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영민 역사장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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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슬, 그의 모습을 여기서 볼 줄이야. 내 눈을 동그래졌지만 오히려 그는 미소와 함께 내 어깨를 툭툭 칠 정도로 여유까지 보였다. 안 보던 사이, 입가에 수염이 제법 뒤덮었고. 얼굴은 거무스름했지만. 팔다리와 어깨는 제법 다부지게 보였다. 무엇보다 그의 눈에 생기가 감돌고 있었다.

“펜안허우꽈?”

그가 처음으로 건넨 말이었다. 편안이든 안녕이든 이곳에 있는 내내 하루라도 그래본 적이 있었단 말인가. 그럼에도 지금 이 순간, 그를 마주 보고 있으니 이상하게 가슴속 한구석을 꽉 채웠던 그 무언가가 쑥 내려갔다. 이곳에서는 최소한 그와 마주칠 때마다 살아나지 않았던가.

“생각보다 시간이 너무 늦어졌구려.”

대장군이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눈으로 봤을 땐 왜소해보였지만 손아귀는 여느 젊은 사람들 못지않았다. 오히려 온몸이 절로 떨릴만큼 살기까지 느껴지는 손길이었다. 함께 대장군의 막사로 들어섰다.

탁자 위에는 탐라 전체 지도가 펼쳐져 있었는데. 현재 여기서 파악한 삼별초의 위치를 표시해놓았다. 여기서 더 눈길을 끄는 건, 이곳의 위치였다. 분명 산속에 있지만 망루에만 올라가면 충분히 성주청 인근 바다까지 내다볼 수 있었다. 수시로 삼별초의 큰 움직임은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반대로 저쪽에서는 어떻게 해도 이곳을 발견할 수 없는 지형이라는데. 얼마 전, 삼별초 척후 부대가 인근까지 왔으나 험준한 산세에 금세 돌아갔다고 한다.

“여기도 그리 오래 버틸 순 없을 걸세.”

대장군은 손가락으로 이곳을 가리켰다. 처음 이곳에서 군영을 마련할 때만 해도, 보급로가 서너 곳이 있었지만. 삼별초의 감시에 한 곳만 남은 상태라고 한다. 그마저도 제때제때 보급할 수 있는 형편은 되지 않아, 현재 모인 군사들이 얼마나 버틸지 장담할 수 없는 상태라던데.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내가 그동안 봤던 삼별초와 대항하는 세력만 따진다면 지금이 가장 많은 수였다. 그러나 여전히 삼별초와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이 갑절 그 이상으로 많은 건 사실이었다. 그들 대다수가 탐라 사람이었고 은밀하게 간자를 보내어 회유한다지만. 오히려 그 간자들이 삼별초에 넘어간 일들이 비일비재한 상황이었다.

오죽했으면 가짜 군영까지 만들어서 사람들을 가려내는 수고까지 필요했을까.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생각보다 현재 모인 군사들의 사기가 높지 않은 점이었다. 그들은 충분히 성주와 고려군, 삼별초까지 겪었던 터. 가장 두려운 존재들을 상대하라는 자체만으로도 큰 부담일 터. 얘기를 듣자하니, 이곳에 모인 자들은 그저 살고 싶어할 뿐이었다. 그 이상 그 이하도 기대할 수 없는.

“부탁함세, 우리에게 희망을 줄 수 있겠나?”

대장군의 두 눈이 내 얼굴로 향했다. 희망, 누가 누구에게? 당장 어떠한 말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쓴웃음을 입에 머금은 대장군, 그도 알았을 것이다. 신분도 확실하지 않은 어디선가 계속 나타나는 내게 무슨 기대를 건단 말인가.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리는 내게, 대장군이 코앞까지 바짝 다가왔다. 어깨에 얹었던 손으로 턱을 붙잡더니,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자네가 지금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날세.”
 
다음날, 날이 밝자마자 군사들은 무장한채 군영의 한가운데로 모여 있었다. 대장군은 그들 앞으로 나를 세웠다. 고려 조정을 대표한 관리라고 소개하면서, 하고 싶은 얘기는 내가 다 들어줄 것이라고 했다. 이런 부분까지는 미리 얘기가 된 바 아니었으나. 난 석상처럼 가만히 서 있으면서. 이들이 내뱉는 얘기들을 하나씩하나씩 듣고만 있어야 했다.

특히 고려군에 속했다가 여기에 온 자들은, 미처 알지 못했던 지원군은 마련해뒀냐며 집요하게 물어보았다. 반대로 삼별초에서 탈출한 이들은, 고려 조정 자체를 못 믿겠다며 이 자리에서 참수부터 하자는 의견이 더 많았다. 잠시 사람들이 둘로 나뉘어 격앙되는 듯 싶었지만. 양쪽 모두 한 가지 확실한 건, 삼별초와 전면전만큼은 두려워했다. 어느 쪽이든 전투 속에서 삼별초 모습을 보았다며, 목숨까지 내놓으면서까지 싸워야 하나며 한목소리를 냈다. 대장군은 잠시 눈을 질끈 감더니 한숨만 깊게 내쉬었다. 다시 주먹을 꽉 쥐더니, 나를 등지고 앞으로 나섰다.

“이 땅은 누게가 지킬 거라?”

아무도 동조하지 않았다. 오히려 피 흘려 지키면, 오히려 더 빼앗고 억압할 뿐이라며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내 쪽으로 향하였다. 차라리 속이라도 시원하게, 내 사지를 갈기갈기 찢겨서 까마귀들 밥으로 내던졌으면 한다는 누군가의 외침에 호응이 생길 정도였다. 저들이 나를 쳐다보는 눈빛에 살기가 짙게 서렸지만 떨리진 않았다. 오히려 온몸을 떠는 건, 바로 대장군이었다. 이를 꽉 깨물고 주먹까지 쥐면서 군사들을 하나하나 쳐다보더니,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중 가장 먼저 마주친 자에게 발길질로 배를 걷어찼다. 그 힘이 어찌나 세던지, 배를 얻어맞은 군사는 붕 뜨더니 한참 뒤로 밀려났다. 또 다른 몇 명도 그의 발길질에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제야 군사들은 서로 눈치만 살피면서 그와 거리를 두고 있었다.

“영허니까, 지금 이추룩 된 거 아니?”

급기야 허리춤에 차던 칼까지 뽑아들었다. 탐라 땅이 어떻게 되든 말든 상관없다면, 여기서 자신을 쓰러뜨리고 원하는 대로 가라는 말을 금세 덧붙였다. 군사들은 머뭇거리면서 그저 뒤로 물러나기만 급급했다. 대장군의 한숨은 오히려 더 짙어졌다. 칼자루를 쥔 손에 힘이 더 들어가기도 했다. 그 순간, 삼별초에서 탈출했다는 군사들의 눈빛과 손 방향을 포착하였다. 당장은 피하고 있었지만, 언제든 칼끝이 어디로 향할지 모를 일. 이대로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만하라는 한마디에 온힘을 다 실어서 소리쳤다. 모든 이의 시선이 내게로 향하였다. 그리고 말했다, 지금 고려 조정에서 원군을 보낸 상태라고.

“야이 뭐랜햄시, 그 말을 믿으라고?”

군사들 중 몇몇은 코웃음까지 쳤다. 다시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내가 지금까지 조정에 어떠한 보고도 못 올렸을 터, 결국 무슨 일이 생겼는지 모르는 상태이니만큼. 분명 이맘때쯤이면, 원군을 보내도 한참 전에 보냈을 것이라고 더 자세하게 내용을 풀어냈다. 물론 아주 거짓말은 아니면서도 나의 희망사항도 들어있는 터라, 목소리는 점점 키울 수밖에 없었다. 그 덕분일까, 사람들의 얼굴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 규모가 얼마나 되며, 삼별초와 맞붙으면 이길 수나 있는 전력인지도 질문 내용 자체가 달라졌다. 그걸 내가 어찌 알겠나, 하지만 나를 은밀하게 데려왔던 그들의 모습을 토대로 설명했다. 이미 나를 구하러 온 병력도 있었고, 그들이 돌아가서 데려올 원군의 규모도 만만찮을 것이라고 하니. 삼별초 쪽에서 왔던 군사들이 입을 굳게 닫아버렸다. 대신 고려군 출신 군사들는 눈빛부터 달라져있었다.

“다 들엄서? 영 고마이 이실 거라?”

대장군도 그제야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진정시키며 원래 자리로 돌아가 서 있었다. 바로 오늘밤, 성주청을 탈환하겠다고 밝히자 잠시 웅성거렸지만. 이내 함성으로 화답하였다. 물론 이 와중에 삼별초 출신 군사들은 눈빛부터가 영 심상치 않았다. 물론 전투 준비까지는 누구보다 빨랐지만, 딱 그뿐이었다. 이들 중 누구도 선봉에 함께 서려고 하지 않았고, 기어이 후방을 맡겠다고 했으나 대장군은 별다른 말없이 그리하라고 일렀다.

“이곳을 벗어나는 순간부터 안전은 보장 못한다네.”

출정을 앞두고 대장군이 내게 다가오더니 혼잣말처럼 일러주었다. 대신 나와 함께 이곳에 온 군사를 붙여주었다. 해가 중천으로 향하자마자, 군사들은 모두 군영에서 빠져나왔다. 다 해봐야 백여명 남짓한 수였지만. 산속 자체가 험준하여 둘로 나뉘어 움직이기로 했는데. 하필 대장군과 떨어져서 움직여야 했다. 이마저도 인원이 많은 터라, 한 줄로 이동해야 할 상황이었다. 앞서 보낸 척후들을 기다리면서 이동하다보니, 금세 해가 서쪽으로 많이 기울었고. 어느새 하늘이 붉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삼별초가 평소보다 더 움직임이 없다는 마지막 척후의 소식을 듣고서야 그나마 빠르게 발길을 재촉하였지만. 산속을 벗어났을 땐, 이미 저 멀리 횃불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우리 쪽보다 먼저 도착한 게 대장군이 아닐까 싶었는데. 그곳에는 대장군과 함께 또 다른 얼굴이 기다리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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