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영민 역사장편소설

그의 앞에서 내 의사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이미 마음을 굳혔고 함께할 사람들도 제법 모아놓은 모양이었다. 굳이 내게 김통정의 친서를 보여준 연유는 무엇이겠는가, 무엇이든 함께하자는 일방적인 통보 아니었을까?

그는 탐라에 새로운 나라가 들어선다면 기꺼이 목숨까지 내놓을 각오가 되어 있다고 했다. 그렇다고 딱히 그럴싸한 명분도 드러나지 않았다. 그저 오랑캐와 고려군의 손아귀에서 벗어난다면 그것만으로 탐라가 큰 영광이 아니겠다는 것. 행여 오래전, 독립된 탐라를 기대하는 것이냐고 물었다. 그렇다면 더더욱 새로운 왕은 탐라 사람이어야 하지 않겠냐고 덧붙였더니. 

“왕은 하늘에서 내려주는 거외다.”

왕의 자리를 본디 하늘이 정해놓은 것. 그 말은 분명 옳다, 하지만 내가 여태까지 봤던 김통정의 품행을 되짚어보자면, 고개를 절로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조금 더 과거로 거슬러보자면, 대몽항전이 한창이었을 때도 그의 활약은 조정에서 전혀 알 수 없었다. 분명 별초군들이 맹활약을 펼친 건, 지금 조정에서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 배중손의 그림자가 너무 컸었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걸출한 인물이었다면 분명 한두 번 이름이라도 들어볼 법했으나. 조정은커녕 도성 곳곳에서 승전보가 들려왔을 때도 그의 이름은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그만큼 존재감이 없는 장수가, 그저 진도에서 겨우 살아났단 이유로 현재 삼별초의 수장이 되었고, 이젠 나라를 세우겠다고 구체적인 계획까지 흘리는 형국이다. 

조정에 잠시 몸담았던 나로선 더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이었다. 분명 삼별초가 끝내 조정과 갈라선 건, 원에 절대 무릎을 꿇지 않겠다는 명분이 아니었던가? 그의 얘기를 곧이곧대로 믿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난 요구하였다, 김통정을 직접 대면하지 않고선 어떤 협조도 할 수 없겠다고. 

과연 내 요구사항이 제대로 받아들여질까, 내심 걱정스러움도 있었지만. 예상과 달리 그가 빠른 시일 안에 자리를 마련해보겠다고 했다. 정말 며칠이 지난 밤, 그가 나를 따로 불러내었다. 함께 성 바깥으로 나가자, 낯선 자들이 기다리고 서 있었다. 어둠 속에서 그들의 얼굴을 제대로 볼 새도 없이 얼굴이 가려졌고, 뒤통수를 습격한 뭉툭한 충격으로 잠시 정신까지 잃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땐, 사방에서 밝은 불빛이 잠시 시야를 가렸다. 그것도 잠시, 다시 눈을 비비며 살펴보니 내 앞에는 탁자가 놓여 있었고 마주 앉은 사람은 다름 아닌 김통정이었다. 이 와중에 놀란 건, 굳이 여기가 어딘지 숨기려 해도 아는 공간이었다. 게다가 김통정은 군복이 아니라 때깔이 고운 의복 차림이었다. 구석구석 새겨진 화려한 문양이며, 얼굴과 팔 곳곳에 있는 장신구들은 순간, 그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 할 정도였다. 

“그동안 신수가 많이 상했소이다, 큰일을 해주신다는 얘긴 계속 듣고 있었습니다.”

방 안에는 김통정과 나, 단둘만 앉아 있었다. 문밖에는 나를 데려온 자들은 물론이고 누구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어디서 생겼는지 알 수 없을 온갖 장신구들로 가득했다. 칼과 무기들도 여러 종류로 한켠에 자리를 잡았고, 고풍스러운 그림도 여러 점 눈에 띄었다. 순간 이곳이 탐라를 벗어나지 않았나 착각할 정도였다. 

“정중하게 모셔오라 일렀건만, 수하들의 결례를 너그러이 헤아려주시지요.”

그는 내 앞에 놓인 찻잔을 가득 채워주었다. 자신이 먼저 한 모금하더니 애써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일단 나도 별다른 도리 없이 미소로 화답하였다. 그러고도 한참을 별다른 얘기를 나누지 못하고 애꿎은 차만 연거푸 비우기 마련이었다. 

“나를 보자고 하여, 무슨 긴히 할말이라도 있는 줄 알았소.”

결국 그가 입을 뗐다. 물론 나야 할 말은 많았지만 선뜻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었다. 조금 더 침묵을 지키자, 다시 그가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동안 삼별초는 고려군에 대한 반격을 준비했었다는 얘기로 시작하여, 현재 탐라는 아주 평온한 상황이란 점까지. 현재 돌아가는 상황을 그의 입을 통해 들을 수 있었다. 그다음 얘기가 귀를 더 세우게 하였는데, 내용인즉슨 원나라 군대와 현재 고려 조정을 몰아낸다 해도 누가 통치할지 알 수 없다는 것. 지금으로서 탐라에 함께 내려온 삼별초 일행만 믿을 수 있다고 했다. 안타깝게도 삼별초와 뜻을 함께하는 왕족은 없고, 누군가 그 자리를 있어야 할 터인데. 

“그리하여 마땅한 사람이 올 때까지 봉사를 하고자 하오.”

자세한 얘기를 더 들어보니, 먼저 확실한 건 당장 건국의 뜻은 아니었다. 물론 내게 대놓고 그런 뜻을 못 밝힌 것일 수도 있겠지만. 번뜩 들어오는 의문과 달리 김통정은 군인으로서 끝까지 자신의 임무를 다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그런 의미에서 내게도 자신과 같은 애국의 충정을 보여달라고 요구하였다. 어떻게 보면 지금도 의지와 큰 상관없이 그들을 위해 축성 작업에 동원되지 않았던가, 여기서 무얼 얼마나 더 해달라는 얘긴가. 

찻잔을 한 번 더 비우고, 고개를 내저었다. 여기서 내가 더 이상 해줄 수 있는 일이 없다고. 그러나 그의 생각은 좀 달랐다. 분명 군사와 부역자로선 활용 가치가 없다는 점, 충분히 인정한다고 했다. 그러나 삼별초 내부에서는 문관의 업무를 확실하게 처리할 사람이 없는 상황이었다. 물론 지금도 탐라 성주청에 있던 자들이 돕고 있지만, 앞으로 큰일을 치를 때 체계적인 일은 불가능한 건 사실이었다. 나 역시도 잠깐 군감으로서 일할 때만 해도, 체계가 전혀 이뤄진 건 사실이었다. 그걸 내게 총괄해서 맡아달라는 부탁이었다. 

“지금까지 우리의 인연이 앞으로 운명 아니겠소이까?”

어느덧 잔을 채우는 건, 차가 아니라 술로 변해있었다. 나도 그 잔을 계속 비우고 채우기를 반복하였다. 분명 얼굴부터 온몸에 취기가 달아올랐지만, 좀처럼 머릿속은 정리할 수가 없었다. 그의 손을 잡으면 내게 돌아오는 건, 그럴싸한 관직과 앞으로 완성할 내성에 있는 집 한 채 정도였다. 내색하진 않았으나 딱히 당기지 않은 조건이었다. 잔을 한 번만 더 비우고 일어나려고 했으나, 조건을 하나 더 걸었다. 앞으로 여기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마음껏 기록해도 좋다는 것, 그건 오히려 자신이 더 원하는 부분이라 하였다. 그에 따른 편의는 최대한 제공할 의지가 있다고 밝혔다. 

“대신 한 가지 해줘야 할 일이 있소이다.”

며칠 있으면 육지로 군사들을 보낼 작정인데 함께 나가서 상황을 아주 객관적인 시선으로 담아달라는 것. 아무래도 삼별초 군사들은 자신들이 유리하게만 볼 것이고, 지금과 같은 상황이면 그게 독으로 돌아올 것이란 판단이었다. 나를 육지로 내보낼 생각까지 하다니, 이 부분은 상당히 의외였다. 눈만 끔뻑이는 내게 잔을 가득 채워준 그, 웃으며 먼저 자신의 잔부터 비워냈다.

“그만큼 내가 그대를 믿겠다는 뜻이오.”

깊어지는 밤만큼이나 그와 나누는 술잔은 더 바빠졌고, 분위기가 점점 더 무르익었다. 취기가 온몸 구석구석 파고들 때쯤 난 탁자에 얼굴을 묻고 잠들고 말았다. 깊은 잠이 들기 바로 직전, 나도 모르게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다음날, 눈을 떴을 땐 낯선 방에 누워있었다. 푹신한 이부자리가 몸을 덮어준 것도 놀랄 일이었지만 내 곁엔 낯선 여인네가 곤히 잠든 게 아니던가? 깜짝 놀라 얼른 일어나보니, 내 몸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상태였다. 같은 이불을 덮은 여인도 이불 바깥으로 슬쩍 드러난 몸이 나와 같은 상황으로 보였다. 서둘러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내가 입었던 옷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내 머리맡에는 가지런하게 개켜둔 낯선 옷 한 벌이 보였다. 그리고 서찰 하나가 함께 있었는데 김통정이 남긴 것이었다. 지난밤, 마음을 나눌 수 있어서 흥겨웠단 얘기와 작은 선물도 남겼단 내용이었다. 정신 제대로 차릴 새도 없이 서둘러 옷부터 챙겨 입으려는데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바로 곁에서 곤히 자고 있는 줄 알았던 여인 말이다. 지난 기억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은데, 지금 이 상황 어찌한단 말인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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