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영민 역사장편소설

새로 지은 건물에는 아랫마을 사람들이 한둘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모두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의 가족들이었다. 너저분하게 만든 건물은 사람들이 들어가기 시작하니, 금세 그럴싸한 모양새를 갖췄다. 집은 그리 크지 않았으나, 지어지는 족족 하루 이틀 비지 않고 어디선가 사람들이 공간을 채웠다.

처음엔 외성과 가까운 아랫마을 사람들만 들여왔다가 점점 그 범위를 넓혀 나갔다. 조금 더 아랫마을, 그 옆 마을, 또 그 옆 마을. 점차 바닷가와 가까운 마을에서 사람들이 들어왔다. 외성과 내성 사이 집들이 거의 꽉 채워질 때쯤부터는 성주청 근처에 사는 사람들도 모습을 드러냈다. 그사이 집도 빠른 시간에 만들어졌지만 어느덧 하나의 마을이 갖춰지는데도 거의 순식간이나 다름없었다. 

그동안에 외성은 점점 더 단단하게 굳어나고 있었다. 겉으로는 확실하게 티가 나지 않겠으나, 흙과 돌을 적절하게 섞여 다져놓았고. 무엇보다 바깥을 향해 경사진 모양새가 절묘했다. 언뜻 누구라도 거기로 올라올 수 있어 보이나 정작 발을 딛고 올라서면 중심 자체를 잡기 어려웠다. 이미 여러 차례 실험까지 거친 결과, 온몸에 어떤 것도 지니지 않고 바람까지도 불지 않아야 겨우 가능한 수준이었다. 그마저도 입구 쪽 외성만 진입할 시도라도 할 수 있었고, 나머지 방향은 지형 자체가 가팔라서 성벽 앞까지 올라오는 게 쉽지 않았다.

외성 작업이 다 마칠 때쯤, 새로이 지어놓은 집들이 내성을 빙 둘러 있었다. 그중에 내가 살 집도 하나 마련해준다고 했으나, 거절했다. 소문을 듣고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하루에도 여러 번 찾아왔었고, 그걸 기다리겠다고 외성 바깥으로 움막을 치고 지내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니 당장 혼자의 몸으로 굳이 집 하나가 필요할 리가. 무엇보다 난 돌아가야 할 몸 아니던가, 그게 언제일지 몰라도. 

꽤 오랜 날이 흘렀지만 김통정의 모습은 여전히 드러나지 않았다. 다만 자주 얼굴을 보면서, 옛정까지 되새기는 몇몇 군사들을 통해 삼별초의 활동까진 알 수 있었다. 일단 탐라 곳곳에 성주와 고려군 잔당 세력은 완전히 소탕했고, 특히 성주와 왕자는 이미 그들이 사로잡아 앞으로 처리를 논의 중이라고 했다. 

애초에 여기까지 내려온 삼별초가 할 수 있는 건, 이 땅을 거점 삼아 버티는 것일 줄 알았다. 그러나 이들은, 그러니까 김통정은 내가 상상한 그 이상의 뜻을 품고 있었다. 그것은 반격이었다. 그리하여 삼별초는 탐라 전역의 사람들을 직접 관리하기에 나섰다. 그들이 세운 기준으로 어떤 이는 배를 만들고, 어떤 이는 여기서 성을 쌓고, 또 어떤 이는 군사 훈련을 받았다. 확실한 건, 탐라는 그들에게 고려의 영토가 아니었다. 김통정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하나의 거대한 해상 요새였다. 이를 진작부터 알고 있었으나, 예상보다 빠르게 일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상황만 겨우 알아보는 것일 뿐. 더 이상의 도망도 어떠한 저항도 무용이 된 지금, 언제까지 이러고만 있어야 할지.

“여기에 아주 귀한 분이 납신다던데?”

내성 공사가 무르익을 때쯤 사람들 사이에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여전히 내성 안으로는 어떠한 건물도 들어서지 않은 터라, 한편으로는 의아해하는 분위기도 함께였다. 귀한 분으로 에둘러 표현됐지만, 내성 안에 들어갈 사람은 왕이 될 자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 왕이 될 자가 누군지도 명확하게 이름은 올린 건 아니나, 딱 한 사람으로 좁혀진 건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김통정은 여전히 어떠한 모습조차 드러내지 않았고, 친서 이후에 특별히 연락 역시 없었다. 분명 이곳이 중요한 곳인 건, 지나가던 까마귀들도 아는 사실이건만. 이처럼 무심할 수가 있단 말인지. 공사 현장에 자리를 지키던 삼별초 군사들의 숫자 역시 점차 줄어들었고, 어떤 날은 아예 얼굴을 비추지 않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일하는 사람들을 더욱더 독려하는 건, 나와 함께 있던 관리자들의 몫이었다. 거기다가 일하는 사람들조차도 하나둘 씩 인사 없이 사라지기 일쑤였다. 그런데 사람들은 사라져도 그 자리를 또 다른 사람들이 금방 채워나갔다. 나 역시도 하루이틀 얼굴이 보이지 않으면 금세 기억에서 탈탈 정리하기 마련이었다.

외성 완공 이후 그다음으로 맡은 구역은 내성 입구 바로 오른편이었다. 자연스럽게 내성 안으로 들락거리는 일부 군사들의 존재를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외성이 올라갈 때부터 모습을 보이긴 했다. 그렇다고 딱히 외성부터 함께 작업하는 자들도 아니었다. 과연 저들은 누구란 말인가? 며칠은 애써 모른 체하고 있었으나 결국 그들이 내성 안으로 들어갈 때 슬쩍 다가갔다. 여기서 도대체 뭘 준비하고 있는지 곧바로 물어봤다. 

“미리 알면 다치십니다. 지금은 하던 일에 충실하시지요.”

돌아온 대답과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그들의 눈빛에 참을 수 없는 궁금함이 온몸을 조여왔다. 다음날, 또 다음날, 매일 안으로 들어가는 그들에게 다가갔다. 돌아오는 대답은 똑같았고. 성벽 작업하는 사람들에게 들어봐도, 그저 빈 땅만 두루두루 살펴보고 나오는 게 전부라고 했다. 그러는 사이, 내성도 성벽이 점점 견고하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외성과 달리 주재료가 돌이었다. 탐라의 돌은 다른 지방과 달리 군데군데 구멍이 나 있었고, 반듯한 돌끼리 차곡차곡 쌓아두는 게 아니라 서로 모양도 크기도 다른 돌들을 하나씩 맞춰서 올라가는 방식이었다. 그리하여 돌을 옮기는 사람들은 많으나 그걸 쌓는 사람들은 극히 적었다. 다른 구간에는 한참 쌓아 올렸던 것이 갑작스럽게 무너지면서 사람이 다치기도 했다. 

성벽이라고 이름을 갖추긴 했으나, 그리 높지도 않고 군데군데 구멍이 숭숭 뚫린 게 영 시원찮았다. 삼별초 군사들도 주변을 지키며 관심 있게 지켜보는 눈치였는데, 표정들이 썩 밝지만은 않았다. 저들도 아마 나와 비슷할 생각일지도. 그러나 이것이 나만의 착각이란 건, 성벽 작업이 얼추 마무리 될 즈음이었다. 삼별초 군사들을 통해 내성 설계가 일부 바뀐 걸 전해들었다. 이미 만들어진 성벽 안으로 또 하나 더 쌓아 올리라는 것. 

그동안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유지하던 사람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단순히 성벽을 하나 더 쌓는 것의 문제가 아니었다. 과연 내성에는 어떤 사람들이 들어갈 수 있는지를 은근히 기대하면서 궁금해 했다. 그래서일까, 유독 삼별초 군사의 시야에 들 낌새라면 괜스레 더 바쁜 척 활발하게 움직이는 자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다가 사람들끼리 서로 다투는 일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어쩌다 보니 그걸 중재하는 게 하루에 중요한 일과로 변하고 말았다. 

최소한 여기 모인 사람들은 지금의 생활에 큰 불만이 없는 눈치였다. 오죽했으면 개경에 있는 가족들을 데려올 계획은 없냐는 질문까지도 듣고 말았다. 물론 부디 거기와 여기가 어떻게든 연락이 닿아야 잠시나마 고민이라도 할 시늉을 할 텐데. 탐라의 밤은 너무나도 짧았고 자주 내 눈앞에 들이닥쳤다. 그때마다 언제면 돌아갈 수 있을지 스스로 질문만 던진 채 숙소로 들어가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아무래도 하늘이 장군을 보내주신 모양이오.” 

숙소로 돌아가려고 할 그때, 그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한동안 나와 정반대편 구역을 도맡느라, 거의 마주치질 못 해왔던 터였다. 그는 혼자 몸이었지만 내성 바깥에 지은 집 중 하나를 살뜰하게 챙겨놓은 터라, 이 시간이면 더더욱 마주칠 일이 없어왔다. 그런 그가 일부러 나를 찾아왔다니, 이건 무슨 일이란 말이지?

“다름이 아니라, 장군께서 내게 친히 이걸 또 보내주셨소이다.” 

그가 내게 건네준 건, 김통정이 직접 쓴 것으로 보이는 서찰이었다. 그 내용에는 그동안 자신의 행적들을 간략하게 담아놓고, 앞으로 어떻게 할지 계획도 함께 담겨 있었다. 행적이야, 내가 군사 몇몇에게 들은 것과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런데 그 계획에는 난데없이 왕을 추대하겠다는 게 아니던가? 그것도 아주 큰 성과 넓은 땅이 필요한데, 그걸 군사들이 차근차근 준비할 수 있도록 협조를 부탁드린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에 따라 충분한 포상들도 마련되었다고 하니, 앞으로 새로운 나라 건설을 위해 큰일까지도 고려중이라는 마지막 부분의 내용이 그의 마음에 불꽃을 지핀 모양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이걸 해보는 건 어떻겠소이까?” 

그가 주변 눈치를 살피며 귓속말로 남긴 말에 난 두 눈이 동그래질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찌 그런 생각까지. 난 뒤로 몇 발자국 물러나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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