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영민 작가의 장편연재소설

▲차영민 역사장편소설<펜안허우꽈?>. ©Newsjeju
▲차영민 역사장편소설<펜안허우꽈?>. ©Newsjeju

새로운 세상이었다. 분명 내가 이곳에서 흙과 돌을 나를 때까지만 해도, 황무지나 다름 없는 곳이었다. 어떤 생명도 희망을 품을 수 없는 적막한 공기만이 가득한 곳이기도 했다. 물론 성벽 주변엔 여전히 내가 그랬던 것처럼 제법 많은 사람들이 흙과 돌을 끌어안고 다리를 반쯤 강제로 끌고 다니다시피 했다. 

성벽에서 시선을 조금만 돌리면, 빨갛게 칠해진 커다란 궁궐이 보였다. 웅장하다못해, 과연 이곳에 어찌 자리 잡았는지 의아할 정도로 이질감도 은은하게 내뿜는 건물이었다. 주변 민가는 바닷가 쪽 민가와 크게 다를 건 없어 보였다. 다만 바다 비린내보다는 흙 비린내를 잔뜩 풍긴다는 게, 큰 차이점 중 하나였다.

우린 양옆에 줄지어 자리 잡은 민가를 지나쳐, 조금 전까지 눈을 사로잡았던 궁궐에 들어섰다. 입구를 지키는 군사마저도 어쩜 그리 개경과 닮으려 애썼는지. 가까이 볼수록 건물은 물론이고 관계된 사람들마저도 개경의 모습을 담아내려는 흔적이 역력했다. 

“뭘 계속 보는 건가! 빨리 따라오지 않고.”

나를 묶은 줄이 팽팽해졌다. 앞으로 고꾸라지기 직전까지 이끌렸다가, 겨우 중심을 잡았을 때. 저 멀리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그를 따르는 사람들도 줄을 이었는데. 내 쪽으로 다가오면서 확실해졌다. 바로 그, 김통정이었다.

우리를 끌고 가던 군사들은 갑자기 그 자리에서 무릎부터 꿇었고, 덩달아 내 무릎도 땅바닥에 닿았다. 그가 내 코앞까지 다가왔지만 정작 올려다볼 수 없었다. 그의 곁에 선 누군가 “어디 감히 용안을 보려는 게냐?”하고 소리쳤기 때문이었다. 물론 김통정은 너무 그러지 말라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개경에서 내려왔다는 겐가?”

우릴 끌고 온 군사에게 보고를 들은 김통정은 한마디만 남기고 유유이 자리를 떠났다. 그들 일행의 숨소리조차 닿지 않을 때쯤에야 겨우 다시 일어섰고, 궁궐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옥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허망하게 끝나는 건, 아니겠지요.”

함께 들어온 이가 혼잣말처럼 내뱉었다. 이 공간에 다른 사람들도 모두 있었지만 누구도 대답을 꺼내지 않았다. 대신 우리보다 먼저 들어와 있는 이가 웃기 시작했다. 어둠에 가려져 얼굴은 명확하지 않았으나 형체는 분명히 있었다. 웃음이 어찌나 컸던지, 이곳을 지키던 군사가 와서 입을 다물라고 할 정도였다. 

“별걱정을 다 듣겠네.”

웃음이 멎자마자 묵직한 공기를 예리하게 뚫고 들어온 말이었다. 그 말인즉슨, 이곳에 들어온 순간. 운명은 우리가 선택할 수 없다는 것. 최소한 여기서 두 발로 살아서 못 나간다는 건 기정사실이고. 굶어서 쓰러지다가 떠나던가,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다가 떠나던가, 군사들에게 끌려가서 사지가 찢기던가, 그나마 끝까지 버티었다면. 형식적으로나마 재판을 받고 목이 몸에서 달아나던가. 그가 이곳에 있으면서 보았던 마지막 모습들이었다. 그 역시도 당장 동이 트면 어디론가 떠난다면서, 부디 헛된 소망일랑 접어두라는 말도 보태었다.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이미 짐작할 수 있었으면서도 어째서 이해하고 적응할 수 없단 말인지.

“그래도 무작정 처리하진 않을 거 아니오.”

내 옆에 있던 이가 속삭이듯 내뱉었다. 돌아오는 건, 조금 전보다 더 큰 웃음이었다. 바깥에 군사들이 와서 조용히 하라 일렀지만, 이번엔 좀처럼 그칠 기미가 없었다. 잠시 있다가 열 명 좀 넘는 군사들이 몰려오더니 옥문이 열렸다. 그들의 그림자가 닿자마자 발길질과 몽둥이세례가 소낙비처럼 쏟아졌다. 웃은 이만 그런 게 아니라, 이 공간에 있는 누구라도 예외없이 그저 온몸으로 버텨내야만 했다. 그럼에도 그의 웃음은 그치질 않았다. 결국은 군사들이 두 손 들고 나오더니, 날 밝으면 다시 오겠다는 말만 남기고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내가 웃을 수 있는 마지막 밤이로구나.”

그의 웃음은 계속 이어졌다. 오히려 나와 같이 들어온 이들이 일어나서 흠씬 두드려 팰 심산도 있었지만. 그러기엔 우리 몸 자체가 너무 지쳐버리고 말았다. 이대로 밤만 지새우면 되는 일은 맞는지. 동이 트면 우린 또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다리도 쭉 펴지 못 한 채, 깊어가는 밤만 창살 너머로 바라볼 뿐이었다.

이대로 얼른 아침이 다가오나 싶었더니, 눈이 반쯤 감기려고 할 때. 누군가 내 옆구리를 푹 찔렀다. 고개를 돌려보니 함께 들어온 이들은 아니었다. 모두 고개를 아래로 떨어뜨린채 결국 눈을 완전히 닫아놓은 상태였다. 옥문 너머로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웠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으나 일어서라는 손짓은 그림자로 정확히 보였다.

조심스럽게 옥문이 열리고, 그제야 나머지 사람들도 일어났지만. 이미 난 바깥으로 나온 상황이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는 한마디 말도 없었다. 옥에 있는 자들에게도 어떤 말도 꺼내지 못 하게 했다. 내게 손짓한 자는 먼저 앞장섰고, 양옆으로 군사들이 바깥 붙어 있었다. 이들은 각자 칼을 옆구리에 대고 앞만 바라보았다. 

아무런 말도 없이 일단 걸었다. 몇 번이건 꺽고 되돌아가길 반복하더니, 널찍한 문앞에 섰다. 사내 여럿을 붙여도 남을만큼 큰 문이었고, 안에서 기침 소리가 나자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양옆을 지키던 군사들은 물러나고, 여기까지 안내했던 이도 역시 어디론가 갑자기 사라지고 말았다. 대신 안에서 다른 사람이 내게 손짓하였다. 

그를 따라 몇 개의 문을 지나가니, 낯익은 뒷모습이 기다리고 있었다. 지도가 그려진 벽만 바라보던 그는 잠시 미동도 없더니 갑자기 뒤돌자마자 칼을 내던졌다. 하지만 내 얼굴을 아슬아슬하게 스쳤을 뿐. 맞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땀이 나도 모르게 흐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어째 우린 계속 만난단 말이오.”

그가 탁자에 먼저 앉았다. 불빛이 어두워 명확하게 보이진 않았지만. 분명 전하가 입는 의복과 똑 닮은 차림이었다. 내게 앉으라는 손짓마저도 그전과 달리 상당히 예스러웠고 품위를 지키려는 노력이 역력했다.

“보다시피, 난 여기서 중요한 일을 하고 있소이다.”

내가 앉자마자 그는 자신의 찻잔에만 가득채웠다. 입으로 갖다대는 시늉만 하더니 다시 탁자에 내려놓았는데. 약간 힘이 들어가서 차가 바깥으로 반쯤 쏟아져 나왔다.

“그런데 왜 당신은 나를 가로막는 게요?”

그의 목소리가 한껏 높아졌다. 그리고 찻잔 옆에 시퍼런 날을 세운 칼이 이제야 보였다. 손으로 당장 들고 내 목에 겨눠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자연스럽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난 어떤 대답도 꺼내지 않았다. 고개를 숙이지 않았고, 그렇다고 그와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뒤에 펼쳐진 탐라와 남해안 지도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나도 모르게 이를 꽉 깨물었다. 그의 손에 칼자루로 향하려고 할 때 한마디 먼저 내뱉었다. 당신은 왕이 될 수 없다고. 한 번이 아니라 세 번을 연달아 목청껏 내뱉었다. 왜 그랬는지. 스스로 알 수 없었으나 그래야만 할 거 같았다.

바깥에서 발소리가 요란하게 들렸으나 그가 손을 올리자 갑자기 멈췄다. 그제야 그와 눈을 정면으로 마주쳤다. 잠깐 침묵이 흐르더니 갑자기 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나를 두려워하는군.”

그 말의 깊은 뜻을 당장 알아차릴 순 없었다. 하지만 이것이 여기서 들은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가 손짓하자마자 군사들이 들어왔고 바로 줄에 묶여 바깥으로 끌려나갔다.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도 난 그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는 그 얼굴 말이다. (계속) 

▲소설가 차영민. ©Newsjeju
▲소설가 차영민. ©Newsjej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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