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영민 역사장편소설

만세를 외치는 함성은 붉게 타오르던 불길이 사그라질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비록 우리 중 싸늘하게 식어간 자들도 적지 않았으나, 함께 목소리를 내는 자들이 더 많은 것 자체가 각자 놀라워할 따름이었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 이번만큼은 이 자리가 마지막일 줄 알았으나 오히려 그동안의 위험한 상황들보다 몸뚱이 하나만큼은 너무나도 멀쩡한 축에 속했다. 팔다리에 묻은 붉게 물든 흙먼지만이 조금 전까지 상황을 대변할 뿐이었다.

우리는 상황을 살피면서 먼저 떠난 자들을 한 곳으로 조심스럽게 모셔두었다. 당장 간단하게라도 넋을 달래주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여전히 저 멀리 우리 쪽을 향한 삼별초의 존재 자체를 무시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다시 경계태세로 완전히 복귀하는 데에 많은 시간이 필요하진 않았다. 그로부터 이틀을 모든 사람들이 꼬박 뜬눈으로 지새워야만 했다. 수시로 삼별초 쪽에서 분명 움직임이 보였지만, 현재 주둔한 곳을 크게 벗어나진 않았다. 토성 주변에 몇몇을 보내어 몰래 들이닥친 자들이 있나 알아봤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만세를 함께 외쳤던 기억은 바람과 함께 흩날렸을까,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의 눈빛부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비축해놓았던 식량은 이미 바닥을 드러냈고, 돌아가면서 주변을 샅샅이 뒤적거리긴 했으나 큰 소득이 없었다.

그나마 구해온 식량은 누가 먼저, 누가 더 많이 먹을지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면서 괜스레 기력만 더 빼놓기 일쑤였다. 난 그들의 다툼에 적극적으로 끼어들지 않으니, 겨우 목만 축이며 시간의 흐름만 바람결로 짐작하고 있었다.

여기서 버티고 있는 것 그 이상의 할 수 있는 없다는 건, 서로 말을 꺼내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어쩌면 저들의 움직임을 더 기다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마음을 저들이 알아차렸을까? 불그스름한 햇볕이 땅을 서서히 뒤덮을 때쯤, 삼별초에서 군사 몇 명이 우리 쪽으로 빠르게 달려왔다.

우린 서둘러 전투태세를 갖췄으나, 그들의 모습이 가까워지자 고개를 갸웃하고 말았다. 다섯 마리의 말과 함께 달려온 삼별초 군사들은 갑옷만 갖춰 입었을 뿐 어떠한 무기도 손에 쥐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그중에 하나가 조금 더 앞서서 나오더니 하얀 깃발을 꺼내 들었다.

“긴히 나눌 얘기가 있소이다!”

저 한마디에 우리는 일순 술렁이기 시작했다. 느닷없이 왜 저들을 보냈단 말인가, 과연 이대로 만나서 긴히 얘기를 나눠도 될 일인지. 우리 중에 누구도 확신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오히려 저들을 상대해선 안 된다는 의견이 조금 더 많을 정도였다. 그러나 내 곁에 선 그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지금까지 침묵으로 애써 외면했던, 현재 우리 처지를 자신의 입으로 내뱉었다.

지금으로선 새롭게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마다할 필요가 없다는 점을 설득하고 있었다. 거기에 딱히 적극적으로 반박하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그에게 모든 결정을 떠넘기려는 눈치였다. 저들에게서 식량이라도 조금 얻어내라는 요구도 슬쩍 나올 정도였다.

저들은 결국 성문 안으로 들어왔다. 곧바로 말에서 내리라고 요구하자, 별말 없이 따랐고 심지어 투구와 갑옷도 모두 벗어달라고 했건만 그것 역시 응하였다. 따로 보존해둔 막사로 들어서기 전, 몸을 샅샅이 살폈으나 숨겨둔 무기도 없었다.

우리 중 그와 나를 포함해 다섯 명이 저들과 막사 안에 마련된 탁자 앞으로 마주 앉았다. 이들은 삼별초에서도 김통정을 가장 가까이 모시던 측근들이었다. 예전에 저들과 함께 있었을 때 여러 차례 얼굴을 봐 왔던 터, 오히려 먼저 아는 인사까지 건네는 여유도 선보였다. 거기에 나도 애써 침착하게 엷은 미소로 인사를 대신하였다.

“장군께서 친히 내린 제안이오.”

그들이 우리에게 내민 것은 김통정의 친서였다. 단순히 항복하라는 내용은 아니었다. 오히려 우리와 조약을 맺고 싶다는 정중한 부탁에 가까웠다. 그 조건들을 살펴보니, 당장 항전은 멈추고 원래 했던 일에 복귀만 해준다면, 우리 중 그 누구에게도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것. 오히려 축성 작업 때 군사들 대신 관리자로서 소임을 맡아준다면, 그에 따르는 대우와 권한들도 충분히 보장하겠다는 것이었다.

대신 삼별초의 일원으로서 변하지 않은 마음과 더불어 이 조건들은 탐라 전체를 대표하는 자격으로 여기고 제안한다는 것이었다.

각자 눈으로만 내용을 살펴본 우리는 어떤 말도 선뜻 꺼내지 못 했다. 왜 갑자기 이런 조건들을 내세웠을까, 라는 의문이 앞섰지만. 지금으로서는 특별히 선택할 대안들도 마땅하지 않았다. 이를 다른 사람들도 알고 있을 터, 가장 큰 문제는 과연 이게 곧이곧대로 지켜질지였다. 그래서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지금 진짜 속내가 무엇인지, 정녕 살아서 나갈 작정이라면 진실을 고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우린 탐라와 살기 위해 온 것이지, 불태우러 오신 게 아니오.”

저들은 하나 같이 힘을 준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어느덧 우리가 곧 탐라로 변해있었고, 저 대답대로라면 얼마든지 이 땅 자체를 불태울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런데 우리가 과연 탐라를 대표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기엔 조건이 오로지 축성만을 향해 있었다. 물론 앞에 앉아있는 저들은, 우리가 조건을 받아들인다면 그에 따른 일들도 달라질 것이라 했으나 그게 보장한다는 얘기라고 할 순 없었다.

하지만 현재 제안에 대한 뒷일까지도 고려할 여유가 없었다. 결국 저들이 내민 손을 잡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식량을 달라는 다소 구차한 요구를 하고 말았는데, 이걸 미리 알고나 있었을까? 성문 바깥에는 또 다른 군사들이 짐을 잔뜩 싣고 와 있었다.

그중에 대부분이 우리가 먹을 수 있는 식량들이었고, 자연스럽게 이 안으로는 삼별초 군사들이 여럿 더 들어와 있었다. 또 이런저런 이유들로 삼별초 군사들은 하나둘씩 더 들였고, 어느덧 성벽 위를 지키는 건 저들의 도맡고 있었다. 우리는 저들이 마련해준 새로운 옷까지 갖춰 입고, 각자 배를 채우며 축성 작업의 구간을 진지하게 논하기에 집중했다.

짧은 시간 갑작스럽게 바뀐 풍경들이 최소한 내겐 의문스러움 그 이상이었지만, 이것마저도 어찌 보면 사치스러운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금세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삼별초 군사들이 또다시 더 들어옴과 동시에 낯선 이들도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 행색이 처음 여기로 끌려왔던 우리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다만 분명한 차이점이라면, 어딘가 모르게 여기까지 온 과정이 지쳐보이진 않았다. 오히려 여기서 해야 할 일들에 스스로 적극적이었다. 우린 각자 여러 구역을 나눠 새롭게 들어온 사람들도 몇몇을 부리는 형세로 바뀌었는데, 직접 딱히 그들을 다그치거나 손댈 게 없었다.

특히 내가 맡은 외성 부분은 더 그러했다. 삼별초 군사들이 따로 챙겨준 설계가 있었는데, 그걸 굳이 얘기하지 않아도 내 손에 쥔 내용대로 착착 해내갔다. 그나마 내가 할 수 있는 건, 뒷짐을 지고 다시 쌓여가는 성벽의 높이를 구경하는 그뿐이었다.

몇 날 또다시 몇 날, 자연스럽게 성벽 너머에 있던 삼별초 부대는 본래 있던 곳으로 완전히 철수하였다. 대신 이곳에 있을 군사들만 간간이 교대를 하러 왔다갔다하는 수준이었다. 정작 우리에게 친서까지 보낸 김통정의 얼굴은 코빼기도 볼 수 없었던 것이 알 수 없을 노릇이었다.

군사들에게 물어봐도 이들 역시 제대로 아는 바가 없는 눈치였다.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성벽을 두고 서로 죽이려 다툰 게 맞나 싶을 정도로 이들과 너무 아무렇지 않게 지내는 모습도 역시 알 수 없을 노릇이었다.

외성은 진작 외형 자체는 거의 갖췄지만 투박한 모습과 달리 오히려 견고함에 신경을 많이 쏟았다. 외부에서 가져온 흙들의 절반은 무조건 외성에 들어갔다. 어느덧 높이는 더 이상 올라가지 않았으나, 비와 바람에 흘러내리는 걸 막아보고자 쌓았던 곳을 한 번 더 덧대고 다지기를 반복하였다.

그사이 내성도 작업이 빨라졌고, 건물들도 하나둘씩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여기서 한 가지 의아한 것은 새롭게 올라가는 건물들이 어딘가 모르게 너무나 조잡스러워 보였다. 너른 땅 한가운데를 텅 비워놓고 내성과 가까운 곳에 건물 몇 개만 짓고 있다니.

그 답은 엉뚱한 곳에서 느닷없이 툭 튀어나오고 말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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