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영민 역사장편소설<펜안허우꽈?>. ©Newsjeju
▲차영민 역사장편소설<펜안허우꽈?>. ©Newsjeju

저들의 시선이 내게로 집중되었다. 숨어서 돌만 던지던 자들도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 숫자가 전혀 적지 않았다. 단순히 머릿수만 따지고 보자면, 여느 부대와 맞먹을 정도였다. 여기서 분명한 건, 이들은 절대 삼별초가 아니라는 점. 그렇다고 딱히 복장이 통일된 건 아니었다. 대부분 거의 몸에 거적데기를 겨우 걸친 수준이었고, 군데군데 상처로 가득한 속살을 전혀 숨길 기미가 없었다. 

내 목소리에 잠시 멈칫하던 저들은 갑자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여기서 갑자기 다른 데로 움직일 상황은 아니었다. 뒤로는 배 한 척 없는 바다, 정면과 양옆으로는 저들의 사정거리에서 안전하게 벗어날 수 없는 공간들만 눈에 들어왔다. 나를 흘기며 계속 속닥거리던 저들 중 한 사람이 앞으로 왔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뒤로 대충 올려 묶고, 직각으로 굽은 허리를 애써 펴는 척 몸을 꼿꼿하게 세우려고 했다. 얼굴은 주름이 가득했는데, 그렇다고 딱히 엄청 연배가 많아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그를 보며 한 발자국씩 뒤로 물러났다. 천천히 내 앞으로 다가오더니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며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누구냐?”

순간, 나는 두 눈이 번뜩하고 말았다. 분명 이건, 탐라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오히려 개경에서 흔히 들을 법한, 다소 지체 높은 어르신의 말투였다. 그렇다고 나머지 사람들의 목소리마저도 그런 건 아니었다. 언뜻 살짝만 들어도 온통 탐라 사람들만 있었다. 그렇다고 삼별초라 하기에는 분명 무리가 있는 형태였다. 일단 내 정체부터 소상하게 밝혔다. 돌아오는 건, 느닷없는 큰 웃음이었다.
 
“그 말을 믿으라는 건지?”

믿지 않겠다면, 또 어찌하겠단 말인가? 애초에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믿지 않기로 작정한 눈치였다. 다만, 내가 탐라의 말을 했던 그 연유가 궁금한 게 저들의 생각이었다. 글쎄, 나도 스스로 내뱉은 말에 어찌 연유를 붙어야 할지 막막할 노릇.

결국 그들의 손에 붙들리고 말았다. 말로는 잠시 같이 가서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자는 거였지만, 두 사람이 내 양팔을 하나씩 꽉 잡은 게 영 묘한 구석이 있었다. 포구에서 산쪽으로 얼마 올라가지 않아, 숲이 우거진 좁은 길목 하나가 있었다. 다른 사람이 먼저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저곳에 과연 길이 있었으리라고 예상조차 못 할 위치였다. 나보다도 훨씬 높은 풀숲을 계속 헤치고 나아가다 보니, 울타리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 안에 집들이 자리를 잡았는데, 한두 채가 아니라 수십 채는 넘었다. 나무와 흙, 풀로 엉성하게 쌓아 올렸지만 그래도 거기서 사람들이 여럿 드나들어도 거뜬할 정도로 견고하였다.

나와 그리고 아직 숨이 붙어 있는 고려 군사들을 보자마자 사람들의 시선이 금세 모여들었다. 그중 몇몇은 바닥에 돌을 집어들기도 했으나, 나를 데려온 사람들이 손짓으로 제지하였다. 금세 몰려든 사람들을 다시 물려내고,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노인의 처소였다. 여기에서 그나마 가장 큰 집이었다. 겉은 쓰러질 듯 흙과 풀로 대충 덧댄 모습이었으나 막상 안쪽에 들어서니 완전 다른 모습이었다. 바닥부터 시작해서 벽과 천장까지 온통 평평한 나무로 받혀졌고. 침소와 옷가지까지 궁궐에서 가져온 듯 호화스러운 물건들로 가득했다. 특히 눈에 띄는 건, 벽 한 구석에 차지한 아주 큰 칼이었다. 칼집에는 용 문양이 선명하였고.

“눈만 멀뚱거리지 말고 거기 앉으시게.”

아직 정신이 깨어나지 못 한 고려 군사들은 이미 다른 데로 옮겨졌고, 나 혼자 노인의 처소에 들어온 상태였다. 여기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누더기 같았던 옷은 어느새 노인의 몸에 걸쳐져 있지 않았다. 고운 때깔의 옷을 갈아입고 나와 마주앉자마자 술잔을 먼저 들었다. 술병과 술잔도 역시 문양부터 범상찮은 기운이 역력했다. 난 그가 건네주는 술잔을 일단은 받아들었다. 먼저 술잔을 비우는 그를 가만히 쳐다만 보고 있었다. 

“뭐가 궁금한 건가, 어서 말해보시게.”

그는 웃고 있었다. 여기서 난 뭘 궁금해야 할까? 머릿속에서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럴 것도 없었다. 이미 그의 입은 알아서 내가 궁금할 부분들을 풀어내고 있었다. 

먼저, 그는 개경에서 내려온 고려군 출신이었다. 장군 직전 자리에서 불미스러운 일로 탐라까지 내려왔다고 하는데. 글쎄, 한창 전란으로 혼란스러울 때 조정에선 어찌 탐라로 내려보냈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탐라 관아의 간섭을 전혀 받지 않은 채, 지금 이곳에서 마을 하나를 꾸리며 지금까지 지내왔다는 것이다. 그러다 삼별초가 탐라를 장악하면서부터 이곳 사정도 영 녹록지 않았다는데. 일단 식량 문제부터 사정이 어려워졌다는 것. 그동안은 탐라 관아의 묵인하에 여기 마을 사람들이 외부 교역을 할 수 있었건만. 지금은 탐라 어디를 가든 삼별초의 영향권에 있는지라 그게 쉽지 않다고 했다.

거기다가 이미 서너 차례 삼별초와 전면전을 치렀던 터라, 마을에 힘 좀 쓴다는 장정을 상당수 잃어버린 상태라고 한다. 물론 아직은 여기 존재를 발각되지 않았으나, 언제든 다시 삼별초와 맞붙을 상황이라던데. 그 영향으로 현재 마을 자체에 무기가 없다고 한다. 

그런데 왜 고려군을 공격했단 말인가. 아무래도 조정이 자신을 압송하리라 오해했던 모양이었다. 그러니, 나의 어설픈 탐라 말에 그 오해를 거두어들인 것이고. 

“그래서 지금 여길 돌아와서 뭘 어쩌자는 건가?”

그가 술잔을 다시 한 번 더 비웠다. 나는 진도에서 있었던 일들을 소상히 얘기해주었다. 이제 고려군이 탐라에 제대로 당도할지도 모를 일이라고도 덧붙였더니, 그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그 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바깥에 있던 그의 수하들이 갑자기 들어올 정도였으니까. 다시 수하들을 바깥으로 내보낸 그는 다시금 술잔을 비웠다.

“고작 그런 군사들로 여길 내려올 수 있을 거 같은가? 그건 안 되지. 혹시 몰라, 오랑캐 놈들을 끌어들이면 말이 달라질 수도 있지.”

난 그의 말 끝부분에 귀가 솔깃했다. 그래, 어쩌면 고려군은 단독으로 움직이지 않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지금 저들이 원하는 건, 고려라는 땅만이 아니라 바다 너머까지 염두에 두고 있지 않던가? 그러려면 하루 빨리 삼별초를 정리해야할 터. 그들까지 움직일 수 있을까? 삼별초는 그것까지 생각하고 있었을까? 갑작스러운 고민에 나도 모르게 술잔을 따라서 비워냈다. (계속)

▲소설가 차영민. ©Newsjeju
▲소설가 차영민. ©Newsjej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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