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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영민 역사장편소설 '펜안허우꽈'. ©Newsjeju

새벽에 물든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포구까지 천천히 걸어갔다. 그곳엔 전날 밤, 함께 이야기를 나눴던 삼별초 군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한 사람만 겨우 들어갈 법한 작은 나룻배가 물결을 따라 찬찬히 출렁였다.

“오셨소?”

달빛에 취한 줄 알았더니, 그는 저만치서 다가오는 내 그림자를 바로 알아차렸다. 옆에 다가가서 일단 조용히 서 있었다. 여전히 잔잔한 물결 앞에 침묵은 꽤 오래 이어졌다. 주변엔 우리 두 사람 말고는 누구도 스치지 않았고, 으스름한 달빛마저도 묘하게 비켜나가는 중이었다.

어둠이 내리깔린 수평선 너머 미세하게 붉은 기운이 보이려 했다. 바람은 점점 더 차가운 기운을 불러왔고, 몸이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여전히 그는 옆에서 별다른 말을 꺼내지 않았다. 말은커녕 조금의 움직임도 드러내지 않았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는지, 물음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걸쭉하게 모인 침과 함께 꾹 삼키었다.

“아무래도 난 여길 떠나야겠소.”

한참 더 있다가 이제는 정말 동이 트겠구나, 수평선이 신호를 보낼 때쯤 그가 입을 열었다. 물결은 조금 더 요동치더니 나룻배를 눈에 띄게 좌우로 흔들어대는 중이었다. 어둠이 살짝 더 물러나고 드러낸 배는 군데군데 검게 그을린 흔적이 역력했고, 바닥에 물기로 가득한 상태였다. 그는 품에서 낡은 종이를 한 장 건네었다.

얼른 받아서 펼쳐보았다. 김통정의 글씨가 한가운데 짧게 자리를 잡았다.

‘백성을 살리고 싶으면 선택하라.’

더 이상의 내용은 없었다. 대신 그의 손에는 종이로 꽉꽉 뭉친 낯선 가루가 쥐여져 있었다. 나를 한 번 쓱 보더니 한입에 탈탈 털어 넣고 꿀꺽 삼키었다. 다시 품에서 다른 종이 한 장을 건네더니 나룻배로 내려가는 게 아니던가. 말릴 새도 없었다. 포구에서 그가 올라탄 나룻배는 점점 땅과 멀어지고 있었으니까. 물결이 끌어당겼고 바람이 밀어내는 그의 배는 빠르게 나아가고 있었다.

“탐라에는 반드시 새로운 주인이 올 거요!”

바람을 거슬러서 내 귀에 닿은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손을 흔들어, 다시 꼭 만나자는 말을 내뱉었지만. 그에게 닿지 않았을지 모를 일이다. 그가 수평선 너머로 자취를 감추었을 때, 어둠도 함께 완전히 물러났다. 그제야 내 손에 쥐여 준 종이를 펼쳐보았다. 글씨 대신 산속 어딘가를 가리키는 지도였다. 일단 성안과는 거리가 멀었고, 바다보다는 산과 아주 가까웠다. 한 번도 가 본 곳은 아니었으나, 왠지 어딘지 알 법한 그런 장소였다. 저곳엔 도대체 무엇이 있을까?

해가 중천에 떴을 때쯤, 성안에 돌아왔다. 성주청 근처에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둥그렇게 둘러 모여 구경하는 모양새였는데.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보았다. 그곳에는 지난밤 함께했던 삼별초 군사들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들 앞에는 김통정과 그의 직속 수하들이 완전무장한 상태로 서 있었고. 백성들은 웅성거리면서 그 모습을 지켜보기만 하였다.

“너희가 적들과 내통한 사실을 실토하겠느냐?”

김통정은 그들에게 직접 물어보았다. 그러나 그가 원하는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고. 대신 찬바람에 칼이 순식간에 스쳤다. 그들은 비명조차 내뱉을 새도 없이 찬 바닥에 뜨거운 피를 쏟아내었다. 백성들은 칼이 스치는 순간, 동요했으나 김통정이 주변을 둘러보자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고개를 숙이기 급급했다.

“누구도 탐라를 탐해선 안 될 일이오.”

김통정은 단 한마디만 남기고 수하들과 자리를 떴다. 어젯밤까지 이곳을 지켰던 군사들은 김통정과 함께 내려온 일부가 남아서 대신 채워주었다. 일단 사람들이 흩어지는 틈에서 함께 그 자리를 멀리 떠났다. 딱히 갈 수 있는 곳이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진작 군복은 벗어두었다는 것. 지난 새벽, 따로 불려 나갈 때 군복을 벗고 오란 그의 기별 새삼스럽게 머리를 맴돌았다. 이런 상황을 충분히 알고 있었단 말인가?

일단 성주청과 그리 멀리 떨어지진 않았으나, 군사들의 경계가 심하지 않은 구역을 찾아갔다. 그곳은 대체로 쓰러져가는 집들만이 있었고, 사람들도 대체로 쓰러진 상태가 대부분이었다. 탐라 백성들조차 일부러 피하려던 이곳에 일단 숨어들었다.

퀴퀴한 냄새가 일단 내 코를 예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지나가는 곳곳마다 사람들은 있었으나 모두 내 존재 자체를 그리 신경 쓰지 않은 눈치였다.

두루두루 주변을 살피니, 기둥만 온전히 남고 나머지는 다 쓰러진 집 한 채가 보였다. 이곳은 아예 인기척도 없었고 마당에 죽은 새와 개들이 벌레떼를 끌어모으고 있었다. 여전히 하늘에 해는 높게 떠 있었고, 지금 상황에는 성 밖으로 나가는 건 불가능했다. 김통정이라면 그냥 이대로 놔두고만 있진 않을 것이다. 어둠이 내리 까릴 때까지는 어떻게든 숨어야 할 텐데. 딱히 다른 방도를 생각할 여유, 없었다. 엎드려야 겨우 들어갈 만한 구멍으로 일단 몸을 구겨 넣었다. 먼지가 폴폴 풍겨, 코끝을 간질였지만 공간은 꽤 넓었다. 두 다리를 쭉 펴고 누울 수 있었고, 일어나도 천장에 아슬아슬하게 닿지 않았다. 빛은 내가 들어왔던 그 구멍에 의지해야 했지만. 그래도 이게 무슨 대수겠는가. 빨리 어두워지길 바랄 뿐.

잠시 눈을 붙였다가 다시 떴을 때 숨이 막힐 뻔했다. 이 공간에 혼자가 아니었다. 반대편에 누군가 나와 같은 자세로 앉아 있었고, 그의 심장과 숨소리가 분명하게 들려왔다. 캄캄한 구석이었지만 분명 움직임도 눈에 들어왔다. 누구냐고 물었다. 대답 대신 아주 작은 돌멩이를 발까지 내던졌다. 일단 내가 누군지부터 밝혔다. 행여, 여기 주인이라면 잠시 신세 좀 지고 어두워지면 조용히 나가겠다고 덧붙였다.

“그래서 어디로 가시려고?”

가래 끓은 목소리가 맞은편에서 넘어왔다. 굵고 나직한, 분명 사내의 목소리였다. 방금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주지 않았다. 다시 돌멩이가 발바닥으로 날아들었다. 이번에는 조금 크고 끄트머리가 날카로운 것이었다. 손으로 주워서 만져보니, 이건 일부러 이리 만든 것이었다. 순간,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꼴짝 삼켰다.

“성문은커녕 여긴 어떻게 나가려고?”

처음에 그 질문의 의도를 못 알아들었다. 들어왔으니 나가는 게 뭐 그리 대수겠냐면. 이어진 그의 설명에 순간 말문이 턱 하니 막히고 말았다.

“여긴 정말 처음인가 보군. 차라리 지금 나가는 게 나을지도 모르지.”

혼잣말처럼 내뱉었지만, 그냥 하는 말 같진 않았다. 구멍으로 들어오는 햇볕이 조금 더 엷어졌다. 일단 다시 구멍을 통해 바깥으로 나왔다. 마당에는 조금 전 보았던 썩어가는 개와 새의 사체들은 사라졌다. 대신 여기까지 오는데 스치며 보았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모두 하나 같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어디 하나 성한 것들이 없었지만. 일단 두 발로 멀쩡하게 서 있었고, 모여 있으니 숨이 턱 막히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지금 난 어디에 와 있는 걸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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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차영민. ©Newsjej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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