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영민 역사장편소설

지난밤 기억을 애써 떠올렸으나, 애써 지우고만 싶었다. 그러기엔 나와 함께 몸을 일으킨 여인의 눈빛이 너무나도 그윽하여, 오히려 선명해지고 말았다. 취기가 온몸에 감돌 즈음, 김통정이 친히 부른 몇몇의 여인 중 한 사람이었다. 술잔을 수차례 비운 뒤에야 김통정은 자리를 비웠고 나와 여인만이 남아 있었다. 

그땐 무슨 생각이었는지, 괜스레 개경에 있는 처를 떠올린 겐지, 여인의 몸에서 풍겨나오는 향을 거부하지 않았다. 단지 거기까지 기억만 겨우 더듬어나갈 수 있었다. 그런데 어찌 된 게, 여인은 그저 나를 멀뚱하게 쳐다보기만 하였다. 나도 마찬가지로 애써 어깨 아랫쪽은 덮고 있던 걸로 꽁꽁 가렸고.

“어디 불편하시옵니까?” 

앳된 목소리였다. 그제야 내 눈에 여인의 얼굴이 제대로 들어왔다. 그리 크지 않으나 청초한 눈매, 살포시 오뚝 선 콧날, 매끈한 턱선, 적당히 살이 오른 두 뺨, 단정하게 묶은 머리카락까지. 그동안 탐라에 있으면서 전혀 볼 수 없는 미색이었다. 어찌 얼굴이며, 이불 바깥으로 드러난 어깨까지 작은 티 하나조차 없을 수 있을까? 감탄도 잠시, 갑자기 뒷목이 빳빳해지면서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어찌되었든, 이름조차 모르는 여인과 지난밤 함께한 것은 사실일 터.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머뭇거리는 내게 여인은 머리맡에 둔 물대접을 건네주고 먼저 일어났다. 미처 가리지 못 한 매끈한 뒤태에 아주 잠깐 침을 꼴깍 삼켰으나, 얼른 머리를 두드리며 물부터 한 모금 얼른 들이켰다.

새로 마련해둔 옷을 챙겨 입고 바깥으로 나가니, 김통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젯밤 술자리에서 봤던 또 다른 여인들이 그의 곁에 바짝 붙어서 눈웃음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면서 나를 위아래로 흘겨보는 눈빛이 예사롭지는 않았다. 여기도 한 번 더 침을 꼴깍 삼켰다가 그만 사레가 들려 기침만 연거푸 내뱉었다.

“지난밤 편안하셨소이까?”

김통정이 내게 찻잔을 권하였다. 여인들을 일단 물리고 단둘이 마주 앉았는데 가장 먼저 나온 얘기가 여인들이었다. 탐라 사람이 아닌 건 확실했다. 처음엔 김통정이 나라를 위해 끝까지 온몸까지도 바치는 충심 높은 사람들이라고만 에둘렀다. 조금 더 자세하게 물어보니, 강화와 진도에서도 함께 있었던 나인들이었다. 진도에서도 왕궁은 따로 존재했으므로 나인들은 제 역할을 묵묵히 하고 있었으나, 용장산성의 함락과 함께 각자 갈 길을 선택한 결과라고. 고려군에 누구보다 빨리 투항한 자들이 있는 반면, 아예 완전히 도망한 자들도 많았다고 한다. 그중에 삼별초와 끝까지 운명을 다하겠다는 자들도 많았다는데, 그중에 여러모로 출중한 자들을 김통정이 친히 데리고 다닌 셈이다.

“확실히 다르지 않소이까?”

김통정은 웃음을 숨기지 않았다. 그리고 지난밤 나와 함께했던 여인은 특별히 신경써서 준 선물이니, 어떻게 할지는 알아서 잘 결정하란 얘기도 보태었다. 개경에 엄연히 나를 기다리는 처가 있다고 밝혔으나, 돌아온 건 김통정의 큰 웃음소리였다. 어차피 돌아갈 수도 없는 그곳에 어찌 계속 미련을 두냐는 것이었다. 여기서 난 그의 눈빛을 다시금 살펴보았다. 분명 고려 조정과 원을 몰아내겠다는 작정은 아니었단 말인가? 그게 아니라면, 나 자체를 앞으로 달리 생각해서 그런 건지. 개경에 미련을 두지 말란 얘기가 오묘한 기운이 깃들었다. 

“난 당신이 상당히 현실 감각이 있는 줄 알았는데, 내가 오해했소이까?” 

조금 전보다 확연하게 어두워진 낯빛으로 나를 흘겨보았다. 찻잔을 반쯤 비우면서 진짜 그의 속마음도 들어볼 수 있었는데. 놀라운 건, 그는 현재로서 고려군과 원을 몰아낼 수 없음을 누구보다 확신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탐라까지 내려오고 이제 육지로 출정까지 계획한 건, 오로지 하나. 최선의 방어를 위함이었다. 분명 육지에선, 저들을 상대할 여력이 안 되는 병력인 건 병법도 잘 모르는 내가 봐도 인정할 부분이었다. 제아무리 국경 너머에서 볼꼴 못볼꼴 고루고루 겪어왔던 삼별초라고 하지만, 현재 남은 병력은 그때의 온전한 전력과 비교가 되기도 했다. 그래서 더더욱 김통정은 내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난 말이오, 여기까지면 충분하외다.”

찻잔을 밀어낸 자리에 지도가 올라왔다. 김통정이 직접 손으로 가리킨 곳은, 진도와 그 근처 지역들이었다. 이곳은 크고 작은 섬들이 많을뿐더러, 배가 없으면 기동력을 쉽게 발휘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무엇보다 이곳 주민들 자체가 삼별초에 상당히 호의적이라고도 한다. 과연 자신의 생각이 곧이곧대로 맞아 떨어진다면, 최소한 남해안 지역만큼은 확실하게 손에 거머쥘 수 있다는 것. 이런 이야기를 듣다 보니, 내가 오히려 김통정을 다시 볼 수밖에 없었다. 탐라에 따로 성을 짓고, 군사들까지 모으는 걸 보니 단순하게 버티기만 할 요량인가 싶었더니. 누구보다 현재 상황을 제대로 파악했고, 그걸로 얼마큼 얻을 부분이 있는지도 제법 정확하게 파악해내는 인물이었다. 이런 자가 그동안 조정의 눈에 띄지 않은 것도 또 한 번 놀랄 부분 중 하나였다. 
  
육지로 출정하는 건, 생각보다 금방 다가왔다. 며칠 정도 김통정과 같은 공간에서 앞으로 구상들을 나누었고, 나와 하룻밤 함께했던 여인에 대해 다시금 고민의 시간도 있었다. 과연 내가 정녕 개경에 돌아갈 수 없을지, 그것도 머릿속 한구석에 자리 잡은 고민이기도 했다. 

어떠한 결론도 내리지 못 한 채, 항구에 마련된 큰 배에 올라탔다. 이것도 김통정과 함께 있는 공간이었다. 군복 차림의 그는 누구보다 기운이 남다른 장수였다. 탐라에서 새롭게 합류한 군사들도 기존 삼별초와 큰 차이를 못 느낄 만큼 용맹스러움이 한껏 묻어나 있었다. 난 배에 올라오면서 다른 배와 같은 배에 있는 군사들을 한 명씩 슬슬 살펴보았다. 어찌된 게 지슬의 얼굴은 좀처럼 볼 수가 없었다.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지?
 
“출정하라!”

김통정의 짧고 굵은 호령에 정말 배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번엔 서너 척의 수준은 아니었다. 항구 끝에서 끝까지 수십 척의 배들이 세워졌고, 배 한 척마다 군사들도 가득 채워져 있었다. 돛이 올라가고 아래에선 노가 나와서 물결을 힘차게 밀어내었다. 솔솔 불어오는 바람이 항구를 벗어나는 배들에게 큰 힘이 되었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도 배가 더 힘차게 나아가는데 한몫 했다. 배에 올라서 탐라 땅과 멀어지는 것 역시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 않았다. 금세 바다 한가운데에 다다랐고, 놀랍게도 파도나 거센 바람들이 길을 막질 않고 풍향이 딱 육지로 향하였다. 

며칠 밤낮으로 군사들은 딱딱 시간에 맞춰 임무를 교대하였고, 별다른 문제를 일으키지도 않았다. 나도 너무나도 배에서 하루하루 무탈하게 보내었다. 다만 걱정스러운 건, 김통정이었다. 밤낮으로 뱃머리를 맴돌곤 했었는데 좀처럼 잠을 자지 않았다는 것. 주변 군사들에게 물어보아도 밤새 한숨도 잠을 청하지 않고 뱃머리를 지키고 있었다는 것. 하루이틀 지켜보다 못해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그저 웃으며 어깨를 툭툭 두드려줄 뿐이었다.   
 
나흘째 아침을 맞이한 항해에서 드디어 저 멀리 어렴풋하게 육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주변에 크고 작은 섬들도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어디냐고 물어봤더니.

“저곳에 폐하가 잠들어 있소이다.”

다름 아닌 진도였다. 김통정이 어째서 한숨도 잠을 청하지 못 했는지, 짐작해볼 수 있었다. 이 순간, 나도 모르게 이상하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드디어 탐라를 벗어난 곳에 발을 붙일 수 있단 말인가? 

우리가 탄 배는 주변에 보이는 섬들 중 가장 큰 곳으로 향하였다. 정박할 수 있는 항구가 하나 있다고 했으나, 그곳엔 이미 우리를 기다리던 또 다른 배들이 죽 늘어서 있었다. 그들은 모습을 드러내자 움직이기 시작했다. 김통정은 마른침을 한 번 삼키더니, 허리춤에서 곧장 칼부터 꺼내들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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