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안허우꽈?] 93화, 고려는 누구인가?
[펜안허우꽈?] 93화, 고려는 누구인가?
  • 차영민 작가
  • 승인 2019.09.29 10: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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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영민 작가의 역사장편소설
▲차영민 역사장편소설<펜안허우꽈?>. ©Newsjeju
▲차영민 역사장편소설<펜안허우꽈?>. ©Newsjeju

깃발이 바람에 휘날렸다. 고려군과 몽골군의 것이었다.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삼별초의 깃발이 색이 바랄 정도로 온전히 자리를 지켰다. 언제 그랬냐는 듯. 고려군과 몽골군의 깃발은 다정한 듯 은근히 견제하 듯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군영에는 낯선 차림의 군사들이 보였다. 몽골군이었다. 그들은 우리를 흘겨보더니 자신들만의 말로 몇 마디 중얼거리더니 갑자기 박장대소하며 사라지는 게 아니던가.
그들이 사라지자 고려군이 기다렸다는 듯 지나쳤다. 분명 두 나라 군사들이 한 곳에 있었지만. 일단 오묘하게 거리를 두고 있었다. 심지어 서로 눈조차도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쓰는 모습이 보였다. 

“어서 가시지요.”

나를 안내하던 군사가 손짓했다. 군영 한가운데에는 가장 큰 깃발이 나부꼈다. 고려군의 것이었다. 그 아래 사내가 뒷짐을 지고 서 있었는데 그림자에 가려 얼굴은 당장 확인할 수 없었다. 대신 그 옆을 지키던 군사가 내 쪽으로 재빠르게 다가왔다.

“장군께서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장군이라, 누구기에 나를 오래 기다렸단 말인가. 그의 손길에 따라 사내 앞으로 바짝 다가갔다. 먼저 까만 갑옷에 뒤덮인 좁은 어깨가 먼저 들어왔다. 목과 팔은 맨살이 그대로 드러났는데, 아무리 봐도 그동안 봐 왔던 장군들과 다른 풍채였다.

“오셨소?”

차분하게 내리 앉은 목소리와 함께 얼굴을 드러났다. 오뚝하게 자리잡은 코에 짙은 눈썹, 살짝 찢어진 듯 위로 올라간 눈매. 입가를 뒤덮은 수염. 언뜻 눈에 익었다. 순간 번뜩하고 스치는 사람, 바로 우리 장인어른이었다. 언젠간 한 번 술자리에 귀한 손님이라고 따로 모신 적이 있었는데. 바로 그 사람이었다. 장인께서 친히 형님처럼 모시는 분이었다고. 그제야 이름이 떠올랐다. 김방경.

문관이지만 무관의 일에 더 관심이 많았고. 실제로 몽골과 전투에 직접 나간 인물이기도 했다. 어지간한 장수들보다 지략이 뛰어나고 통솔력도 좋아, 명실공히 고려의 최고 장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서 오히려 조정이 몽골과 강화할 때 그가 삼별초와 뜻을 함께할 줄 알았다. 어쩌면 그가 돌아섰으면 조정도 선뜻 삼별초와 적대시하기 어려웠을 지도 모를 일. 하지만 그는 조금의 망설임 없이 삼별초와 선을 그었다. 지금은 몽골군과 함께 삼별초를 토벌하러 오지 않았던가? 

어렵사리 전해 들은 바로는 용장산성도 그가 직접 나서서 토벌했었다고. 지금으로선 전하께서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그런 위치에 있는 자였다. 그가 탐라에 오자마자 나를 불러냈단 말인가.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걸 알고.

“노고가 많았다고 들었네.”

그 한마디에 모든 걸 알 수 있었다. 어쩌면 내가 탐라에 내려온 순간부터 지금까지 모든 일을 그가 파악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내색하지 않고 일단 머쓱하게 웃어보였다. 그는 깃발 아래에 걸터앉더니 수하들을 좀 더 멀리 물러나게 했다. 특히 몽골군사들이 접근할 수 없게 경계를 단단히 하라는 말도 보탰다. 나도 덩달아 그의 앞에 마주 앉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대신 깃발은 바람을 그대로 온몸으로 받아냈다.

“지금 고려는 누구인가?”

그리 짧지 않은 침묵 끝에 그가 입을 열었다. 다시 깃발이 바람을 품는 소리가 우리 주변을 뒤덮었다. 거기서 난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고려가 누구라니,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 건지. 선뜻 알 수 없었다. 정확히는 김방경, 그가 꺼낸 질문의 의도를 알아차릴 수 없었다고 할까. 그와 첫 대면은 그게 전부였다. 

김방경을 만난 직후부터 군영에 막사 하나를 배정받았다. 군사도 아니고, 김방경의 심부름을 하는 것도 아니고, 군영 내부에 허드렛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아무 임무 없이 눕고 앉고 서 있을 공간 하나만 배정 받은 셈이다.

그동안 군영 내에 떠도는 얘기로 삼별초의 소식을 들을 순 있었다. 여몽연합군이 원래 성주청이었던 성안은 진작부터 완전히 장악해버렸고. 그 주변에 소규모로 있었던 삼별초 잔당들도 모두 토벌했다는 것. 산을 넘어 남쪽까지도 삼별초의 흔적을 몰아내는데 전혀 막힘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새롭게 지은 도성이었다. 삼별초의 근거지. 나도 직접 그곳에 있었고 성을 만들기도 했지만. 지형 자체가 그리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외성과 내성을 여느 다른 지방보다 단단하게 만들어둔 터라. 어떻게 보면 그리 넓은 지형은 아닐지언정, 지대 자체가 선뜻 접근하기 힘든 건 부인할 수 없을 사실이었다.

군영내 떠도는 얘기론 고려군과 몽골군이 번갈아 정찰을 내보냈으나. 그들이 돌아오지 못 했다는 것. 그럴 법도 했다. 그들은 최소한 여몽연합군보다 탐라의 지형을 잘 알고 있었다. 이곳을 잘 아는 탐라 백성들이 상당수 삼별초에 합류되지 않았던가. 한동안 가만 살펴 보니, 삼별초에 있었던 백성들도 고려군에 있지 않던가.

그중 하나가 바로 지슬이었다. 군영에 들어오면서 직접 얼굴 맞대고 이야기를 나눠보진 못 했으나. 그가 다른 군사들과 섞여 다니는 모습은 충분히 보았다. 어쩌면 김방경의 질문을 알 것만도 같았다. 저들에게 고려군과 삼별초가 무슨 차이일지. 지금 내가 보는 고려군과 삼별초는 또 무슨 차이가 있을지.

“장군께서 부르십니다.”

김방경을 다시 만난 건, 군영에서 혼자만의 생활을 한 지 달포쯤 되었을 때였다. 그는 직접 군사들을 이끌고 탐라 구석구석을 살펴왔던 터. 얼굴이 제법 검게 그을려 있었다. 이마와 목을 뒤덮는 땀방울 사이로 진한 피비린내도 풍겨왔다.

“자네의 대답을 기다렸네.”

얼굴을 보자마자 그는 질문부터 들이밀었다. 동시에 그의 손은 칼자루로 향해 있었고. 마른 침을 삼켰다. 식은땀이 얼굴을 뒤덮었다. 여기서 무슨 대답이라도 해야만 했다. 결국 내뱉고 말았다. 여기서 고려는 없다고.

“하!”

그의 눈빛이 심상찮았다. 손은 여전히 칼자루를 쥐고 있었고. 하지만 대답을 거둘 순 없었다. 딱히 그럴 생각도 없었다. 다시 한 번 대답했다. 최소한 이 땅에서 고려는 어디에서 찾아볼 수 없다고. 그 순간, 나를 데려온 군사들이 칼을 뽑아들었으나.
그들을 막아낸 건, 다름 아닌 그였다.

“그동안 자네를 믿을 수 없었네만. 이젠 달라졌네.”

그가 칼을 빼들었다. 그리고 내게 건네주었다. 자신이 사용했던 그 칼을. (계속)

▲소설가 차영민. ©Newsjeju
▲소설가 차영민. ©Newsjej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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