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영민 작가의 역사장편소설

▲차영민 역사장편소설 '펜안허우꽈'. ©Newsjeju
▲차영민 역사장편소설 '펜안허우꽈'. ©Newsjeju

손가락 끝에 찬 공기가 날카롭게 스쳤다. 단순히 햇볕 하나 스며들지 않은 공간이기 때문만은 아니리라. 지금 눈앞에 마주 보고 있는 백발의 사내 존재가 그랬다. 분명 입꼬리를 살포시 올린 채, 손을 내밀었다. 선뜻 그 손을 맞잡을 수 없었다. 손이 움직이지 않을뿐더러, 나도 모르게 온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머리카락 끝에서 울리는 떨림이 뼛속 깊은 곳까지 파고들었다. 

“얘긴 어렴풋하게 들었습니다.”

그와 손을 잡았다. 정확히는 먼저 오른손이 붙들린 셈이다. 고목처럼 깡마른 손에서 나오는 힘은 여느 젊은 사내 못지않은 수준이었다. 어쩌면 그보다 더 강렬한 힘이 들어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도 모르게 아주 가느다란 신음과 함께 무릎을 바닥에 붙였다. 그것도 양쪽 모두. 하지만 그를 비롯해 주변 사람들 모두 일으켜 세울 기미가 없었다. 오히려 이 모습이 자연스러운 듯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느닷없이 내 정수리 그의 손바닥이 탁하니, 얹어지는 게 아니던가.

“여러분, 고려 조정이 내게 무릎을 꿇었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이쪽으로 모여들었다. 그는 입꼬리를 여전히 올린 채, 내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양팔을 붙잡더니 천천히 일으켜서 자신의 옆에 세웠다. 주변을 채운 그림자들은, 불빛이 비치지 않은 저 너머까지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그가 오른손을 높이 들자,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푹 숙였다.

“전하, 만수무강하시옵소서!”

모인 사람 중 누군가 외치자, 나머지 사람들도 똑같이 따라했다. 양팔을 높이 들고 큰절까지 이어졌고. 이 모습을 보던 그는 그저 여전히 입꼬리를 올린 채 지켜보기만 하였다. 의식 아닌 의식을 마치고 사람들이 흩어지자, 그가 팔을 슬쩍 잡아 당겼다. 천으로 가려진 곳으로 들어가자마자 입이 절로 벌어지고 말았다.

“여긴, 제가 잠시 기거하는 곳이외다.”

곳곳에 피어오르는 작은 불들이 공간 전체를 밝혀주었다. 널찍한 침소와 더불어 몸을 씻는 곳과 볼일을 보는 곳, 식사를 할 수 있는 탁자, 서책들을 정리해둔 서가……. 누가 동굴이라 말하지 않고 데려온다면 그저 지체 높으신 분들의 사가라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모습이었다. 다만 천장에서 물이 한 방울씩 떨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인 모양이지만.

“이리 모시게 되어 반갑소이다.”

그가 탁자에 앉기를 권했다. 마주 앉자마자 불빛 너머에 있던 여인이 먹을 것들을 가져 왔다. 술에 고기까지 정말 푸짐했다. 심지어 고기를 구워서 내놓다니, 술은 또 어디서 났으며. 그가 채워주는 술잔을 섣불리 비울 수가 없었다.

“조금 전, 그 상황은 양해해주시오. 통치란 게, 참 그렇소이다.”

통치라, 지금 내가 들은 단어에 잠시 의심이 들었다. 탐라의 이름 모를 동굴에 사람들이 모인 것도 신기할 따름인데, 여기서 통치하는 사람까지 있다니. 가만 얘기를 나눠보니 말투가 탐라 사람은 아니었다. 곧바로 물었다. 당신은 어디에서 왔는지.

“나도 탐라에 오래 있을 작정은 아니었소만. 어쩌다 보니 일이 참.”

그는 술잔을 다시 채우더니 금세 비워냈다. 또다시 술잔을 채웠고, 아예 술병이 새로 들여왔다. 한 번 더 새로운 술병을 들여올 때쯤 그제야 나를 똑바로 쳐다보기 시작했다.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고 눈동자가 벌겋게 충혈되었지만 눈에 힘을 준 건 확실했다. 

“난 고려가 보낸 사람이오.”

그랬다. 수년 전, 탐라부사로 부임한 자였다. 이곳과는 아예 인연이 없었던 터, 조용히 자리만 지키고 돌아갈 작정이었으나. 문제는 탐라 성주와 관계였다. 분명 탐라에 대한 모든 권한은 탐라부사가 처리해야 하지만. 정말 생각한 것보다 더욱더 자리만 지키는 꼴이었다. 심지어 고려에 파견된 관리들조차 자신보다는 탐라 성주 눈치를 보기에 급급했다. 그것도 모자라, 죄인이어도 탐라 성주의 한마디면 아무런 조건 없이 방면되었고, 왕궁에 진상할 전복과 귤도 모두 자신의 것부터 잔뜩 챙기고 남은 것들만 겨우 올려보내는 형국이었다. 

그가 탐라부사가 재임할 동안 하필, 이 땅에 심각한 기근이 들었던 터. 백성들이 도저히 진상품을 내놓을 상황이 아니었다. 친히 조정에 이를 보고하고, 백성들에게 진상을 잠시 중단하도록 일렀으나. 그건 탐라부사 혼자만의 판단이었다. 성주는 오히려 평소보다 더 많은 진상품을 요구하였고, 이를 해내기 위해 군사들까지 동원하였다. 군사도 역시 엄연히 탐라부사의 지휘에 있어야 할 터. 그런데 어찌된 게 군사들에게 전혀 말이 안 먹히는 게 아니던가. 그의 앞에서는 알겠다고 대답만 해놓고 정작 행동은 성주의 말만 따르기 일쑤였다. 

이를 참다못해 조정에 사람을 보내 달라 상소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성주를 조사할 인원과 군사 몇몇이 탐라에 당도하였다. 그것이 문제였다. 조정에서 내려온 사람들은 탐라부사를 만나기 전에 이미 탐라 군사들의 손에 사로잡힌 상태였다. 오히려 그들을 포박하고 탐라부사를 불러내어 추궁하기에 이르렀다. 졸지에 역심을 품은 것으로 사료된다며 아무런 이유 없이 옥에 갇히고 만다.

“난 그때 죽는 줄 알았소이다.”

그는 다시 술잔을 채우고 비워냈다. 주변을 밝히는 불빛은 점점 희미해졌고,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이 소리를 더욱더 키워냈다. 나도 덩달아 술잔을 비우고 고기를 한 점 뜯었다. 소도 아닌 것이 돼지라고 하기도 그렇고 어째 맛이 오묘한 고기였다.

“그런데 하늘이 나를 돕더이다.”

다시 채워지는 술잔과 함께 그의 이야기는 이어졌다. 그러니까, 탐라 군사 일부가 성주에게 반기를 들었다. 백성들을 앞세워 성주청에 들이닥쳤고 그러던 중 자신도 풀려날 수 있었던 것. 물론 반기를 들었던 군사들은 성주청만 잠시 장악할 뿐 더 이상 진전은 없이 물러났지만. 그때쯤 그는 탐라부사 집무실 대신 성 밖으로 빠져나왔다. 성주에게 반기를 들었던 군사들과 만났고, 성 밖으로 도망친 백성들도 모아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이곳은 탐라에서도 아주 넓은 동굴이었고, 일부러 찾아오기도 힘든 곳이라 했다. 군사들이 바깥과 이곳을 연결하는 중인데. 정작 자신 여기 들어온 이후 단 한 번도 햇빛을 본 적이 없었다고 밝혔다. 그 사이 여기서 세상을 마감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만큼 새롭게 들어온 백성들도 많았고. 나름대로 하나의 공동체로 살아가는 중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여길 떠나야겠소이다.”

술잔이 비었다. 술병도 마찬가지였다. 빈 술잔을 깨물며 혼잣말처럼 떠나야겠다고 중얼거렸다. 그리고 넌지시 내 손을 슬쩍 붙잡았다. 혹여, 고려로 돌아갈 생각은 없느냐고. 고려는커녕 여기부터 나가는 게 급선무가 아니냐고 물었으나. 입을 급히 다물었다. 내가 지나 온 천막 너머에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는 자신의 품에서 칼을 찬찬히 꺼내 들었다. 그리고 난 자리에서 바로 탁자 밑으로 기어들었는데. 그때였다. 동굴에 큰 진동이 일어났고 사람들의 비명이 쏟아져 나왔다. (계속)

▲소설가 차영민. ©Newsjeju
▲소설가 차영민. ©Newsjej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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