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름 아닌 김통정이었다. 싸늘히 식어서 비린내까지 풍기는 별동대장을 내려다보더니, 고개를 천천히 내저었다. 자신의 칼을 뽑아들더니, 이미 푸른 기운이 드러난 그의 왼쪽 가슴을 깊게 푹 찔렀다.

“고생하셨소.”

내겐 한마디 남기고는 먼저 발을 돌렸다. 그를 따르는 군사와 함께 용장산성에서 빠져나왔다. 군영으로 돌아와서도 김통정을 비롯해 다른 군사들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나와 함께 다녀왔던 별동대원들도 마찬가지로 놀란 눈치였지만, 애써 태연하게 각자의 자리로 복귀하였다. 며칠이 지나도록 김통정은 따로 어떠한 명도 내리지 않았다. 그저 용장산성 주변만 수시로 정찰을 보내긴 했으나, 새로운 소식은 없었다. 

이쯤되니 군사들 사이에서도 여러 말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용장산성에 역병이 돌았다는 것부터, 숨은 고려군이 너무 많아서 들어갈 엄두도 못 낸다거나, 다른 지역에서 지원군이 오고 있다는. 어디 하다 확실하지 않은 얘기들이 제법 적지 않게 돌고 있었다. 

그럼에도 김통정은 침묵을 며칠 더 지켜나갔다. 이를 보다못한 몇몇 부장들이 친히 김통정을 찾아갔으나 돌아온 건, 잠자코 가만히 있으라는 고함뿐이었다. 그리하여 나 역시도 따로 김통정을 직접 찾아갈 엄두를 내진 못 했다. 그렇다고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순 없는 게 현실이었다. 당장 군량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소식에 군사들의 동요는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당장에라도 용장산성을 함락하겠다는 부장들도 하나둘 나서기도 하였으나.

정작 김통정은 말을 아낀 채, 주변에서 최대한 식량을 조달해보라는 명만 내린 채 자신의 막사로 돌아갔다. 그러나 제아무리 구해본다 한들, 용장산성과 인근 지역에는 마땅히 식량을 구할만한 곳이 없었다. 기껏해야 산짐승이나 바다에서 물고기를 잔뜩 잡아오는 게, 큰 수확이라면 수확이었다. 그걸로는 모든 군사를 먹이기엔 턱없이 부족하였고, 더 멀리 다녀올 수도 없었던 터였다.

“아무래도 눈치를 챈 모양입니다.”

별동대원이었던 한 사람이 늦은밤에 나를 찾아왔다. 애써 티를 내지 않는다 하나, 별동대원들은 모두 하나 같이 김통정의 움직임에 상당히 예민하게 촉을 세우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도 딱히 김통정과 삼별초를 어떻게 해 볼 묘안은 없던 터였다. 그저 나처럼 그들의 움직임을 그저 지켜보는 게 전부였다. 설령 눈치를 챘다해도, 시간만 그저 흘려보내는 상황에서 나랑 별동대원을 뭘 어떻게 하겠는가. 이 부분에서는 오히려 정처없이 흐르는 시간은 큰 도움이기도 했다. 

분명 그가 말을 걸었으나, 애써 외면하고 일부러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아무리 김통정이 막사 밖으로 나오지 않다치더라도, 그의 수하들은 군영 곳곳에 시퍼렇게 눈 뜨고 나를 지켜보지 않겠는가? 저들 사이에서도 분명 어떤 얘기가 나왔겠지만, 그 내용은 좀처럼 내 귀에까지 들어오진 않았다. 용장산성에 다녀온 이후, 김통정과 가까운 군사들이 일부러 거리를 두는 건 이미 눈치를 채고 있었으나, 저들이 일부러 티는 내지 않으려 아주 애쓰고 있었다.

거의 열흘쯤 될 무렵, 드디어 김통정이 모든 군사를 불러모았다. 아주 이른 새벽이었으나, 군사들의 움직임은 여느 때보다 아주 빨랐다. 완전하게 무장한 상태로 나타난 김통정에게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가 “돌격하라!”는 한마디면 바로 용장산성까지 화살처럼 날아갈 기세였다. 그러나, 김통정은 군사들을 두루두루 살펴보더니 한숨부터 깊게 내쉬었다. 

“용장산성에 들어가지 않겠다.”

순간, 군사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중엔 자신이 목숨 걸고서라도 용장산성을 함락하겠다는 부장들이 있었으나, 김통정은 모두 고개를 내저었다. 대신 지금부터는 주변 지역을 빠르게 장악하라는 새로운 명을 내렸다. 지금 모인 군사들을 셋으로 나눠서 육지와 바다를 한꺼번에 최대한 끌어오라고 하였다. 이번처럼 절대 시간을 끌어서 안 된다는 말에, 군사들은 힐끔 쳐다보았지만 재빨리 움직였다.

삼별초는 좌군, 중군, 우군으로 나뉘었다. 나는 김통정과 함께 중군에 속하였다. 군사의 규모로 봤을 땐 가장 적었으나 대신 김통정을 늘 지키던 수하들이 대부분이었다. 그중 일부는 용장산성 입구를 지켰고, 군영은 조금 더 산성과 떨어져서 새로 구축하였다. 그런데 어찌된 것인지, 좌우군과 달리 딱히 움직임이 없었다. 몇 개 조를 편성하여, 한 번씩 주변만 둘러봤고, 행여나 무력 충돌 상황이 발생하면 무조건 피하라는 명까지 내린 상황이었다. 이 상황을 보다못해 김통정을 직접 찾아갔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수하들을 모두 물리고, 탁자에 마주 앉게끔 하였다.

“어인 일로, 바쁘신 분께서 행차하셨나이까?” 

평소와는 다른 말투였다. 나를 보는 눈빛도 전과는 확연하게 달라져 있었다. 등골에 갑자기 땀이 한 방울 맺혀서 천천히 흘러내렸다. 순간, 어떤 말도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었다. 그러나 김통정은 차분하게 찻잔을 비우더니 내게 권했다.

“어차피 다 짐작하던 터였소. 너무 놀라진 마시고.”

그가 채워준 차를 조금씩 비우면서, 무얼 원하는지 차분히 들어보았다. 딱히 내게 원하는 게 있진 않았다. 다만, 용장산성에 숨은 고려군이 언제쯤 나올지 그게 조금 궁금하다는 뜻을 내비쳤다. 이건, 나도 몰랐던 부분이었다. 그들이 나를 만나고 사라진 것만 보았을뿐, 산성 어딘가 숨어있으리란 생각은 미처하진 못 했다. 그러나 김통정은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내 말을 믿지 않았다. 애초부터 나 자체를 믿지 않았겠지만, 지금의 대화에선 그렇다.

“나도 여기서 너무 시간을 끌었단 생각이 듭니다. 정녕 내가 먼저 움직여야겠소?”

여기선 대답 대신 남은 찻잔을 마저 비워냈다. 김통정은 코웃음과 함께 다시 빈 찻잔을 넘치도록 채워주었다. 그러면서 함께 만들어갈 고려를 생각해보지 않았냐고 물었다. 글쎄, 내가 과연 그와 어떤 고려를 만들어나간단 말인가. 전쟁이 끝나고 정사를 돌보려면 혼자만의 힘으로 절대 부족하니, 그만 흔들리고 이제라도 제대로 손을 잡아달라고 정중하게 부탁까지 하는 그였다. 분명 그의 허리에는 칼이 있었지만, 그쪽으로는 전혀 손끝 하나, 눈짓 한 번 주지 않은 채였다. 내가 무얼 하길 원하냐고 물었더니, 바로 탁자에 지도를 펼쳤다. 그리고 용장산성과 그 주변 몇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들을 내보내주시오.”

나도 모르게 눈이 동그래졌다. 도대체 내가 무슨 힘으로 고려군을 물린단 말인가. 오히려 되묻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이미 김통정은 막사 바깥에 사람들을 몇몇 준비 시켜놓았다. 바로 나와 함께 돌아온 별동대원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양팔이 몸에 꽁꽁 묶여 있었고, 입은 재갈을 물렸고 눈까지도 검은천으로 가린 상태였다. 애써 몸부림을 치고 있었지만, 끌고 온 군사들의 발길질 한 번에 맥없이 푹 주저앉고 말았다. 김통정과 그들을 번갈아쳐다보았다.

“원래는 사지를 찢어야겠지만, 멀리 떠나는 길 성의라도 보여드려야겠지요?”

김통정은 직접 내 손에 줄을 갖다주었다. 그들을 하나로 묶은 것인데, 곧장 용장산성으로 들어갔다 오라는 건. 그 입구까지는 군사들의 호위가 있을 것이니 안전은 너무 걱정말라는 얘기가 따라왔다. 다시 몸을 힘겹게 일으키는 그들의 모습에 여러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바로 그들을 군영 바깥으로 끌고 나왔다. 양쪽으로 호위하는 군사들과 함께 용장산성까지 쉬지 않고 곧장 걸어나갔다. 중간중간 빠져나가려는 몸부림은 양쪽에서 금세 해결해주었고, 성문은 입구를 지키던 다른 군사들이 직접 열어주기도 하였다. 도대체 김통정은 어디까지 어떻게 생각하고 있단 말인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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