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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영민 역사장편소설 '펜안허우꽈'. ©Newsjeju

눈앞에 불길이 치솟았다. 그곳은 우리가 돌파해야 할 군영 한가운데서였다.

괴성과 함께 삼별초 군사들의 움직임이 갑작스럽게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군영 앞을 지키던 군사들도 금세 자리를 떠났고, 점점 높게 치솟는 불길만이 눈앞에 거짓말처럼 펼쳐졌다.

난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저것은 분명 몽골군의 움직임이 틀림없었다. 분명 삼별초보다 머릿수로 한참 적었지만, 그들에겐 그리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불길이 더 높아지는 거로 보아, 오히려 삼별초 군사들은 불쏘시개 그 역할에 충실해 보였다.

우린 일단 나무에서 나와 군영으로 향하였다. 누구도 막아서는 이가 없었다. 심지어 지나가는 곳에 쓰러진 삼별초 군사 몇몇과 눈이 마주쳤지만. 그들은 숨이 붙어 있었음에도 다시 일어날 기미가 없었다. 오히려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죽은 척하는 자도 있었다. 이것이 분명 나라를 뒤흔들었던 삼별초의 위세였던가.

불길이 치솟는 그곳에는 역시나 몽골군이 삼별초들을 걷어내는 중이었다. 말에 올라탄 그들을 당해낼 군사는 누구도 없었다. 그저 앞에서 얼쩡거리다가 그들이 내미는 칼과 창에 재빨리 쓰러지는 것. 행여나 자신을 지나칠 말에 밟히지 않도록 적당한 자리를 잡아 최선을 다해 눕는 것. 그게 여기 군영에 삼별초 군사들이 보여주는 행동이었다. 몽골군들도 그걸 분명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쓰러진 삼별초 군사에게 창을 내리꽂으려다가, 잔뜩 웅크려 조심스럽게 몸을 뒤집는 모습에 뒤돌아서고 말았다.

“그리 발이 느려서야, 어쩌겠다는 건지!”

몽골군 대장이 저 멀리서 나를 노려보며 목청을 높였다. 난 일단 손을 흔들었고, 재빨리 군영에서 빠져나가는 모습에 서둘렀다. 여전히 양옆으로 삼별초 군사들이 누워 있었고 우리를 발견했지만 일어서지 않았다. 누가 더 잘 죽은 척하느라 내기라도 하듯 말이다.

더 이상 얘기를 꺼내지 않고, 일단 그 군영을 완전히 빠져나갔다. 몽골군이 도착한 곳에 우리도 재빨리 자리를 잡았다. 이곳은 북쪽이었다. 북수구라 불리고, 살아있는 자들이 아닌 저세상으로 떠날 송장만이 나오는 통로였다. 그곳을 지키는 군사들은 분명 몇몇 있었다. 분명 숨은 붙어 있었으나, 자신들의 가슴팍에 깊게 꽂힌 창을 뽑아내진 못 하였다. 그렇다, 몽골군의 손에서 나간 창이었다.

문지기라고 할 것도 없지만, 북쪽 문을 지키고 있던 삼별초 군사들은 늘 자신들이 보아왔던 송장과 같은 모습으로 변해갔다. 눈동자 하얗게 뒤집히자, 몽골군은 우리에게 손짓하더니 먼저 북수구 통로로 들어갔다.

우리도 서둘러 뒤따르긴 했지만. 나오다가 멈춘 송장들 앞에 잠시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그저 성안에 살던 백성들이었다. 너무 늙거나, 너무 어렸고, 야위었고, 곳곳에 상처로 가득한 모습이었다. 오히려 나와 함께 있는 자들이 멀끔해 보일 정도였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그들에게 잠시 눈을 감았다.

미안하다는 말도 함께 내뱉었다. 특히 나는 더 그랬다. 나부터가 무능하여 이리저리 끌려다니다가, 어쩌자고 몽골군과 함께 입성하다니. 나랏일에 벼룩의 간만큼이나 관여하는 나로선 그저 죄스러울 뿐이었다.

탐라도 엄연히 고려의 백성이건만. 어찌 이곳을 이리 만들었단 말인가. 난 이 순간도 절대 잊지 않기로 가슴에 새겼다. 손톱으로 가슴팍을 파내었다. 잊어선 안 될 일이니까.

몽골군과 함께 곧장 성주청을 향해 내달렸다. 삼별초 군사들이 그 앞을 지키고 있었다. 이번에는 기운이 심상치 않았다. 주변 공기가 무거웠고, 백성들의 모습은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눈앞에 펼쳐진 삼별초 군사들 말고도 사방에 살기어린 인기척만큼은 분명 느끼고 있었다.

“이걸 나름 지략을 썼다고 해야 할지.”

몽골군 대장이 주변을 둘러보며 혼잣말처럼 내뱉었다. 이번만큼은 몽골군들도 움직임이 조심스러워졌다. 덩달아 따라온 우리라고 오죽하겠다는가. 손에 쥔 무기라고는 저들을 상대하기에 너무나도 약소하거늘. 그 흔한 갑옷조차 없지 않던가?

먹구름에 달빛이 서서히 가리웠다. 주변을 감싸는 그림자는 분명 늘어났다. 다만 모습을 대놓고 드러내지 않았을 뿐. 꽤 시간이 흘렀지만 몽골군도 그렇고, 삼별초 쪽에서도 어떠한 움직임과 말을 꺼내지 않았다. 다만 저들이 서서히 우리를 좁힌다는 것. 우리 중 가장 둔한 자라도 알아차릴 만큼이었다.

까마귀가 정적을 깨뜨렸다. 어찌나 거칠게 울던지, 괜스레 귀가 간질간질할 지경이었다. 삼별초 쪽에 세워진 횃불 중 하나가 바람 때문인지 갑자기 꺼지고 말았다. 그때 저쪽에서 술렁거림이 약간 있었으나 금방 진정되었다. 다시 목소리를 낸 건, 삼별초 쪽에서 한 사람이 나오면서였다.

“너흰 도대체 누구더냐!”

새삼스러웠다. 정녕 몰라서 묻는 건지, 아니면 직접 목소리고 확인하고 싶은 건지. 오랜 침묵을 깨뜨린 질문치고는 너무나도 쓸모없었다. 그래서였을까, 몽골군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방금 질문했던 그자를 바닥에 쓰러뜨리고 말았다. 바람 소리가 날카롭게 터져 나왔는데, 아무래도 대장이 비수를 던진 모양이었다.

바닥에 턱, 하고 울리는 소리가 들리자 그제야 삼별초 군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방에 그림자만 겨우 숨겨놨던 군사들도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몽골군 대장을 태운 말이 울부짖었다. 앞발을 번쩍 들더니 그대로 돌진하는 게 아닌가. 곁에 있던 다른 몽골군들도 마찬가지였다. 삼별초 군사들이 쏟아져 나오고 일단 막긴 막았으나, 막지는 못 했다. 막으려고 했던 자들은 가차 없이 말발굽에 밟혔고. 양옆으로 나가떨어졌다. 그들이 사라진 쪽은 다름 아닌 성주청 외곽으로 난 길이었다. 그곳은 성주청 사람들만이 아는 비밀스러운 지름길 그 비슷한 곳이었다.

심지어 횃불까지 꺼졌는데 그곳을 향해 재빠르게 움직였고. 모습을 금세 감추고 말았다. 그 사이, 우리는 삼별초 군사들에게 완전히 포위되고 말았다. 잠시 몽골군을 향하던 칼과 창끝은 어느새 우리 쪽으로 방향을 바뀌어 있었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삼별초 군사들은 우리 쪽으로 달려들었다. 반격하자, 막아내자, 도망가자…. 이런 선택권은 우리에게 없었다. 그저 오면 오는 대로 온몸으로 받아내야만 할 상황이었고, 이건 나 혼자만의 생각도 아니었다. 어느 순간부터 우린 생각이 같아졌을까, 손에 쥔 무기를 바닥에 내려놓고 눈을 질끈 감았다.

이러나저러나 어차피 저승에 담보로 맡긴 목숨과 다름없지 않던가? 짧은 순간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저승 구경을 해봐야겠다. 싶었다. 그동안 너무 갈 듯 갈 듯 계속 안 가다 보니, 괜히 안 가서 섭섭한 마음이 들 지경이었다. 내 코앞까지 다가오는 기운에 숨을 꾹 참았다. 아주 잠깐일 거야, 소리 따윈 내지르지 말자. 이가 부서질 듯 꽉 깨물었다. 정작 소리를 내지른 건, 내가 아니었다.

“그만!”

바로 조금 전 말에서 떨어진 삼별초 부장이었다. 어깨에 칼이 박힌 채 우리 쪽으로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난 그 모습에 의지와 상관없이 숨이 턱 막히고 말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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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차영민. ©Newsjej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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