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영민 작가의 역사장편 연재소설

▲차영민 역사장편소설<펜안허우꽈?>. ©Newsjeju
▲차영민 역사장편소설<펜안허우꽈?>. ©Newsjeju

마을은 조용했다. 말 그대로, 어느 누구도 큰소리조차 내지 않으려 애쓰는 티가 역력했다. 딱히 마을 안에서 큰일이 벌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때가 되면 마을 한가운데에 따로 마련된 공간에서 식량을 나누어줬다. 어디서 구해온 식량인지는 아무도 궁금해하려 하지 않았다. 매번 바뀌는 식량에도 역시 별다른 말이 없었다. 양도 주면 주는대로 조용히 받아갔고, 어쩌다 늦게 나온 사람이 못 받아가는 일이 생겨도 역시 별문제가 없었다. 날이 어두워지면 마을 곳곳에 불을 피웠다. 딱히 누가 다니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집집마다 어둠을 끌어안고 침묵에 충실했다. 분명 아이들이 제법 있었으나, 그 목소리조차 쉬이 들리지 않았다.

“다들 살고 싶어서 그러네.”

노인이 말했다. 마을 사람들은 탐라 곳곳에서 하나둘 모인 것인데. 각자 고려군이든 성주가 이끄는 탐라군이든, 삼별초든 누군가의 손에 죽을 위기에서 겨우 살아왔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동시에 가족을 잃은 것도 같다면 같은 부분이었다. 각자의 힘으로는 절대 이 땅에서 조용히 버텨낼 수 없다는 걸 느꼈던 터라, 이 마을을 선택했다. 노인이 몇몇 사람들을 모아서 만들긴 했으나 일부러 여기저기 알린 건 아니라고 한다. 어느 날 갑자기 죽기 일보 직전으로 마을을 알아서 찾아오는 사람들이 하나둘 모이다 보니 지금의 모습이 갖춰진 것이라고.

“알아서 찾아오는 건 맞네만. 저들이 우리 위치를 알아차린 건 아니지.”

노인은 확신했다. 삼별초든 고려군이든 절대 이곳을 찾아낼 수 없을 것이라고. 선뜻 이해할 수 없는 얘기였지만. 딱히 반론할 내용도 없었다. 여기서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런 현실에서도 마을 사람들은 그저 태평해보일 뿐이었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순 없지.”

노인은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매일 건강한 장정들이 바깥에 나가서 식량과 필요한 것들을 어찌어찌 구해온다지만. 나가는 사람과 돌아오는 사람이 매번 다르니. 설령 돌아온다 해도 크게 다치면 다시 나갈 수도 없는 노릇인지라, 상황이 참 그랬다. 오죽하면 다른 데 갈 곳이 없다면 마을에서 힘 좀 보태달라고 부탁까지 하겠는가. 그런데 진짜 갈 곳이 없는 건, 나에게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몇몇 마을 사람들은 나를 보더니 아주 강하게 손사래부터 했지만, 그것도 잠시. 당장 나갈 사람이 몇이나 되냐는 물음이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결국 마을에 들어온 지 며칠도 되지 않아, 다시 나갈 수 있었다. 나와 함께 온 고려 군사들은 아직 몸이 회복되지 않아 일단 마을에 계속 머무는 걸로 했다. 고려 군사들은 마을 사람들과 나가는 것 자체를 상당히 걱정스러운 눈치였다. 그러나 어쩌겠나, 당장 식량을 구해야 하고 여기에 협조해주지 않는다면 우리 생사가 어찌 될지는 모를 일이었다. 노인이 지금은 그저 좋게 이야기한다치지만, 언제든 우리의 목숨만큼은 거둬들일 위협은 충분한 상황이었다. 애써 그런 모습을 숨기려는 모습이 계속 눈에 걸렸다. 그걸 알아차린 걸 최대한 모른 척하려 애쓰는 나도 마찬가지니까.

마을을 벗어나자마자 보이는 건 온통 숲이었다. 나무도 높거니와 풀들도 사람들보다 훌쩍 큰 것들로 무성했다. 바닥은 질펀한 것이, 나아가는데 좀처럼 중심을 잡기가 쉽지 않았다. 풀이라도 걷어내면 안 될 일이냐고 했더니, 이게 그래도 마을의 존재를 숨겨주는 아주 유용한 방패막이라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마을 사람들은 절대 풀을 완전히 꺾지 않고 조심스럽게 걷어내면서 나아갔다. 그러다보니 얼굴과 목, 팔다리 온몸 구석구석이 풀이 내는 생채기를 피할 수는 없었다.

한참을 걷고 또 걷다 보니 그제야 사람이 다니는 흙길이 드러났다. 그런데 그 길에 아무도 내려가지 않았다. 오히려 그 근처 바위와 나무에 몸을 숨기기 바빴다. 나도 덩달아 근처 큰 바위에 일단 몸부터 최대한 숨겨보았다. 그나마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도대체 지금 뭐하냐는 거냐고 물으니, 조용히 하라며 손사래로 대답이 돌아왔다. 그러고 한참을 기다리자, 저 멀리서 덜커덩덜커덩 마차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어렴풋하게 마차의 그림자가 드러나자, 숨어있던 사람들이 서로 눈치를 살피더니 각자 몸에 지니고 있던 무기부터 들었다. 조용히 숨어 있던 노인이 손짓하자, 사람들은 마차가 시야에 들어오자마자 앞뒤로 쏟아지듯 뛰어 내려갔다.

노인이 다시 손짓하자, 각자 손에 쥔 돌멩이를 내던지기 시작했다. 마차에서 사람들이 떨어지듯 바깥으로 나오자, 곧바로 죽창을 들고 달려들었다. 그 와중에 도망치려던 한 사람은 이미 길목을 지키고 있는 다른 이에게 붙들려 사정없이 발길질을 당하였다. 어느 정도 제압이 되면 노인과 함께 기다리던 다른 사람들이 내려와서 식량과 물건들을 이것저것 챙겼는데. 거기에 나도 속해 있었다. 딱 그 정도만 하고 그칠 줄 알았다. 그런데 노인이 횃불을 챙겨오더니 마차에 불을 붙이는 게 아니던가? 그것도 모자라 말을 도륙하고, 제압했던 사람들도 돌멩이를 던지거나 죽창으로 마지막까지 숨통을 끊어 놓기까지 했다. 

“확실히 처리해!”

노인은 주변을 한 번 더 둘러보았다. 지금 이 자리에서 숨 쉬는 건, 나와 함께 온 마을 사람들이 전부였다. 마차에 있는 사람들은 딱히 삼별초나 관리로 보이진 않았고, 탐라 어딘가에 사는 백성 중 하나로 보였다.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지만. 누구도 문제기를 제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익숙한 듯, 마차에 이어 숨통을 끊어놓은 사람들까지도 노인이 챙겨온 횃불로 금세 잿더미로 만들어 냈다. 그렇게 얻어낸 식량은 사나흘 정도 버틸 수 있는 수준이라고 노인이 넌지시 알려주었다. 순간, 눈 뜨자마자 챙겼던 그 식량들이 문득 떠올랐다. 이런 방법이란 말인가? 

“온다!”

식량을 정리하던 한 사람이 소리쳤다. 땅에는 정말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서둘러 각자 짐을 챙기고 조금 전 숨었던 곳으로 재빨리 되돌아왔다. 그 사이 말발굽 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삼별초 깃발이 드러났다. 마차를 불태웠던 자리에 그들이 멈춰서더니 주변을 살피는 게 아니던가? 나무와 바위 뒤에 숨은 우리는 다시 각자 무기를 꽉 붙들었다. 발소리가 이쪽을 향하려 할 때, 노인이 눈짓으로 신호를 줬다. 그런데 점점 발소리가 가까워질수록 나도 모르게 돌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런데 바로 그때, 저 아래에서 갑자기 비명이 들렸다. 우리를 향하던 발소리도 갑자기 멀어졌고, 칼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서 슬쩍 내려다보았더니. 삼별초 말고 다른 깃발이 나부끼는 게 아니던가? 조금 전까지 현장을 살피던 삼별초는 낯선 자들과 격렬한 전투에 돌입하고 말았다. 그 상대방은 고려군은 아니었다. 말 위에서 칼과 창을 들고 아주 자유롭게 움직이는 그들. 분명했다, 바로 몽골군이었다. 그것도 한두 사람이 수십 명이었다. 어떻게 저들이 여기에 내려왔단 말이지? (계속)

▲소설가 차영민. ©Newsjeju
▲소설가 차영민. ©Newsjeju

 

저작권자 © 뉴스제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