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영민 연재소설

▲차영민 역사장편소설<펜안허우꽈?>. ©Newsjeju
▲차영민 역사장편소설<펜안허우꽈?>. ©Newsjeju

성문이 열렸다. 누구도 이곳을 지키진 않았다. 여기까지 함께 온 삼별초 군사들만으로도 충분히 성벽까지도 장악하고도 남을 정도였다. 하지만 삼별초의 움직임은 딱 거기까지. 지나온 길은 빙 둘러서 완전히 막아버린 채, 저들이 손수 열어둔 성문 안으로 들어가라고 손짓하였다. 달리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나와 별동대원들은 성안으로 순식간에 들어오고 말았다. 동시에 성문이 굳게 닫혔고, 자신들의 기별할 때까진 절대 나올 생각은 하지 말라는 목소리가 바깥에서 들려왔다. 

점점 멀어지는 말발굽 소리를 잠시 듣다가 내 손에 꽉 쥔 줄부터 놓았다. 그 줄에 꼼짝없이 묶여 있던 별동대원들은 재빠르게 풀어서 나왔고, 거친 숨과 걸쭉한 침을 바닥에 쏟아냈다. 좀처럼 숨을 쉬기 어려운 건, 비단 여기까지 오는 과정이 고된 건 아니었다. 들어온지 얼마 안 됐으나 벌써 우리의 목을 조이는 역한 냄새 때문이었다. 너무나 진했고 어디서 풍기는 건지 전혀 감을 잡을 수조차 없었다. 약간 움직임에도 더 속이 울렁거렸고,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을 지경이었다. 심지어 눈도 구석구석 간지럽더니 따갑기까지 했다. 

“저놈들, 무슨 수작인 건지.”

김통정의 손에 죽은 별동대장 다음으로 나이가 많은 대원이 먼저 입을 열었다. 삼별초가 포박할 때 제일 많이 저항하였고 그만큼 온몸 구석구석이 시퍼런 멍과 핏자국으로 가득한 모습이었다. 나를 포함하여 함께 모인 사람 중엔 가장 몰골이 흉했으나, 먼저 정신을 차린 건 바로 그였다. 다른 사람들이 여전히 숨을 헐떡일 동안, 그는 직접 성벽 위를 재빠르게 뛰었다가 내려왔다. 그의 말에 따르면, 삼별초는 성문 앞을 꿋꿋하게 지키고 있었다. 그것도 언제든 개미 한 마리라도 보이면 뭐든 날려버릴 태세로. 우리가 들었던 멀어진 말발굽 소리는 그저 다른 군사들이 오기 위한 신호였을 뿐이라고 했다. 

우리가 다시 성문을 열고 나갈 겨를은 아예 없는 셈이었다. 결국 성안으로 깊숙하게 더 들어가기 시작했다. 지난번처럼 여전히 곳곳에 민가들이 형태는 온전했으나 인기척은 오히려 더 찾아낼 수가 없었다. 드문드문 방문이 활짝 열린 집도 있었고, 어떤 곳은 마당에 풀이 사람만큼 높게 자라기도 하였다. 과연 성안에서 누가 있단 말인지. 의아함이 머릿속에 들어오려고 할 때, 목소리를 들었다. 분명한 건, 삼별초 군사들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고려군도 아닌, 노인들이 한데 모여 있었다. 일단 일행과 재빠르게 몸을 근처 담장에 숨기긴 했으나, 어스름한 달빛에 비친 그림자만큼은 숨길 수 없었다. 갑자기 목소리가 잦아들더니, 우리 쪽으로 발소리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어디서 온 사람들이오?”

결국 사람들과 정면으로 마주치고 말았다. 분명 목소리로는 노인 서넛 정도였지만, 정작 우리 앞에 모인 사람들은 열댓 명은 한참 넘어보였다. 거기다가 어디서 나왔는지, 사방에서 낯선 자들의 모습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졸지에 우리는 완전히 포위된 모습이었고, 저들 중엔 죽창과 도끼를 든 자들도 몇몇 보였다. 서둘러 우리에게 먼저 말을 건넨 자를 향해 다가갔다. 먼저 우리의 소속부터 밝히자, 사방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다시 사실상 고려군과 함께한다는 얘기를 덧붙이자, 더 크게 술렁였다. 

“그래서 안으로 들어온 이유가 뭐요?”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여기 모인 사람 중 가장 주름이 깊고, 비쩍 말았으나. 목소리만큼은 여느 장수 못지않게 힘이 가득 차 있었다. 살짝 굽은 허리와 떠는 다리와 달리, 오히려 젊은 우리를 더 숨죽이게 하는 기세가 만만찮았다.

고려군을 완전히 몰아내는 목적으로, 온 거긴 하지만. 김통정의 뜻을 밝힐 순 없었다. 내가 그걸 원하지도 않거니와,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고려군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조금은 의아하다면, 자세히 살펴보니 우리를 둘러싼 사람들은 모두 노인이었고 거기다가 남자들이었다. 아무리 눈을 비벼도 여인네의 머리카락조차 안 보였다. 

“네놈들이 어느쪽이든 우린 상관 없긴 하지.”

그의 손짓 하나에 사방이 갑자기 분주해졌다. 돌멩이, 대나무, 반쯤 꺾인 칼, 곡괭이, 낫, 도끼, 시뻘겋게 물든 굵은 줄까지. 원래 용도는 달리 만들어졌을지언정, 이 순간만큼은 딱 하나의 목적만이 보였다. 우린 서로 등을 맞대고 둥그렇게 뭉쳤다. 점점 다가오는 그들을 향해 먼저 발길질로 위협은 해보았으나. 별로 시큰둥한 눈치였다. 그들의 눈동자는 대부분 뒤로 완전히 뒤집힌 것이나 다름 없었고, 무엇보다 풍겨나오는 냄새에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주춤거릴 여유는 없었다, 당장 발 앞에 큰 돌멩이 하나가 툭 하니 떨어졌다. 물론 당장에라도 뚝 하고 부러질 듯 가느다란 팔로 던질 수 있을지, 의문이었으나. 우릴 충분히 위협할 수준이었다. 그 다음, 끝이 뾰족한 나무 막대기가 날아들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내 옆에 붙어있는 자가 딱 붙잡았다. 그걸 그들에게 도로 겨누면서 조금은 더 주춤거리게 할 순 있었다. 

하지만 바로 내 어깨를 아슬아슬하게 스치는 칼에 멈칫하고 말았다. 빗나가긴 했지만 절대 무시못할 수준이었다. 오히려 사방에 둘러싸여서 저들이 제대로 못 던지는 건, 아닌지라고 중얼거리듯 말하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때마침 줄 하나가 우리 쪽으로 날아오기에, 아예 먼저 한 발자국 나가서 낚아채버렸다. 그나마 우리 중 몸집이 크면서도 날렵한 자가 있었다. 삼별초 군사들에게 호되게 두드려 맞은 터라, 원래만큼은 못 하더라도 줄을 던진 자에겐 큰 위협은 줄 수 있었다. 잠시 줄이 팽팽해지는 듯했으나, 결국 우리 쪽으로 줄이 완전히 넘어왔다. 

“제가 퇴로를 마련하겠습니다. 얼른 움직이지요.”

줄을 잡은 자가 속삭였다. 바로 자신과 마주한 노인의 목을 줄로 칭 감더니 자기 쪽으로 끌고 와 버렸다. 그거 하나로 수세로 몰린 건, 오히려 그들이었다. 얼굴이 점점 시퍼레지는 노인을 보며, 우릴 둘러싼 사람들의 간격이 점점 멀어지면서도 벌어지기 시작했다.

“네놈들이 여길 살아서 벗어날 수 있으랴!”

조금 전, 우리에게 먼저 말을 걸었던 노인이 자신의 칼을 내던졌다. 그러나 그건 줄에 걸리더니 맥없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우리 쪽 다른 사람이 칼을 재빠르게 잡더니, 오히려 그들에게 달려드는 시늉까지 선보였다. 이제 우리 쪽에 공간이 확실하게 넓어졌다. 저들이 던지는 무기들은 발 앞까지 닿지도 못 한 채, 맥 없이 떨어졌고. 그건 오히려 우리가 주워서 다시 저들에게 휘두르는 지경이 되었다. 

“절대 여기서 내보낼 수 없다. 지금이라도 무릎을 꿇는다면, 고통 없이 보내주마!”

그 노인은 말투만 큰 위협이었을 뿐, 정작 자신은 점점 더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목에 줄이 감긴 노인이 팔을 바닥으로 늘어뜨리자, 저들은 술렁이면서 더 멀어졌다. 우린 그걸 토대로 조금씩 조금씩 성안으로 더 깊숙하게 들어갈 수 있었다. 

“어째 좀 찜찜하지 않소이까?”

노인들에게서 완전히 벗어나자, 줄을 쥐고 있던 자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건 그랬다, 아무리 노인들이지만 한꺼번에 움직이는 태세가 아주 질서정연했다. 심지어 우리를 보내줄 때조차 그들만이 주고받은 신호가 있었다. 저들을 조종하는 배후 세력은 좀처럼 짐작하긴 쉽지 않았다. 고려군과 삼별초를 모두 증오하는 세력이 어디 또 있단 말인가.

우리가 걷고 또 걷다가 당도한 곳은, 궁으로 사용했던 곳이었다. 지난번처럼 행여나 고려군을 다시 만날까, 싶었으나. 막상 내부를 두루두루 살펴보니, 들짐승이 파헤쳐놓은 듯 어디 하나 성한 구석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모든 건물에 문은 부서져 있었고, 심지어 불에 탄 흔적까지도 역력했다. 성문 근처에서 맡았던 것보다 더 지독한 냄새가 코끝을 깊숙하게 파고들었지만. 정작 어디에도 시신 한 구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날은 어둑어둑해지고 어디에서도 식량은커녕 물 한 모금조차 마실 곳을 찾지 못 한 상황이라. 함께하는 일행의 걸음은 점점 느려지기만 했다. 어떻게든 성 밖으로 빠져나가야 한다는 얘기가 나오긴 했지만. 우리 중 누구도 뚜렷한 방도를 떠올리지 못 한 터. 지금으로선 이곳부터 나가봐야 할 상황이었다. 그리고 주변을 두루두루 살피며, 궁 밖으로 나온 순간. 우리 앞을 기다리는 건, 바로 그 노인들이었다. 그것도 아까보다 더 많은 인파가 모여서 오로지 우리만 쳐다보는 것이 아니던가? 이 상황을 어떡하란 말인지! (계속)

▲소설가 차영민. ©Newsjeju
▲소설가 차영민. ©Newsjej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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