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영민 작가의 역사장편소설

▲차영민 역사장편소설<펜안허우꽈?>. ©Newsjeju
▲차영민 역사장편소설<펜안허우꽈?>. ©Newsjeju

지슬이었다. 분명했다. 그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어찌 된 영문이냐고 물어볼 새도 없이 일단 몸을 일으켰다. 주변은 여전히 대피하는 인파로 소란스러웠다.

“가게 마씸!”

그의 목소리에 숨을 크게 한 번 몰아쉬고 내달리기 시작했다. 다리에 힘은 없었지만 나를 이끄는 그의 손을 의지하였다. 그러나 성주청 바깥을 지키는 자들이 있었다. 바로 삼별초. 김통정의 지휘 아래 일사불란하게 대열을 정비하였고. 뛰쳐나오는 사람들을 모두 막아내기 시작했다. 억지로 뚫고 지나가려는 자들에게는 가차 없이 창대로 내리쳤고. 그걸로도 제압되지 않으면 곧장 창을 휘둘러 피를 보고야 말았다. 성주청 안에 있었던 사람들은 어쩌다 보니 삼별초 군사들과 대치하는 형국이 되었다. 지슬과 나는 맨 뒤쯤에 몸을 살짝 숙인 채 서 있었다. 사람들은 딱히 뒤를 돌아보거나 신경 쓰지 않은 눈치였다. 

“역당들이 오랑캐와 쳐들어왔는데, 어딜 가려는 건가!”

김통정 앞에 있는 부장이 목소리를 높였다. 사람들은 모두 술렁였다. 사내도 제법 섞여 있었지만. 대부분 여인과 노인이었던 터. 오히려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눈만 깜빡이기 일쑤였다. 그때, 삼별초 군사 몇몇이 저 뒤에서 기다란 죽창을 한가득 가져왔다. 사람들 앞에 내던지듯 내려놓았다.

“목숨 바쳐서 우리 고려와 김통정 장군을 지켜야 할 것이야!”

사람들은 부장의 호령에도 오히려 주춤거렸고. 뒤로 슬쩍 물러나려는 기세였다. 그러자 군사들이 쏟아져 나와서 사람들에게 죽창을 하나씩 안겨줬다. 자신의 팔뚝보다도 굵은 죽창을 받은 한 여인은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눈물을 터뜨렸다. 잠시 사람들의 시선이 몰리듯 했으나. 군사들의 가차 없는 발길질에 금세 잠잠해지고 말았다. 눈물을 흘렸던 여인이 받았던 죽창은 바로 뒤에 서 있던 노인이 대신 받았다. 금세 나와 지슬을 포함해 사람들의 손에는 죽창이 하나씩 들려 있었다. 나한테까지 넘어올 때는 군사가 아니라 앞에 선 사람들이 건네줬던 터라, 저들이 미처 우릴 발견하지 못 한 눈치였다. 

“모두 들어라. 지금 서쪽에 상륙한 적들을 온몸으로 막으러 갈 것이다.”

부장의 한마디에 군사들이 길을 터줬다. 완전히 내줬다기보다는 사방으로 둘러쌀 공간을 내줬다는 것이 더 정확하겠다. 사람들은 구멍으로 빨려 들어가는 물처럼 그 공간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김통정의 손짓과 함께 성 밖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사방으로 둘러싼 군사들은 일부러 자신들의 무기를 드러내고 있었다. 행여 시선이 다른 데라도 돌릴 기미가 있으면 곧바로 그들의 목에 칼을 드리웠다. 

나와 지슬은 고개를 일단 푹 숙이고 사람들과 발을 맞춰서 나아갔다. 아주 낮은 목소리로 계속 이래도 되냐, 묻자 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맨뒤에서 약간 중간쯤까지 사람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하늘을 향해 꼿꼿하게 세운 죽창들은 군사들의 시야를 가려주기 충분했다. 

얼마쯤 걸었을까, 바다의 짠 내음이 코끝을 찔렀다. 햇볕은 점점 더 바닥을 뜨겁게 달구었다. 사람들은 얼굴부터 온몸에 땀으로 가득했지만. 물 한 모금도 주지 않았다. 도중에 쓰러지는 자들은 군사들이 가차 없이 밟고 지나갈 정도였다.

“낙오는 없다. 앞서 나가지 않으면 오로지 죽음뿐이니라!”

김통정에게 귀를 잠시 빌려둔 부장의 목소리는 점점 더 커져만 갔다. 대열 오른쪽에 바다를 끼고 계속 나아갔더니. 저 멀리 무수한 그림자들이 넓게 진을 치고 있었다. 가까워질수록 선명하게 드러나는 건, 바로 고려군의 깃발이었다. 사람들은 술렁였고 행군이 살짝 늦춰지는 듯했으나. 군사들은 발길질을 아끼지 않으며 더욱더 재촉했다. 고려군의 선봉이 거의 코앞에 보일 때쯤에야 멈추었다. 그리고 군사들은 앞으로 나아갈 길을 터주었다. 오로지 앞으로만 나갈 수 있게끔 말이다.

“오랑캐와 작당한 역적들의 발목을 확실히 붙잡아야 할 것이야!”

부장의 호령에 북이 크게 울렸고. 길을 터준 군사들이 뒤에서 밀어내기 시작했다. 가장 앞줄에 서 있는 자들은 기마병이 다가가서 채찍질도 아끼지 않았다. 졸지에 고려군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거의 비명에 가까운 함성을 내지르며 말이다. 고려군 쪽에서는 당장 반격을 하지 않았다. 그저 방패만 앞세우고 지켜보기만 하였다. 앞서 달려간 사람들은 모두 고려군의 방패 앞에서 힘없이 쓰러졌다. 저들이 화살을 쏘아 올리거나 창을 들이민 것도 아니었다. 단지 방패에 달걀처럼 부딪쳐서 쓰러진 모양새였다. 그다음 줄은 그래도 창을 앞으로 세우고 달려들었으나. 역시 방패 앞에서 무기력하게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 뒤를 따르던 사람들은 잠시 멈칫하였다. 고려군과 삼별초를 번갈아 쳐다보면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중 나와 지슬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할 셈인지 지슬에게 물었다. 그는 대답이 없었다. 대신 고려군이 아니라 삼별초 쪽을 계속 노려보듯 시선을 떼지 않았다. 잠시 숨을 들이마시려던 찰나, 하늘에 검게 뒤덮이는 모습을 보았다. 구름이 아니었다. 화살 무더기였다. 그것도 삼별초 쪽에서 쏘아 올린. 고려군은 방패 대형을 유지한 채 한 발자국씩 물러났고. 화살은 점점 우리와 가까워지고 있었다. 땅으로 추락하듯 내리꽂히는 화살 몇 개를 창으로 걷어낸 지슬은 달리기 시작했다. 고려군이 아니라 삼별초가 있는 방향으로. 사람들도 덩달아 뒤따르기 시작했다. 지슬이 오른팔을 들자, 사람들이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나도 일단 따라서 움직였다. 순식간에 죽창은 삼별초를 향해 거칠게 내달리고 있었다. 방금 서 있었던 자리에 화살이 다 쏟아졌다. 

김통정은 급히 군사들 뒤로 몸을 숨겼다. 대신 부장과 군사들이 나와서 달려드는 사람들에게 창을 겨누었다. 몇몇은 아예 내던지기도 했다. 지슬을 뒤따르던 사람 중 일부는 쓰러지기도 했지만. 나머지는 곧잘 계속 따라붙었다. 짧은 거리였지만, 지슬이 움직임이 매우 느리게 눈에 담겼다. 맹수처럼 포효하며 달려드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삼별초 군사들과 부딪치려고 할 때쯤, 다시 하늘이 검게 뒤덮였다. 이번엔 고려군 쪽에서 쏘아 올린 화살이었다. 아슬아슬하게 우리 쪽을 지나쳐 삼별초 군사들에게 쏟아졌다. 먼저 방패를 앞세우던 대열부터 금방 무너졌다. 뒤이어 창과 칼로 사람들을 쓰러뜨리던 군사들도 제법 쓰러뜨렸다. 졸지에 삼별초와 온몸으로 난투가 벌어졌다. 동시에 땅이 울렸는데. 고려군 쪽에서 기마 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말발굽이 내 옆을 아슬아슬하게 지나칠 때쯤, 삼별초는 어느새 재빠르게 퇴각하고 있었다. 지슬은 그들을 누구보다 앞서서 뒤쫓기 시작했으나. 고려군 기마병 하나가 급히 그를 막아 세웠다. 

분명 전투였지만,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를 상황이 순식간에 지나가고 말았다. 내가 서 있던 자리에는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사람들이 상당수 쓰러져 있었다. 죽창도 들기조차 버거운 노인과 여인들이 대부분이었다. 고려군은 주변 경계를 하면서 쓰러진 사람들부터 재빨리 수습하기 시작했다. 나도 그들을 따라 돕는 중인데, 군사 하나가 천천히 다가왔다.

“잠시 따라오시지요.” 

일단 손에서 죽창을 내려놓고 그의 뒤를 따랐다. 지슬은 이미 그보다 앞서 고려군 진영으로 들어가는 중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계속)

▲소설가 차영민. ©Newsjeju
▲소설가 차영민. ©Newsjej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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