 뜬 구정물도 서로 더 마시겠다고 주먹다짐까지 하는 어른들의 모습도 몇몇 보였다. 비쩍 말라버린 몸으로 바닥을 겨우겨우 기어가는 노인도 있었다.

나올 때부터 하나 같이 침묵을 지키는 군사들에게 물었다. 도대체 여기 사람들은 어찌 된 것이냐고. 처음엔 바닷가 근처라서 이렇다는 앞뒤 없는 대답을 내놓더니. 더 자세한 사정을 물어보자, 모두 한 번씩 나를 흘겨보면서 괜히 발걸음만 빨라지기 시작했다. 도대체 거의 매일 성주청 앞에 몰려들어서 식량을 챙겨간 이들은 어디 있는 건가. 이곳 사람들은 무기력하게 억지로 겨우겨우 살아낸단 말인가. 아무도 나의 계속된 질문에 짧은 답변 하나를 돌려주지 않았다.

“어찌 친히 여기까지 발걸음 하셨소이까?”

군영 앞에 다다르자, 이문경이 직접 바깥으로 나왔다. 김통정이 쓴 서류를 내게서 받아들더니 한참 살펴보며 침만 여러 번 삼켰다. 동행한 군사들은 군영 안으로 들이지 않고, 나만 이문경과 함께 들어섰다. 이곳도 처음 내가 봤을 때와 달리 군사들이 대부분 얼굴에 뼈가 드러날 만큼 메말라 있었다. 이문경도 옆에서 걸으며 자세히 살펴보니, 상처는 상처대로 더 많아졌고 얼굴부터 온몸 전체가 깡마른 상태였다. 군영 내 이문경의 처소도 퀴퀴한 냄새만 예전보다 더 짙어졌을 뿐, 집기들은 어디 근처 민가에서 주워 온 듯. 술병부터 시작해서 어디 하나 성한 것이 없었다.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되었단 말인가.

“대장군이 어찌 군감을 여기까지 보냈소이까. 직접 오시지도 않고.”

나도 김통정이 여기 사정을 두루두루 살펴보라고 공식적으로 명령했을 뿐. 당장 또렷하게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금이 깊게 패인 그릇에 채워진 물을 한 사발 들이켜는 게 당장할 수 있는 전부였다. 이문경은 나와 마주 앉아 지그시 눈을 감고 있었고, 나도 마찬가지로 팔다리가 욱신거리고 지난밤 너무 많은 생각을 꺼낸 탓인지 그저 눈만 감고 싶었다. 두 사람이 꺼내 든 침묵은 제법 짙었고 해를 중천에서 한참 반대로 기울 때까지 버티게 하였다. 오죽했으면 이문경의 수하가 바깥에서 조심스럽게 무슨 일은 있는 게 아닌지, 물어볼 정도로.

“오면서 봤겠지만 상황이 그리 좋은 건 아니오.”

먼저 말문을 연 건, 이문경이었다. 분명 김통정이 탐라를 도성으로 삼겠다고 했을 때, 환호했던 사람들은 그저 살기 위한 몸부림에 불과했다고도 혼잣말처럼 내뱉었다. 지금 탐라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건, 크게 두 가지뿐이라고 했다. 삼별초군의 눈치를 계속 살피며 그들이 원하는 행동을 지금처럼 보여주거나, 빨리 세상을 뜨겠다는 일념으로 그저 버티거나. 그들의 모습을 보며 정작 힘이 빠지는 건, 이문경 바로 자신이라고 밝혔다.

“우리가 여기서 무얼 할 수 있겠소이까?”

내 눈이 잠시 커졌다. 지금 들은 말이 분명 이문경 입에서 나온 것이던가. 그렇다면 왜 그리 김통정에게 과하다 싶을 정도로 충성하는 모습만 보여줬던 건지. 의문만 내 속에서 점점 더 깊어져갔지만, 그 답은 곧바로 그가 내뱉었다.

“더 이상 갈 곳이 없소.”

그렇다, 탐라는 고려의 남쪽 마지막 땅이 아니던가. 제법 오래 버텼던 용장산성마저도 내어주고, 남은 세력들로 버티는 신세가 아니던가. 분명 먼저 내려와서 자리를 잡은 터라, 누구든 제압할 수 있는 최소한 이점은 있겠으나. 알고 보니, 이문경은 누구보다 명분의 틀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 하는 사람이었다. 김통정이 자신보다 제아무리 어릴지언정, 그들이 세운 왕과 배중손 대장군의 뜻을 이어받았다는 자를 선뜻 끌어내기는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미 여기서 고려군과 전투로 수하들을 여럿 잃었던 터라, 더 이상 그러고 싶지 않다고도 했다.

“그래서 왕으로 세워야 하오.”

오히려 김통정이 새로운 왕으로 세워지길 바란다던데. 언제 고향으로 돌아갈지도 모를 상황에 자신보다 더 막막하고 두려움에 휩싸인 수하들을 위해서라도 그래야만 한다고 한다. 비록 내가 개경 조정과 연관된 사람인 줄 뻔히 알고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라도 함께 힘을 합쳐주길 정중하게 부탁하겠다며 고개를 숙였다. 그는 알고 있을까, 김통정이 쳐내고 싶어 하는 가지라는 걸. 더 이상 그와 마주 앉아 얘기를 나눌 힘이 남지 않았다. 온몸이 축 처지는 것보다 기력을 빼앗는 건, 내 품 속에 담긴 단검이었다. 결국 몸을 일으키면서, 그의 앞으로 조용히 내밀었다. 품 속에 있던 단검을.

김통정이 내게 했던 말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그대로 남겼다. 얼굴이 어둡게 물든 그를 뒤로 하고 처소 바깥으로 나갔는데, 내 앞에 군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물러나라는 내 말에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처소 안에서 이문경이 소리를 내지르자, 그제야 다가오면서 곧바로 양팔부터 붙들었다. 군영 한가운데 마련된 낡은 의자에 앉기까지 순식간이었다. 내 몸을 묶은 줄은 여느 때보다 더 단단했고, 나를 중심으로 빙 둘러싼 군사들의 눈빛은 각자 지닌 무기보다 더 예리하게 날이 서 있었다.

“뭣들 하는 게냐!”

그런데 이문경이 내 앞으로 나타나면서 묶였던 줄은 금세 풀렸다. 나를 붙들었던 군사들은 허리까지 숙여가며 정중하게 사과했다. 그럼에도 나를 바라보는 시선들은 하나도 무뎌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독기가 바짝 올라와 있었다. 만지작거리던 칼과 도끼로 당장 내게 던져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만큼. 그래도 이문경의 손짓에 모두 조금씩은 물러나 있었다. 그는 내 앞으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내게서 건네받은 단검을 만지작거리며, 헛웃음만 연신 내뱉었다. 갑자기 내 양손을 부여잡더니 천천히 일으켜 세웠다.

“이게 아니었으면, 여기서 목이 날아갔을게요.”

단검은 다시 내 손으로 돌아왔다. 그와 함께 나무로 만든 네모난 통도 함께 줬는데, 이건 김통정에게 직접 갖다 주라고 했다. 그 속에는 무엇이 들어있는지는 조금의 언질도 주지 않았다.

“아까 말한 내 뜻은 전혀 변함이 없소이다. 그것만 알고 계시오.”

군영 바깥까지 동행한 이문경은 귓속말과 함께 내 등을 밀었다. 성주청에서 여기까지 왔던 군사들이 나를 보자마자 다가왔다. 군영 안으로 들어가는 이문경과 나를 번갈아 쳐다보면서 낯빛이 어두워졌다. 내가 들고 있는 통이 무엇이냐 묻기에, 직접 갖다 줘야 하니 앞장서라고 목소리를 한껏 낮췄다. 잠시 멈칫하던 군사들은 눈치를 슬쩍 살피더니 먼저 발을 떼기 시작했다. 도대체 이 통에는 무엇이 들어있단 말인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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