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영민 역사장편소설<펜안허우꽈?>. ©Newsjeju
▲차영민 역사장편소설<펜안허우꽈?>. ©Newsjeju

그도 알고 있었다. 최소한 이곳에선 고려가 없다는 것을. 하지만 여기서 칼을 뽑아야 하는 건, 고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이 땅을 지켜야 내야만 고려도 온전히 남아있을 수 있을 터. 김방경과 내 생각이 다르지 않음에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우린 탐라를 지켜내지 않을 걸세.”

내게 칼을 건네자마자 김방경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하들은 그의 한마디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였고. 금세 군영 한가운데 군사들이 모두 집결하였다. 그중에 나도 한 자리 차지하고 서 있었다. 주변을 슬쩍 둘러보니, 저 멀리 지슬의 얼굴이 보였다. 그리고 얼마 전까지 삼별초 군복을 입었던 탐라 사람들도 적지 않게 서 있었다.

저들에게 고려란 무엇이고, 탐라는 무엇일까. 답이 없을 질문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고려에서 넘어 온 군사들도 상당했지만. 새롭게 채워진 탐라 사람들 역시 적지 않았다. 오히려 선봉에는 정규 고려군이 아닌 탐라 사람들이 가득 채워주었다. 

이유랄게, 뭐 있겠는가. 단지 탐라 지형에 익숙하다 이것인데, 여기서 살아남기만 더 이상의 군역에 이름을 올리지 않아도 좋다는 약속을 받아둔 터였다. 공교롭게도 그 약속은 내게도 돌아왔다. 이번 전투만 잘 마무리한다면, 얼른 개경으로 돌아가서 원래의 일상을 되찾을 것이라 했다. 그것도 다른 사람이 아닌 김방경의 입에서 말이다. 

“그러니, 자네나 나나 살아 있어야 할 걸세.”

그도 자신의 목숨에 대해 확신하지 못 한 셈이었다. 그래, 제아무리 패잔병들만 남았다고 한들. 삼별초란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몽골군들도 몸서리쳤던, 고려 최고의 군사들. 직접 옆에서 그들의 움직임을 지켜본 결과, 고려군과 몽골군이 많은 군사를 데리고 왔다 해도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이미 성주청은 장악했고, 주변의 작은 마을들도 모두 고려군과 몽골군이 차지했지만. 그걸로는 안심할 순 없을 상황이었다. 성주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 잡은 바로, 향파두성. 그곳만큼은 현재까지도 아예 접근조차 못 해냈다. 물론 그게 고려군과 몽골군의 척후 수준이었지만. 그들이 털끝 하나 돌아오지 못 한 것만으로도 마른침을 차분하게 삼켜야 하는 건 거부할 수 없는 진실이었다. 

김방경은 군사들을 앞에 두고 한참 어떤 말도 꺼내지 못 했다. 모두 침 한 번 삼키지 않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흙이 섞인 바람만이 군사들의 눈을 깜빡이게 할 정도였다. 그사이 고려군 깃발은 바람에 정신없이 흩날렸다. 거의 찢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우린, 오늘.”

김방경은 한참만에 목청을 틔웠지만. 선뜻 나머지를 이어나가질 못 했다. 부장들이 그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군사들도 서서히 술렁이기 시작했고, 나 역시도 미간에 주름을 굵게 잡고 계속 올려다보기만 하였다.

“적장의 심장을 도려낼 것이다.”

나머지 말까지 끝낸 김방경 앞에 군사들은 다시 침묵으로 빠져들었다. 그러자 김방경이 칼을 빼들었다. 동시에 부장들도 똑같이 움직였다.

“선봉에 내가 설 것이니. 너희는 뒤를 따르거라.”

그제야 군사들이 메마른 목청을 끌어올렸다. 그 말은 바로 항파두성으로 곧장 진격을 뜻했다. 고려군의 일부가 아니라 모두를 움직이려는 건, 김방경이 반드시 이겨야만 한다는 간절함이었다. 그의 호령에 따라 군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군영을 빠져나가려고 할 때. 기마 군사 다섯이 급하게 달려왔다. 다름 아닌, 몽골군이었다.

“대장군의 허락 없이 출정은 아니되오.”

고려말을 유창하게 사용하는 몽골 군사였다. 그러자 부장들이 나와서 칼을 빼 들고 그들에게 겨누었다. 하지만 물러서긴커녕, 몽골군 군영에서 군사들이 더 쏟아져나오는 게 아니던가. 그들이야말로 당장 우리와 전면전을 치를 기세로 각자 무기를 꺼내 들었다. 

“대장군의 명을 거역할 셈인가!”

일개 군사였지만 고려군의 장수들에게 조금도 위축되지 않은 모양새였다. 너무나도 당당하여, 고려 군사들이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를 지켜보던 김방경이 앞으로 나왔다. 그제야 몽골 군사들도 애서 예를 차리는 시늉은 했지만. 앞서 했던 말을 반복하였다. 

“물러나라. 고려가 할 일이니라.”

김방경은 칼자루를 만지작거렸다. 그러자 몽골 군사들이 일단 자신의 무기부터 거두었고. 그들 군영에서 더 이상 지원군은 쏟아져 나오진 않았다. 하지만 앞을 가로막는 건 거두지 않았다. 오히려 잘못된 판단을 후회하지 말란 간청 같은 위협을 내뱉을 뿐이었다. 순간, 김방경의 이마에 핏줄이 올라왔다.

“대장군을 직접 만나야겠다.”

일단 김방경과 몇몇 부장만이 몽골 군사와 함께 그쪽 진영으로 넘어갔고. 고려군은 그 자리에서 일단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는 사이, 군사들은 술렁이기 시작했고. 대열도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나도 가만히 서 있긴 했으나, 어찌하면 좋을지 막막함이 가슴을 짓눌렀다. 바로 그때, 누군가 뒤에서 어깨를 툭툭 쳤다. 고개를 돌려 보니, 삼별초에서 함께 움직였던 탐라 사람이었다. 그저 멀리서 스치듯 봤을 분 잘 아는 사이까진 아니었고. 통성명도 한 번 해본 사이도 아니었다.

“어떵 될 거 닮수과?”

글쎄, 나도 그게 궁금할 따름이었다. 김방경이 총공격을 지휘한 건, 어느 정도 몽골군과 조율된 상황이 아니었을까? 그렇지 않다면 어째서 갑작스럽게 움직이려는 건지. 김방경의 속내는 내가 어떻게 알 방법은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이제 고려는 몽골의 손아귀에 들어왔구나.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겠구나. 그걸 당장 피부로 와 닿았을 뿐이었다. 더 나아가 조정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을지. 걱정 아닌 걱정도 맴돌았다. 

“어차피 이리 된 거, 오랑캐신디 가부는 것도 괜춘헐 거 닮고.”

그의 마음은 그랬다. 어쨌든 여기서 어떤 모습으로든 살아남아야 한다. 단지 그거면 충분하다. 어쩌면 그래야만 이땅에 살아갈 수 있으리라 믿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일단 섣불리 판단하지 말고 기다려보자는 대답과 함께 잠시 바닥에 주저앉았다. 

바람이 바닥을 살살 긁어대기 시작했다. 흙먼지와 코끝을 스치는 바람은, 칼로 베어낼 듯 날카로웠다. 그것도 잠시, 바닥이 울리기 시작했다. 점점 심해지더니. 바람 대신 울림으로 흙먼지를 일으킬 정도였다.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보이는 건, 바로 몽골군이었다. 김방경도 함께였는데, 그의 옆에 있는 자가 우릴 보더니 웃고 있었다. 그 눈빛을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얼어붙고 말았다. (계속)

차영민 역사장편소설 펜안허우꽈. ⓒ뉴스제주
차영민 역사장편소설 펜안허우꽈. ⓒ뉴스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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