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스제주

제주시 동부보건소

이 준 영 주무관

 

‘김영란법’의 영향인지 어느 순간부터 제주는 너도나도 청렴을 외쳐댄다. 외쳐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청렴해야 된다며 시간되면 울리는 자명종처럼 청렴을 강조한다.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묻고 싶다. 당신들이 자랑하듯이 늘어놓은 수많은 고사성어와 만난 적은 없지만 청렴했던 역사적 인물들로 몇 명의 사람들을 청렴하게 만들었는지. 물론 기고를 적고 있는 나 또한, 지금껏 한 명의 인물도 청렴하게 변화시킨 적 없고, 스스로도 청렴하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내 기고를 읽고 한 명이라도 변하길 바라며 부끄러웠던 과거를 적어 본다.

 

내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 강의를 듣던 학우들 모두가 커닝을 한 적이 있다. 시험은 절대평가였고, 기준점만 넘으면 모든 인원이 점수가 잘 나오는 시험이었다. 순조롭게 다들 시험을 보고 있었으나 누군가 답안지를 대놓고 베끼다가 교수님에게 발각되고, 강의실에 있는 모두가 죄인처럼 몸을 떨었다. 교수님은 커닝에 동참한 사람은 손을 들라 하셨고, 난 강의실에 모든 사람이 손을 들 줄 알았다. 하지만, 단 한 친구가 손을 들지 않았다. 그 시간까지 푼 그 친구의 시험 점수는 답안지를 본 사람의 실력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 친구는 답안지를 모두가 공유할 때 참가하지 않은 친구였다. 손을 들지 않은 그 친구의 눈빛은 당당했고, 흐트러짐이 없었다. 평소 대단치 않아 보이던 그 친구의 뒤에 별빛이 흐르는 것 같았다. 그 친구는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

 

그 사건이 있고 며칠이 지났다. 난 커닝을 하지 않았던 친구에게 “넌 네가 착하다고 생각하니?”라는 다소 날붙인 질문을 던졌다. 그 친구의 답변은 내 예상과 달리 “아니”였다. 그 친구는 자신의 행동이 옳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 친구는 강의실의 모든 친구가 커닝을 하지 못하게 설득해야 올바른 행동을 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친구는 남의 눈을 의식해서 행동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의 양심을 의식해서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양심에 벗어나면 옳은 행동을 해도 죄책감을 가지는 사람이었다. 놀랍게도 그는 내게 그와 같은 도덕적 기준을 씌우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도덕과 양심에는 엄격했지만 남들까지 자신의 잣대로 평가하지는 않았다. 자신의 기준이 높음에도 남의 기준이 낮은 것을 질책하지 않았다. 그가 나에게 도덕적으로 행동을 하라고 외치지 않아도 난 내가 한 행동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군대를 간 후 연락도 하지 않는 친구지만 난 그 사건 이후로 늘 그의 양심을 닮고 싶었다. 나의 청렴의 기준은 역사에서만 배우는 인물들이 아니고, 저 멀리 외국에 있는 사례집에나 나올 법한 사람들도 아니다. 나의 청렴은 그 친구이다. 내가 그 친구에게 부끄러움을 느꼈듯이 사람들도 나를 보며 부끄러움을 느낀다면 난 나의 청렴을 조금이나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남을 변화시키려 외치는 청렴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청렴에 반하게 만드는 청렴의 길도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다. 청렴에는 한가지의 방법도, 한가지의 기준도 있는 것이 아니니까.

 

끝으로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에서 남을 변화시키려 노력한 영국 성공회 주교의 묘비 문을 간추려 적어보고자 한다. “이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자리에 누운 나는 문득 깨닫는다. 만약 내가 나 자신을 먼저 변화시켰더라면 그것을 보고 내 가족이 변화되고, 그것에 내 나라가 변화되고, 그것에 세상까지도 변화되었을지 누가 아는가!” 

저작권자 © 뉴스제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