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영민 역사장편소설

▲차영민 역사장편소설<펜안허우꽈?>. ©Newsjeju
▲차영민 역사장편소설 '펜안허우꽈?' ©Newsjeju

파도가 높게 차고 올랐다. 곳곳에 식량과 잡다한 것들을 채워놓은 작은 상선은 물결과 함께 정직하게 움직였다. 난간을 꽉 붙든 나와 일행도 마찬가지로 들이대는 파도에 표정이 급격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특히 상인으로 변장한 고려군들은 더 그랬다. 누가 보면, 난생처음 배에 올라탄 듯 좀처럼 몸을 계속 비틀고 있었다. 

그중에는 아예 엎드리거나 누워서 숨만 겨우 고르는 자들도 적지 않았다. 배가 앞으로 나아갈수록, 조금 전까지 발을 디뎠던 육지가 점점 희미해질수록, 파도는 더 노골적으로 자신의 몸을 들이댔다. 상선은 그저 거친 바람 앞에 낙엽처럼 이리 갔다 저리 갔다 겨우 중심만 잡기 급급한 수준이었다.

급기야 배를 돌려달라는 외침이 있었으나, 선장은 손을 내저었다. 여기서 돌아갔다가는 진짜 다른 데로 돌아갈 수도 있다나. 이미 바다에 운명을 맡긴 지금, 그저 하늘이 잘 보살펴주시길 절이라도 좀 해보라는 게 전부였다. 그것도 시원찮다면 우리 중 한 사람이 친히 바다의 재물이 되어 뛰어들거나. 

바다 한가운데에 접어들면서 사방이 어두워졌다. 하늘은 먹구름이 잔뜩 끼어 미세한 달빛조차 기대할 수 없었다. 거기다가 바람도 제법 세차게 불어오는 터라, 횃불을 켤 상황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배는 멈추지 않고 바다를 가로질렀다. 어둠 속에서 파도는 아주 은밀하지만 거칠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다. 거의 배가 양쪽으로 한 번씩 반쯤 뒤집힐 정도였으나, 금세 중심을 잡는 것만으로도 기가 막힐 정도였다. 그사이 나는 온몸에 짠내를 가득 품었다. 아무리 짜내도 계속 물이 흥건한 터라, 더 이상 짜낼 힘도 없었다. 어깨부터 온몸 구석구석 축 누르는 옷을 두고 갑판에 나와 있었다. 몇몇은 들어오라 했으나, 지금 상황에서는 안팎으로 어디 하나 불안하지 않은 곳은 없었다. 오히려 배가 뒤집히기라도 하면 금방 빠져나올 순 있지 않던가? 물론 무사히 탈출한다치더라도 바다 한가운데에서 어찌 살아남겠냐만은. 

나는 탐라로 향하는 바다를 제대로 보고 싶었다. 처음엔 아무런 정신 없이 어떻게 떠밀려 갔을지 모를 바다 아니던가? 역시는 역시, 오히려 생각보다 더 거친 바다의 포효에 팔다리가 떨릴 지경이었다. 

탐라여, 어찌 길을 쉬이 내어주지 않을 작정이란 말인가. 나라고 어렵게 어렵게 빠져나온, 탐라을 다시 돌아가고 싶겠냐 말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확신이 들었다.  지금 내가 이 바다에 서 있는 건, 결국 탐라가 나를 버리지 않았다는 증거 아니던가? 죽음의 문턱을 반 이상 넘었던 게 어디 한두 번이던가? 오히려 날 집어삼키라 애원해도 저 파도는 덮치지 않을 거란 믿음이 마음 한구석에 싹을 틔웠다. 그래서 더욱더 보고 싶었다. 어둠이 물러나고 다시 햇볕을 머금은 탐라의 바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겐지. 

딱히 특별한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가는 내내 바다는 잠잠할 틈이 없었고, 그 사이 분명 함께 있었던 몇몇은 지나온 바다에 발목이 붙들리고 말았다. 지금쯤 어디로 홀로 항해하고 있을는지. 뒤를 살펴보며 손 한 번 흔들어준 게, 그동안 정을 생각한 나의 최선이었다. 며칠 밤낮으로 몰아치던 바다는, 갑자기 고요함을 품기 시작했다. 하지만 배는 좀처럼 빠르게 나아가질 못 했다. 오히려 그동안 바람 덕분에 생각보다 빨랐을 뿐이라던데. 풍랑보다 가슴을 조이게 하는 고요한 바다였다.

“헌데, 탐라에 어인 일로 가시는 거요?”

선장이 옆으로 다가왔다. 그는 내륙과 탐라를 수도 없이 오가는 뱃사람이었다. 번번이 탐라로 향하다 죽을 위기까지 놓였지만 지금 버젓이 내 옆에 서 있는 걸 보아하니, 그 역시도 나와 같은 운명이란 말인가? 

탐라에는 그저 귀한 물건을 몇 개 팔러 간다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돌아오는 표정은 피식, 웃는 모습이었다. 고려군을 쓱 쳐다보더니 고개를 내젓기까지 했다.

“내가 배를 하루이틀 탄 줄 아시오? 아무래도 상인은 아닌 듯하고.”

그는 이미 눈치를 채고 있었다. 다만 질문을 던졌으나 굳이 내게서 대답은 듣지 않았다. 대신 탐라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은 곳임을 한 번 더 속삭이듯 알려주더니 자리로 돌아갔다. 그러니까, 탐라가 절대 만만치 않다는 걸 어찌 모르겠냐 말이다. 
  
바다의 고요함은 채 한나절도 붙들지 못 했다. 금세 사방에서 부는 바람으로 배가 사정없이 여기저기로 흔들렸다. 그 와중에 선장이 직접 쳐다보고 고개를 내저었던 고려군 몇 명이 바닷물로 완전히 빠져들고 말았다. 거기다가 기어이 구하겠다고 나선 고려군 몇몇도 함께 바다에 돌아올 수 없는 기약만 남긴채 함께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저 멀리 탐라가 어슴푸레한 모습을 드러났을 때, 배에 남은 일행은 나를 포함하여 얼마되지 않았다. 그마저도 파도의 공세에 휩쓸려 반쯤 넋이 나간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지금이라도 배를 돌리자면 모른척 돌려줄 수 있는데, 어찌하겠소?”

선장이 다시 한 번 내 옆으로 다가왔다. 이제와서 배를 돌리자니, 조금은 뜻밖이었다. 어느새 포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지만, 배가 점점 천천히 나아가기 시작했다. 거의 멈춘 것과 다름 없을 정도였다. 선장은 갑판에 모인 고려군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다시 내게 물었다. 정말 배를 돌려야하지 않겠냐고. 도대체 왜 그러냐고 했더니, 이번엔 기운이 좋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다, 나 역시도 저 멀리 탐라의 모습에서 묵직한 기운을 느꼈다. 그 사이 어떤 일들을 벌어졌을지, 과연 지슬은 거기서 어떻게 견디고 있을지 궁금했지만 탐라로 향하는 발길이 썩 내키진 않았다. 새삼 저기서 까마귀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고. 비단 선장과 나만의 느낌은 아니었다. 고려군 중에서도 같은 얘기가 나왔다. 여기서 돌아가는 건 어떻겠냐고. 하지만 정말 그냥 돌아갔다가는 항명한 셈이 되는 건 어찌한단 말인가? 팔짱을 끼고 잠시 생각에 빠졌다. 탐라에 반드시 들어가야만 하는 걸까? 

결국 뱃머리를 돌렸다. 식량은 넉넉하겠다, 선장도 돌아가는 바닷길이 좀 더 수월할 수 있겠다고 넌지시 말했다. 출발지였던 진도 말고 곧장 개경으로 갈 수 있겠는지, 물었다. 그는 알 듯 말 듯 입가에 미소만 머금었다. 다시 탐라와 조금씩 조금씩 멀어지고 있었으나, 어찌 된 게 좀처럼 시원스레 나아가질 못 했다. 파도는 비교적 잠잠했으나 바람의 영향이라 했으나, 그렇다 치더라도 너무 안 나가는 것. 선장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그럴 리가 없는데, 라고 중얼거렸으나 지금은 딱 그럴 리에 적합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정작 우리를 놀라게 한 건, 탐라 쪽에서 빠르게 다가오는 배 한 척이었다. 도대체 저들은 누구인가? (계속)

▲소설가 차영민. ©Newsjeju
▲소설가 차영민. ©Newsjeju

 

저작권자 © 뉴스제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