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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영민 역사장편소설 '펜안허우꽈'. ©Newsjeju

처음이었다. 이번에는 정말 죽을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포위망을 점점 좁히던 삼별초 군사 몇몇은 이미 자리에 쓰러져 있었다. 무엇보다 방금 우리에게 소리친 삼별초 부장도 상태가 영 아니었다. 어깨를 관통한 칼이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그 자리에서 쓰러질 것만 같았다. 천천히 한 발자국씩 다가오는 그 걸음이 다른 누구보다 묵직했다. 그리고 괜히 내 숨이 막히는 것만 같았다.

“당신이 누군지 알고 있소.”

그는 내 앞에서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어깨에 박힌 칼은 옆으로 조금 더 비틀어진 상태였다. 숨이 멈춘 모습을 함께 지켜보던 삼별초 군사들의 눈길이 나에게로 바뀌었다. 바싹 마른침을 억지로 삼키었다. 이번에야말로 눈을 질끈 감아야겠다 싶었으나, 그들은 우리에게 칼을 겨누지 않았다. 오히려 부장의 어깨에서 뽑아낸 칼을 내게 건네주었다.

“당신, 고려 사람 아니오?”

얼떨결에 아직 피의 온기가 가시지 않은 칼을 덜컥 건네받았다.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에게도 자신들의 무기를 건네주는 게 아니던가?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서로 목숨을 빼앗으려 싸우던 게 아니었던가! 도대체 이러는 이유가 무엇이냐 물었다. 내게 칼을 건네준 군사가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몰라서 묻는 거요?”

뜻밖의 대답이자 물음이었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보아도, 부장과 눈앞에 있는 삼별초 군사들은 한 번도 제대로 본 적이 없는 초면이었다. 이들은 분명 알고 있었다. 내가 조정에서 온 것과 잠시나마 그들과 함께했었다는 사실을. 오히려 더 놀란 건, 나와 함께 여기까지 온 사람들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 대략 얘기만 들었을 뿐, 삼별초 군사들의 행동에 적잖게 당황한 기색들이 역력했다. 삼별초와 함께 온 사람들 사이에 오묘한 기운을 양쪽으로 받아내고 있었다.

“당신과 같이 있는 사람들에 대해 더 추궁할 의향이 없소. 지금은 한시가 급하단 말이오.”

대화 몇 마디 나눴을 뿐인데, 참으로 그 의중을 간파하기가 쉽지 않았다. 단지 삼별초 군사들은 매우 지쳐있었으나, 그와 함께 아주 다급해보였다. 무엇인가 매우 쫓기듯 말이다. 방금 내뱉은 말 그대로 우리에게 더 이상 어떤 것도 묻지 않았다. 다만 조금 전 전투했던 그 흔적을 빨리 정리해야 한다. 이 말만 계속 반복하였다. 어떤 상황인지 파악할 틈은 없었다. 곳곳에 쓰러진 시신들은 북수구 쪽으로 옮기고, 부서진 곳들과 불타버린 곳들도 서둘러 정리를 시작했다.

영문도 모른 채, 밤을 지새웠다. 그 사이 성주청 근처에 사는 탐라 사람들도 일손을 보태었다. 짐을 나르고, 직접 부서진 지붕에 올라가 망치질을 하기도 하고, 허기를 달랠 음식들도 어디선가 구해오기도 하였다. 아침해가 완전히 떠오르자, 우리에게 삼별초는 자신들의 군복을 내어주었다. 분명 어젯밤 함께 수습했던 시신에서 꺼낸 것들이었다. 무조건 이걸 입고, 자신의 대열에 조용히 자리만 지켜주면 된다고 신신당부를 하였다. 왜 그래야만 하는지 친절하고도 명확한 이유는 설명해주지 않았다.

“이것이 나와 당신, 우리가 다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란 말이오!”

그게 전부였다. 우리가 다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여기서 더 이상 물어볼 것도 없었다. 단지 살 수 있다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 그게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해가 중천에 향할 무렵, 저 멀리서부터 말울음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한두 마리가 아니라 수십 마리, 그리고 바람에 나부끼는 커다란 깃발도 금세 모습을 드러냈다. 주변에 있는 군사들은 모두 그 방향을 향해 쏟아지듯 나와 있었다. 여기에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성주청 쪽에서 깃발 행렬이 다가오는 것을 보니, 삼별초의 군세가 제법 적지는 않았다. 점점 다가오는 행렬의 선봉을 보자마자 난 다시 침이 마르기 시작했다. 다름 아닌 김통정이었다.

금빛 흉갑을 두른 그의 어깨는 잔뜩 힘이 들어 가 있었다. 무엇보다 그를 따르는 군사들도 기세만큼은 응양군, 용호군 못지 않았다. 그래도 한때는 고려에서 유일하게 믿었던 최고의 부대 출신들 아니었던가. 괜스레 입에서 쓴맛이 감돌았다. 어느 순간부터 김통정은 대장군, 어쩌면 그 이상을 흉내내고 있었다. 본인은 아니라고 손사래 칠지 몰라도 부하들도 그렇고, 지금 탐라 사람들도 그렇고 모두 전하를 대하듯 엎드리기 바쁜 모습이었다.

“대장군께서 행차하셨다!”

김통정 일행은 성주청 문앞, 그러니까 바로 우리 앞에서 멈추었다. 부장을 대신하여, 다른 군사가 김통정 앞으로 달려가 고개를 숙였다. 김통정은 먼저 말에서 내리자마자 주변부터 찬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갑자기 부장의 행방을 물었다.

“성 밖에 급히 일이 있으시다 하여.”

여기서 난 숨을 꾹 참고 말았다. 지금, 어젯밤 전투를 완전히 숨기려는 속셈인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이렇게까지 해야만 하는 이유를. 일단 고개를 푹 숙이고 가만히 서 있었다.

“성안에 별일은 없는 게냐?”

김통정이 군사의 어깨를 손끝으로 툭툭 털어주었다. 아무 일도 없고, 그래서 더욱더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는다는 대답에, 김통정은 크게 웃었다. 역시 믿을 만한 사람들이 있으니 안심이 된다는 말과 함께 자신이 챙겨온 술병을 건네주었다. 잠을 청하기 전에 한 잔 하면서 노고를 풀어보라면서.

“대장군의 성은에 감읍할 따름입니다.”

자신에게 큰절까지 하는 군사를 내려다보며 김통정은 또 한 번 크게 웃었다. 거기서 행렬을 왔던 곳으로 돌리고 말았다. 적지 않은 군사들을 대동하면서 단지, 이걸 직접 물어보려고 왔단 말인가? 김통정을 돌려보내면서 크게 한숨부터 내리는 쉬는 모습까지. 도저히 이대로는 지켜볼 수 없었다. 그에게 따로 보자고 청하였다. 다행히 흔쾌히 아무도 없는 공간으로 직접 안내해주었다.

“어찌 따로 보자 하시는 줄, 알고 있습니다.”

자리에 앉기 무섭게 그는 입을 열었다. 앞으로도 성안은 어떤 일도 생기지 말아야 한다는 얘기도 바로 덧붙였다. 그 사정이 궁금하다 물었더니, 이 모든 게 김통정 때문이라 대답하며 조금 전 받았던 술병을 바닥에 쏟아내고 말았다.

“아마 이번이 세 번째 받는 독주일 겁니다.”

독주라니, 나도 모르게 눈이 동그래졌다. 김통정은 지난밤 전투를 모르는 게 아니었다. 그래, 모를 수도 없을 것이다. 며칠 사이, 몽골군이 탐라 곳곳을 얼마나 들쑤셔놨단 말인가. 그럼에도 모른 척 한 것은, 이곳이 정말 다른 세력으로 넘어가선 안 되기 때문이었다.

지난밤, 쓰러져서 세상을 달리한 부장은 김통정이 유일하게 두려워하는 탐라 사람 중 하나였다. 그의 세력이 성안을 대부분 지키고 있던 터라, 김통정으로서 할 수 있는 건 무조건 믿는 수밖에 없었다. 만에 하나, 틀어지기라도 한다면 일단 새롭게 짓는 성은 고사하고 성안에 있는 김통정 자신들의 식솔들조차 지킬 수 없을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그 부장은 김통정과 상하 관계라기보다 계약 관계에 가깝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런데 바로, 어젯밤. 몽골군의 기습에 허망하게 쓰러지다니. 이 사실이 드러나면, 김통정은 어떻게든 이곳을 휘어잡으려고 할 게 뻔한 상황이었다.

모든 상황을 알아도 대놓고 처리할 수 없으니, 독주로 자신의 뜻을 대신하는 게 김통정이 할 수 있는 최선이란 점인데. 들을수록 무슨 생각인지 알 수가 없었다. 무조건 숨길 수도, 거짓을 고할 수도 없을 노릇인데. 도대체 뭘 어찌하겠다는 건지.

“탐라에 새로운 주인이 필요하다, 그 생각이 들었소.”

도대체 지금 이건 또 무슨 말인가. 무엇보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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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차영민. ©Newsjej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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