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영민 작가의 역사장편소설

▲차영민 역사장편소설 '펜안허우꽈'. ©Newsjeju
▲차영민 역사장편소설 '펜안허우꽈'. ©Newsjeju

점점 진해지는 피비린내와 함께 눈앞에 삼별초의 깃발이 점점 선명하게 드러났다. 우리는 몽골군을 뒤따라 더 빠르게 발을 재촉하였다. 저들도 분명 보았을 것이다. 흙먼지를 이끌고 거세게 돌진하는 우리의 모습을. 하늘을 찌를 듯 높게 치솟는 말 울음은 줄어들 기미가 없었다. 오히려 그들에게 들으라는 듯, 발굽으로 땅을 거칠게 내리쳤다. 한 발짝씩 내딛는 힘도 만만치 않았다. 조금 더, 조금 더, 조금 더!

입구를 지키는 삼별초 군사의 얼굴이 선명하게 드러날 때쯤에야, 나팔 소리가 울렸다. 그들은 금세 방어 진열을 갖췄고, 군영 한가운데서 화살이 하늘로 치솟기 시작했다. 몽골군은 더 빨리 달리라는 신호를 주었다. 말보다 더 정신없게 달려가는 우리 중 몇몇은 바로 옆을 스치는 화살 세례가 순간 주춤하고 말았다.

“빨리, 빨리!”

몽골군은 조금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와 다소 거리를 두면서까지 그대로 돌진했다. 저들의 화살 방향이 조금씩 흐트러지는 게 보이기 시작했다. 분명 우리 쪽을 향하던 화살이 몽골군으로 바뀌었다. 분명 소낙비처럼 화살을 쏟아냈지만 단 한 명의 몽골군을 쓰러뜨리지 못했다. 오히려 자신들에게 날아드는 창에 하나둘 쓰러졌고, 성벽처럼 견고할 것만 같았던 방어 진영에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 

몽골군은 그 속으로 누군가 끌어당기듯, 조금의 주저함 없이 깊숙하게 파고들었다. 순식간이었다. 그나마 양옆으로 남아있던 방어 진영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중엔 우리 쪽으로 달려오는 삼별초 군사들이 제법 있었는데, 그들 모두 무기를 손에서 내려놓은 상태였다. 그사이 멈춰 있던 우리는 달려드는 그들에게 창을 내밀었다. 눈앞에 검붉은 피가 허공을 향해 흩뿌려졌고 어느새 다시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우리가 삼별초 군영에 다다랐을 때는 이미 몽골군이 여유롭게 내부를 둘러보는 중이었다. 그러다 무너진 막사에 숨은 삼별초 군사를 보더니 사정없이 목을 날려버렸다.

“이리 굼떠서야.”

몽골군 대장이 나와 눈이 마주쳤다. 걸쭉한 침을 바닥에 내뱉었다. 자신의 옆에 있는 횃불을 발로 가볍게 걷어찼다. 그러자 불길이 바닥에 흥건한 기름을 타고 금세 번지기 시작했다. 여기서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주변에 무기나 식량, 의복이라도 쓸만한 건 얼른 주웠다. 그중에 아무래도 내가 제일 열심히 했을지도 모른다. 머리에 투구부터 시작해서 칼도 그럴싸한 걸 주워놨으니까.

불길이 점점 높게 치솟자, 말 울음소리가 다시 하늘로 치솟았다. 부랴부랴 전열을 살피고 몽골군 뒤를 부지런히 따라서 달렸다. 다음 목표는 그리 멀리 있지 않은 또 다른 삼별초 군영이었다. 멀리서부터 우리를 보았을까, 군영에서 수십 마리의 기마 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화살도 하늘을 검게 뒤덮었는데. 몽골군은 이번에도 역시 그대로 돌진했다. 삼별초 기마 군사들도 대차게 달려들었지만. 딱 거기까지, 몽골군의 그림자가 닿자마자 그대로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단 한 명도 남김없이, 딱 깔끔하게 말 위에 군사들만 쓰러뜨렸다. 바닥에 고꾸라진 삼별초 군사들은 몽골군이 이끄는 말발굽에 치여 더 이상 일어나질 못했다. 주인을 잃은 말들은 그대로 우리 쪽으로 달려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삼별초가 쏘아 올린 화살에 하나둘 맥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우리는 아슬아슬하게 그들의 화살 세례 범위에 닿지 않은 채, 쓰러지는 말들을 내려다보았다. 그사이 몽골군은 방패로 견고하게 버티는 진영을 그대로 무너뜨렸다. 두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제아무리 용장산성에서 세력이 꺾인들, 고려에서 무시무시한 전투력을 자랑하는 삼별초가 아니었던가. 몽골군과 끝까지 싸워서도 굴하지 않았던 그들이었건만. 종잇장처럼 무너지는 모습에 괜스레 내 입술이 바짝 메말랐다.

“보통이 아니야, 저놈들.”

내 옆에 있는 자가 손을 떨었다. 나머지도 손뿐만 아니라 눈빛이 떨리는 건 매한가지였다. 삼별초 진영 하나를 나뭇가지 부러뜨리듯 쉽게 내치는 몽골군의 모습은. 분명 우리를 사로잡을 때보다 더 살기로 가득했다. 그래서일까, 그들의 손짓에 우리는 수족처럼 곧바로 움직였다. 치솟아 오르는 새로운 불길을 올려다보며 우린 다시 움직였다.

그들이 무너뜨리고 우리가 뒤처리를 하고. 고작 한나절 만에 삼별초의 다섯 군영이 사라졌다. 물론 소규모로 편성된 부대들이었지만. 너무나도 손쉽게 무너지는 모습에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이제 몸을 다 풀었구먼.”

날이 저물자, 몽골군이 멈추었다. 우리에게 다가오더니, 자신이 마시던 걸 던져주었다. 시큼한 냄새가 풍겼지만 목이 마른 건 어쩔 수 없었다. 가장 먼저 나부터 목을 축였다. 말 그대로 잠시 적신 수준이었을 뿐. 더 이상 뒤로 넘어가지는 않았다. 도대체 이게 이상한 물이란 말인가. 썩은 내가 그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나머지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개중에는 헛구역질하는 자도 있었으니.

“아직 대원제국의 영광스러운 백성이 되기는 멀었군.”

웃음소리가 밤하늘을 두드렸다. 우리는 그저 고개를 숙였을 뿐이고. 멈춘 자리에서 군영을 꾸리는가 싶었더니 그건 아니었다. 각자 바닥에서 머리만 대고 눈을 잠깐 붙이라는 얘기가 전부였다. 그들은 지금껏 그래왔던 것. 어쩌면 나보다도 더 오래 탐라에 내려왔건만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던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싶었다. 이쯤 되니 궁금해졌다. 이번에 거침없이 삼별초의 모든 부대를 밟고 지나왔다 해도. 이제 성까지 가는 길목은 더 규모가 큰 부대들이 자리를 잡을 터. 특히 새롭게 옮긴 성 주변은 더더욱 방어 체계가 잘 갖춰졌을 텐데. 이대로 김통정까지 노리는 건 아닐까 싶었다.

“우린 여길 점령할 생각이 없어.”

내 눈빛을 읽었을까? 몽골군 중 한 명이 다가왔다. 다시 자신이 마시던 그걸 건네줬다. 찬 바닥에 뉘었던 머리를 일으켜 일단 한 모금 들이켰다. 역시나 적응할 수 없는 오묘한 맛이었다.

“제아무리 오합지졸들이라 해도 우리로는 어림도 없지.”

이들도 알고 있었다. 김통정의 위력을. 점점 다가갈수록 힘에 부칠 테니 우리의 협조가 더욱더 필요하다는 얘기도 함께 건네주었다. 그리고 이들이 진짜 목표는 새롭게 옮긴 성이 아니었다. 다름 아닌 바로, 그곳. 원래 성주청이 있던 그 성이었다. 그것도 역시 만만치 않게 군사들이 주둔했을 것이고, 어쩌면 새로운 성만큼이나 돌파하기 어려울 게 뻔했다.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그러자 몽골군은 품에서 지도를 꺼내더니 손가락으로 성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이곳은 바로 북쪽. 나도 모르게 마른 침을 꼴깍 삼키고 말았다. (계속)

▲소설가 차영민. ©Newsjeju
▲소설가 차영민. ©Newsjej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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