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안허우꽈?] 64화, 바람의 불길
[펜안허우꽈?] 64화, 바람의 불길
  • 차영민 기자
  • 승인 2018.03.18 13: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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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영민 역사장편소설
차영민 역사장편소설 <펜안허우꽈>. ⓒ뉴스제주
차영민 역사장편소설 <펜안허우꽈>. ⓒ뉴스제주

땅에 미세한 울림이 스며들고 있었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바로 성벽 너머로 어떤 자들이 당도하였는지를. 누구도 먼저 입 밖으로 저들의 존재를 다시금 확인하려고 하지 않았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 나누는 눈짓과 손짓 하나면 충분했다. 내 옆에서 한숨을 길게 늘어뜨린 그는, 정작 눈앞에 삼별초 부대가 드러나자 손끝부터 떨기 시작했다. 분명 성벽 하나면 누구라도 막아낼 수 있다고 자신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어째 모든 병력을 끌어모은 거 같지 않소이까? 

그의 말은 과연 일리가 있었다. 그들의 등장은 단순히 토벌대를 꾸린 수준이 아니었다. 당장 북방의 오랑캐들을 소탕하러 간다 해도 전혀 무리 없을 만큼 부대 규모가 컸다. 그 중심에는 낯익은 얼굴이 떡 하니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쪽에서 일단 우리를 향해 소리쳤으나 바람이 당장 그들의 목소리를 막아냈다. 

성벽 안에 있는 사람들은 부랴부랴 각자 장비를 챙겼으나, 어느 것 하나 온전한 구석이 없었다. 갑옷을 챙기면 검이 없고, 검은 있으나 변변찮은 투구 하나 없고, 아예 맨몸으로 죽창 하나만 겨우 집어 든 모습도 적지 않았다. 거기다 난 성벽 위에 올라가 있으니 장비를 챙길 여력조차 없었다. 쓸 수 있는 무기 중 제대로 남아 있는 건, 고작 단검뿐이었다. 그마저도 나한테도 건네주려는 걸 양손으로 사양하였다. 양옆으로 드넓게 펼쳐진 저들을 어찌 단검 하나로 막아낼 수 있단 말인가.

사람들은 모두 성벽 앞에 모였다. 그 사이 몇 사람은 말 한마디 남기지 않고 사라진 상태였다. 딱히 남아 있는 자들이 전투에 열의를 태우지도 않았다. 오히려 지금이라도 항복해서 목숨을 부지해야하는 게 아니냐며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내들었다. 그 얘긴, 분명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나 정작 항복 소식을 누가 전하러 갈지 묻는 말에는 아무도 대답이 없었다. 서로 눈짓만 주고받을 뿐, 모두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결국 우린 어떤 선택도 할 수 없소이다.”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사이 삼별초는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바람이 잦아들자 김통정은 조금 전 못다했던 말을 큰소리로 내뱉었다. 가장 먼저 나오는 자, 어떤 이유도 묻지 않고 살려주겠다는 내용이었다. 성벽 위에 있던 나도 성벽 아래에 모인 사람들도 모두 또렷하게 들었다. 다시금 빠르게 눈치를 살피는 모습이 두 눈에 들어왔다. 그중에 가장 먼저 성벽 사이로 뛰쳐나온 자가 있었다. 여기 모인 사람 중 나이로는 연장자였다. 그나마 끝까지 싸워야겠다고 목청을 높였건만, 이젠 살 사람은 살아야하지 않겠냐며 뒤따라오지 못 하게 단검으로 위협까지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몇몇은 눈치를 살피며 앞서 나가려고 했으나, 결국 그에게 성벽 너머로 나가게끔 길을 내어주고 말았다. 손에 쥐고 있던 죽창은 내던진 채 맨몸으로 사정없이 달려나갔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뒷모습을 쳐다보았지만 정작 그자는 조금도 망설임이 없었다. 

김통정은 가장 먼저 항복하고 달려온 그를 직접 맞이하였다. 무릎을 꿇고 고개까지 숙인 그에게 어깨를 토닥이며 군사들에게 넘겨주었다. 그 안으로 들어간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 별다른 소식을 전하진 않았다. 대신 조금 더 성벽과 삼별초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언덕 아래하고도 한참을 늘어진 전열에 숨을 내뱉는 것도 쉽지 않았다. 도대체 우리를 상대로 너무 많은 사람들이 동원되는 게 아니던가? 의아한 구석이 있었지만 지금으로선 딱히 이유를 알 수도 없었다. 다만 눈앞에 펼쳐진 전열이 팔다리를 저절로 떨게하는 건 확실했다. 

과연 여기서 저들을 조금이나마 감당할 수 있을까, 한다면 얼마나 버텨낸단 말인가. 

속으로 내던진 질문이었지만, 옆에 있는 그가 내 어깨를 붙잡았다. 나를 지그시 바라보더니 눈에 힘을 가득 주었다. 고개만 돌려 모인 사람들에게 힘껏 소리쳤다.

“저들은 분명 우리를 두려워하고 있소!” 

느닷없는 내용이었지만, 축 처진 사람들의 어깨를 끌어당기기엔 더할 나위 없는 따뜻한 바람과도 같았다. 김통정은 가장 먼저 항복하는 자에겐 목숨은 반드시 살려주겠노라는 제안을 또 다시 직접 목소리로 내뱉었다. 눈치를 살피는 기미가 있었으나 이번엔 섣불리 움직이지 많았다. 대신 한 사람이 질문을 내놓았다. 만약 저들을 버텨낸다면, 우린 여기서 살아 나갈 수 있겠는지.

“한나절 지나고 성안에서 한 잔 하십시다.”

그는 대답에 부연 설명을 덧붙이진 않았다. 그래도 사람들이 그 자리를 지키게 하는 정도로는 충분한 내용이었다. 얼추 해가 제법 기우려고 할 때, 삼별초 군사들의 움직임이 분주하였다. 김통정이 오른손을 들자, 뒤에서 준비하고 있던 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각자 무기를 갖춰 들었는데, 우리와 제대로 눈이 마주칠 새도 없이 곧장 돌격하였다. 그 사이 우리는 성벽 위로도 사람들을 배치하였고, 성벽 사이 좁은 길도 돌과 나무를 동원하여 막아둔 상태였다. 바람은 아래쪽을 향하면서 화살이 날아들지 않았다, 오로지 무기를 든 군사들이 불을 본 나방처럼 성벽으로 달려들 뿐이었다. 그들끼리 부축하여 성벽을 타고 올라오려고 했으나, 그게 전부였다. 그동안 우리가 쌓아올린 성벽은 여느 곳보다 곱절이나 높았고, 외벽은 돌이나 단단한 걸로 덧대지 않았기에 누가 달려들어도 선뜻 매달릴 수 없었다. 행여나 겨우 버티고 있어도 흙과 함께 쓸려내려갈 뿐이었다. 성벽 위에서는 돌멩이를 내던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큰 위력을 발휘하였다. 

그 사이 삼별초 본진에서 또 다른 군사들을 내보내었다. 확실히 지금 아래에 있는 자들보다 재빨랐고 몸집 자체가 탄탄하였다. 성벽에 갖다 붙일 긴 사다리도 함께였다. 돌멩이를 내던지면서 사다리를 밀어내는 건,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흙이 미끄러운 건 벽도 그렇겠지만 위에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우리 쪽 사람 중 하나가 발을 헛디뎌 아래로 떨어졌지만 그의 비명조차 제대로 들을 수 없었다. 얼른 그 자리를 아래에서 재빨리 채워주는 게 지금으로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처음엔 축 처져 있던 사람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지치기는커녕 오히려 여느 때보다 움직임이 재빨랐다. 성벽 사이를 지키는 사람들은 장애물을 사이에 두고 칼이 오갔지만. 묵묵하게 버텨내었다. 사다리를 밀어낸 건, 돌멩이를 떨어뜨리는 것보다 더 효과가 좋았다. 성벽 바깥은 아무래도 경사가 있는 언덕인지라, 떨어진 군사들은 아래로 굴러가곤 했는데. 뒤따르던 군사들의 전열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분명 머릿수는 성벽을 당장이라도 밀어낼 듯 많았으나 제대로 정돈되지 않은 전열이라 서로 방해되는 형국이었다. 

“보시오, 이대로만 간다면!”

그와 나는 손발을 맞춰 우리 쪽으로 올라오는 삼별초들을 밀어내었다. 개중엔 창과 칼을 잘 쓰는 자가 던지기도 했으나, 아슬아슬하게 잘 피할 수 있었다. 오히려 그들이 던진 무기들은 우리 쪽에서 금세 활용하였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있었으니, 성벽에 흙이 생각보다 너무 쓸려나간다는 것. 이대로 간다면 하루 이틀도 못 버티고 이 자체가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나뿐만 아니라 성벽 위에 있는 사람들 모두 알아차렸던 터. 확실한 승부수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바로 그때 성문을 막던 사람 중 하나가 급히 내 쪽으로 올라왔다. 작은 나무통을 건네주었는데 그 속에는 진한 기름 냄새가 풍겼다. 옆쪽으로는 불에 검게 그슬린 흔적이 선명했다. 오래 고민할 시간은 없었다. 나무 한 부분을 깨고, 마침 성벽에 갖다 붙인 사다리에 뿌렸다. 밀어내면서 횃불을 붙이니, 금세 사다리 윗부분에 큰불이 번지기 시작했다. 그게 삼별초 군사들 쪽으로 쓰러지면서 근처 있던 나무들에 옮겨붙었다. 바짝 마른 나무는 낯선 불길을 빠르게 받아들였고, 옆으로 서서히 붙여나가고 있었다. 거기다가 바람이 서서히 불어오기 시작하자, 나무에 붙은 불길은 점점 양옆으로 넓고 빠르게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바람의 방향이 바뀌면서 우리 쪽으로도 불길이 날아오긴 했으나 옮겨붙진 않았다. 대신 성벽 앞에 바짝 붙어있던 군사들이 더 흐트러진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뒤따라 붙은 군사들은 머리 위로 날아다니는 불길에 오히려 뒤로 물러날 기세까지 보였다. 

불길 너머에서 지켜보던 삼별초 본진이 결국 북소리를 내며 깃발을 올렸다. 그건 바로 퇴각이었다, 신호를 받자마자 성벽 앞에 있던 군사들은 모두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 순간까지도 우리는 돌멩이를 계속 내던졌다. 물론 맞고 쓰러진 자들이 있었으나, 다른 자들이 부축하며 재빠르게 움직였다. 나무에 붙은 불길은 그들이 완전히 언덕 아래로 내려갈 때까지 따라붙었다. 삼별초 본진은 선봉대의 퇴각과 함께 조금 더 아래로 부대를 이동하였고, 그제야 나무에 붙은 불길도 서서히 잦아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우리들은 모두 만세를 부르고 있다. (계속) 

소설가 차영민. ⓒ뉴스제주
소설가 차영민. ⓒ뉴스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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