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영민 역사장편소설

   
▲ ⓒ뉴스제주

내게서 통을 건네받은 김통정은 곧장 뚜껑부터 열었다. 그 속에는 아직 핏기가 채 가시지 않은 손가락이 있었다. 그 옆에 서찰이 가지런하게 놓여 있었다. 그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던 김통정의 입가엔 미소가 스며들었다.

“가지를 쳐내기보다 꽃을 피워오셨구려.”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던 김통정은 서찰과 통을 챙기더니 조용히 처소로 들어갔다. 날이 밝으면서 지난밤까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평소 일상으로 되돌아왔다. 김통정은 하루에도 몇 번씩 성주청 바깥을 나갔다가 들어왔다고는 하지만. 그가 무슨 일을 준비하는지는 어느 누구에게도 들을 수 없었다. 그와 늘 동행하는 몇몇만 알 뿐이었을까. 간혹 성 밖으로도 나갔다는 얘기만 들었을뿐, 그마저도 확실치는 않았다. 더불어 이문경의 소식은 아예 들리지 않았다. 간간이 거기서 보낸 수하들이 성주청에서 보일 법하지만 며칠 동안 전혀 그렇지 않았다.

성주청 분위기는 차분했지만 하늘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마른하늘에서 천둥이 간간이 울렸고 바람의 방향은 길을 잃은 듯 눈 깜짝할 사이에 너무 자주 바뀌고 있었다. 꼭 이럴 때, 심상찮은 일이 벌어지건만. 부디 이번만큼은 예상이 벗어나길 바라며, 또다시 다가온 밤과 금방 돌아올 아침을 기다렸다.

거의 달포쯤 흘렀을까, 성주청이 점점 소란스럽기 시작했다. 군사들은 외출을 갑자기 중단하였고. 이문경의 수하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성주청을 들락날락했다. 그들은 바빠보였지만 오히려 난 손을 놀리고 있을 수밖에. 자리만 그럴싸할 뿐, 군사들 중 누구도 내게 머리를 진심으로 조아릴 자는 한 명도 없을 터.

“군감 어른, 안에 계시옵니까?”
머릿속에 맴도는 생각의 꼬리가 미처 다 정리되지도 않았는데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헛기침 소리에 안으로 들어온 자, 역시 처음 본 얼굴이었다. 체구가 여느 군사들보다는 작았고 움직임이 재빨라보였다. 내 앞에 가까이 무릎 꿇고 앉았을 때 먼저 보이는 건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의 몸에서 풍겨나오는 채취였다. 분명 이곳에 살아남은 군사들이 얼굴은 모두 전투의 흔적이 있다. 나도 얼굴과 온몸 곳곳에 지금까지 살아남은 흔적들이 너무나도 깊게 박혀있는 터. 그게 아니라면 이 땅에 살아있는 자들이라면 얼굴과 목, 몸 어느 구석에 상한 흔적이 있어야 할 텐데. 지금 나와 눈을 마주보고 있는 자에겐 전혀 그런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짙은 피비린내 역시, 그의 몸에서 전혀 풍기지 않았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지금 입은 군복이 몸에 딱 들어맞지도 않았다. 물론 지금 상황에서 각자 딱 맞는 복장은, 기대하기 어렵지만. 대체로 군사들은 자기 몸에 맞춰서 깁거나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한 흔적 정도는 남길 터. 도대체 이 자는 누구란 말인가. 나모 모르게 목구멍에 고인 침을 삼키고 말았다.

“잘 계시는 모습을 뵈오니, 소인은 일단 마음이 놓이옵니다.”

그가 품속에 손을 넣은 순간, 나도 모르게 뒤로 몸이 넘어갈 뻔했다. 탁상 위에 올라간 건, 다름 아닌 서찰이었다. 곧장 그 내용을 확인한 순간, 손끝에서부터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식은땀이 이마와 등줄기를 동시에 흘러내렸고, 잠시 눈앞이 어질어질할 정도였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내용이 정녕 참이었다.

“괜찮으시옵니까?”

뒤로 넘어지려는 걸, 그가 팔을 끌어당겼다. 빨라지는 박동을 심호흡으로 잠재우며 다시 서찰 내용부터 차근차근하게 살폈다. 그동안 나의 소식은 탐라 밖으로 벗어나지 못한 줄 알았건만. 장인어른은 모두 알고 있었다. 오히려 탐라 전체 사정을 나보다 더 꿰뚫을 정도였다. 도대체 그동안 나를 왜 지경까지 놔뒀단 말인가. 떨리는 손을 어느새 꽉 쥐었다. 탁상을 내리치며 내 앞에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군감 어른의 의중은 어르신도 잘 알고 있사옵니다. 그래도 누구보다 믿고 있다는 것도 알아주시길 바란다고 전하셨습니다.”
그는 말끝 하나 흐리지 않고 차분하게 내뱉었다. 분명 이를 꽉 깨물었으나 더 이상 손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어깨와 다리도 힘이 풀려서 헛웃음만 내뱉을 뿐이었다. 이보다 더 내 귀를 바짝 세운 건, 그가 지슬의 이름을 거론했기 때문.

“탐라는 결코 작은 섬이 아니옵니다. 그러니 건물 몇 개를 차지했다고 탐라 전체를 장악했다고도 할 수 없지요. 우리를 돕는 자가 있사옵니다, 군감 어른도 잘 아는 그 자입니다.”

다시 한 번 물었다. 내가 아는 그 자가 정녕 지슬이 맞느냐고. 고개를 끄덕이며, 지금은 많은 걸 알려줄 수 없으니 미안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제는 지켜볼 수만은 없으니 장인어른이 직접 앞으로 해야 할 방향을 알려주겠다는, 서찰의 마지막 내용까지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이제 문을 열려고 한 그 순간, 바깥에 횃불이 모여들었다. 지금껏 흐트러지지 않았던 그의 눈빛에 초점이 사라진 걸 보았다.

“군감 어른, 거기 계시오?”
바깥에서 들려 온 목소리는 다름 아닌 김통정을 직접 수행하는 군사였다. 인기척하기가 무섭게 군사들이 처소 안으로 들이닥쳤다. 그들은 순식간에 칼을 뽑아 그의 목으로 갖다붙였다.

“수상한 자가 침입했다는 보고를 받고 왔소. 군감 어른, 이 자는 누구이옵니까?”

김통정의 수행군사는 나와 그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엉거주춤하게 선 상태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들의 시선에 모두 살기를 품고 있었다. 바로 이 자리에서 피비린내를 보태도 더 이상하지 않을 만큼. 그나마 다행이라면 그가 내게 건네준 서찰은 품속으로 넣어둔 것이랄까?

“누구냐고 묻지 않았소이까?”

나를 내려다보며 목소리가 한껏 높아진 수행 군사에게 오히려 웃음을 드러냈다. 몸을 완전히 일으켜 그의 옆으로 다가가 칼부터 거두라고 손짓했다. 그러나 여기 있는 군사 중 누구도 선뜻 내 말을 듣는 자가 없었다. 결국 품속에 있는 단검을 탁상으로 내리꽂았다. 아주 잠깐 칼끝이 내게 향할 뻔했으나, 군사들이 단검을 보자마자 서로 눈치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이건, 얼마 전 김통정이 내게 직접 건네준 그 단검이었다. 칼자루 문양이 오로지 김통정만이 사용하는 것이었다.

“아, 아, 아니. 군감 어른, 어찌 흥분하셨소이까.”

수행 군사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한풀 꺾였다. 다시 칼을 내려놓으라고 손짓하자, 이번엔 군사들이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재빠르게 움직였다. 그들을 모두 한 발자국씩 뒤로 물러나라 일렀고, 다만 수행 군사만큼은 내 앞으로 더 가까이 다가오게끔 했다. 주먹으로 얼굴을 세차게 휘두르자 군사들이 갑자기 우왕좌왕하며 내렸던 칼부터 올리려고 했다. 그러나 수행 군사가 재빠르게 손짓으로 제지하였다.

“군감 어른, 오해가 있으신가봅니다. 이 자가 수상쩍다는 보고를 받았사온대.”
군사들의 시선은 모두 서찰을 갖다 준 그에게로 향했다. 고개를 살짝 숙인 그는 어떤 말도 내뱉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수행 군사의 반대편 얼굴에 주먹을 내리꽂았다. 분명 눈이 충혈되면서 이를 꽉 깨물었지만. 탁상에 내리꽂힌 단검을 흘겨보더니 고개부터 푹 숙였다. 언제부터 나를 감시하고 있었느냐고 묻자, 누구도 선뜻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군사들이 바닥에 무릎을 붙이기 시작했다. 손에 쥔 칼도 내려놓았고.

“부디 대장군께는 이를 고하지 마시옵소서, 저희가 진정 실수했소이다.”
그들은 내가 아니라 탁상에 꽂힌 단검을 향해 머리를 바닥으로 붙였다. 난 탁상에서 단검을 다시 뽑아, 수행 군사의 바로 오른손 앞에 내리꽂았다. 여태껏 함께 있던 자는, 단검의 주인이 직접 내게 보낸 것인데. 정녕 그 정체를 알고 싶으냐고 물었더니, 군사들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지금 일은 지난밤 악몽을 꾼 셈으로 치겠다고 하니, 수행 군사와 그 일행은 여길 들이닥칠 때만큼 재빠르게 바깥으로 물러났다.

“군감 어른, 괜찮으시옵니까?”

그제야 그가 침묵에서 벗어났다. 숨소리가 거칠었으나, 애써 심호흡과 함께 평온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바깥에 다시 횃불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번엔 나를 부른 목소리는 바로 그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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