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영민 역사장편소설

삼별초, 그들이었다. 그것도 김통정이 직접 군사들과 함께 기다리는 중이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슬며시 웃음기를 띠며 다가오라 손짓하였다. 그러나 내 주변에 있는 노인들의 눈빛이 발목을 꽉 붙들어 맸다. 함께한 일행도 마찬가지로 삼별초와 노인들을 번갈아 살펴보며 우물쭈물 어찌할 바를 몰라하고 있었다. 

“성문이 열렸으니, 속히 들어가자!”

김통정의 손짓에 삼별초 군사들이 한 발자국씩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바로 그때, 나보다 먼저 삼별초를 향해 달려가는 자가 있었으니. 조금 전까지 함께 있던 노인 중 한 사람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진흙을 잔뜩 묻혔고, 오른쪽 다리를 질질 끌면서 천천히 나아갔다. 다가오는 삼별초 군사들에게 오히려 다가가더니 갑자기 입에서 누런 액체를 쏟아냈다. 바닥에 진흙과 뒤덮인 토사물이 조금씩, 삼별초 군사들 발 앞으로 흐르고 있었다.

“역, 역병이다!”

삼별초 군사들은 갑자기 멈춰서더니, 도로 돌아가고 있었다. 김통정도 급히 말 고삐를 바짝 잡아당겼다. 그 와중에 다른 노인들은 보란 듯이, 앞서 나간 사람 옆으로 다가가서 똑같이 토악질을 해댔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나 역시도 속이 울렁거릴 정도였다.  

성문은 분명 활짝 열려 있었으나, 그 누구도 섣불리 다가오는 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앞서 나간 노인들이 점점 성문에서 멀어졌다. 성안에 있던 사람들은 그만하고 돌아오라 했으나, 모두 들은 척도 하지 않은 채 계속 나아갔다. 

결국 삼별초는 군사 대신 그들에게 화살과 창을 내던졌다. 어찌된 영문인지, 그들에게 향하는 무기들은 계속 빗나가는 게 아니던가? 심지어 궁수들이 뒤에서 조준까지 하고 쏜 화살마저도 아슬아슬하게 비껴갔다. 성안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서로 쳐다보며 눈만 끔뻑였다. 결국 한 사람이 쓰러졌는데, 그너머로 활을 집어 든 김통정의 얼굴이 드러났다. 다음 화살을 활시위에 갖다붙이자, 그 곁에 있던 삼별초 군사들도 함께 움직였다.

다시 한 번 화살이 그들에게 쏟아지듯 향하였다. 남은 사람 중 누구 하나도 피할 기미는커녕 오히려 삼별초를 향해 한 발자국이라도 더 다가가려고 했다. 다리에 화살을 맞고 주저앉았는데도 아직은 멀쩡한 팔로 기어서 나아가는 모습까지 보였다. 

“아마 송장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저놈들 발목을 붙잡을거요.” 

성문에 가까이 다가가는 또 다른 노인이 내 쪽을 쳐다보았다. 그렇게 말하는 자신도 역시 온몸에 진흙을 펴바르더니, 심지어 바닥에 흙을 한 입 가득 물기도 했다. 그 모습을 누구 하나 말리지 않았다. 오히려 동참하겠다고 나서는 노인들이 여기저기서 나올 정도였으니까.

그저 성문은 열어두고 역병이 돈다는 사실만 퍼뜨리려고 했으나, 그 방법이 이렇게까지 할 줄이야. 그러나 삼별초는 이보다 더 하지 않으면 절대 믿지 않을 존재라고 노인들은 하나로 입을 모았다. 그 얘기에 도저히 고개를 내저을 수 없었다. 최소한 내가 봤던 김통정은 더 하면 더했지, 절대 덜하지 않은 인물은 맞으니까.

가장 먼저 삼별초에게 다가갔던 노인들이 모두 쓰러지자, 다시 몇 명의 노인들이 성문 앞에 모여 서로 흙을 발라주더니 아예 달려가기 시작했다. 각자 손에 쥔 돌과 흙덩어리를 던지기까지. 물론 삼별초에게 전혀 다다르진 않았으나 전열이 흐트러진 모습을 보고야 말았다. 특히 김통정이 직접 이끄는 부대가 흔들리는 모습이라, 어쩌면 한 명씩 쓰러지는 노인들의 움직임이 아주 의미없는 선택은 아니었던가?

두 번째로 달려간 노인들이 쓰러지자, 김통정의 부대는 한참 더 뒤로 물러나 있었다. 대신 말을 탄 군사 몇 명만 다시 성문 가까이 달려오더니, 내게 손짓하였다. 성문 밖으로 나가려는 건 막되, 다른 사람들은 뒤로 최대한 물리라는 요청이 함께 따라왔다. 결국 나 혼자 성벽 위로 올라갔고, 스스로 부장이라 밝힌 군사를 내려다본 채 잠시 얘기를 나눴다.

궁금한 건, 그거였다. 정말 여기 성안에 역병이 돌고 있는지, 그 수준은 어느 정도며. 내부에 사람들은 얼마나 남았는지였다. 그 와중에 나를 여기로 밀어넣은 부분은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졸지에 나를 성안 사람들을 대변하는 쪽으로 대하는 모양새였다. 나는 대답했다. 김통정이 원하는대로 성문은 열었노라고. 대신 성안에 역병이 도는 건 사실이니, 판단은 그쪽에 맡기겠다며.

“따로 명이 있을 때까지 성문은 계속 열어두시오!”

부장을 돌려보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함께 성벽에 올라온 노인들이 갑자기 환호를 하기 시작했다. 잠시 뒤로 물러난 줄 알았던 삼별초가 완전히 철수 움직임이 드러났다. 특히 김통정부터 가장 가까운 부장들과 함께 진영에서 먼저 빠져나가는 모습을 분명하게 보았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르자, 삼별초가 있던 자리엔 여기저기 흩어진 잔해물만 어렴풋하게 보였다. 그걸 성벽에서 함께 지켜보던 노인들은 양팔을 하늘 높게 치켜들었다. 

“하늘이 우릴 버리지 않았구나!”

하늘에 이 세상 만물을 관장하는 그런 존재가 있다면. 과연 난 왜 이래야만 하는 건지.
그 사이 삼별초를 향해 갔다가 이 세상과 등진 노인들을 성안으로 모셔왔다. 성문은 여전히 그대로 열어둔 채, 간단히 장례를 치렀다. 그 사이 외부에서 성문 안으로 들어온 자는 누구도 없었다. 들어오지 않을 거라, 생각하면서도 행여나 들어오면 어쩌나 걱정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이대로 시야에서 사라진 삼별초는 지금 어디쯤 가 있을지도 행방이 묘연했다. 

“우릴 진정으로 생각한다면, 여기서 나가주시오.”

그리하여 노인들에게 받은 제안은 이러했다. 우리가 나가서 이 일대 삼별초의 동태를 직접 살펴봐달라는 것. 그만큼 우리를 믿고 싶고, 믿어야만 하는 상황이라던데. 물론 그 반대의 생각으로 강력하게 반대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여전히 우린 삼별초가 심어놓은 간자일 뿐이라지만. 대다수가 그 주장에 힘을 실어주지 않았다. 결국 이들이 어렵사리 마련해준 무기들을 하나씩 챙겨들고 성 밖으로 나오고 말았다. 무기라고 해봐야, 우리에게 들이댔던 반쯤 날아간 칼과 줄이 늘어진 활, 끝이 뭉툭한 창 몇 개가 전부였다. 그나마 없는 것보다 낫지 않을까, 싶은 최소한 성의 표시였다. 

먼저 철수하기 전, 김통정의 부대가 주둔했던 곳부터 살펴보았다. 수많은 발자국과 검게 그을린 나무 조각들 빼고는 별다른 특이 사항이 없었다. 날이 다시 밝아올 때까지 그 일대를 가능한만큼 샅샅이 살펴보았으나 이상하게도 흔적조차 제대로 남은 게 보이지 않았다. 날이 밝고 용장산성 인근부터 살펴보았다. 마을마다 삼별초를 봤다는 얘기만 남았을뿐 어디로 갔을지 짐작조차 하는 이가 없었다. 돌고 돌아서 마지막으로 살펴본 곳은 포구였다. 진도 땅에 당도할 때 들어선 바로 그곳. 분명 수십 우앉아서 점점 거친 춤사위를 펼치는 바다만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도대체 이건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정녕 삼별초가 진도에서 완전히 철수한 건지. 아니면 잠시 급하게 다른 지역에 가야만 했는지. 많은 의문들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마땅한 방도가 떠오르진 않았다. 이대로 각자 흩어져야만 하는 걸까?

자리를 털고 일어나려고 할 때, 저 멀리서 흙먼지가 아주 크고 넓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기마를 앞세우고 뒤따르는 행렬이 결코 적지 않았다. 오히려 김통정이 데려온 삼별초보다 훨씬 더 규모가 큰 부대였다. 흙먼지 사이로 드러난 깃발에 나와 일행은 두 눈이 동그래지고 말았다. 드디어 저들과 만난단 말인가, 드디어!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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