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영민 작가의 역사장편소설

▲차영민 역사장편소설 '펜안허우꽈'. ©Newsjeju
▲차영민 역사장편소설 '펜안허우꽈'. ©Newsjeju

칼은 흔들렸지만 김방경의 눈빛은 조금도 미동이 없었다. 오히려 얼굴과 눈, 목까지 벌겋게 달아오른 건 홍다구였다. 칼을 쥔 팔목에는 핏대가 터질 듯 튀어나왔다. 이대로 칼이 김방경의 목으로 향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였다.

그러나 누구도 선뜻 각자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물론 고려군은 온몸이 묶이긴 했으나 저항할 기세를 조금도 드러내지 않고, 눈만 질끈 감고 있었다. 고려군 중에서 온전히 김방경을 살펴보는 건 내가 유일했다. 점점 메말라가는 입술을 혀끝으로 조금씩 축이며 일단 지켜보고 있었다.

“모든 건, 네놈이 자초한 일이니라.”

홍다구나 칼자루에 힘을 다 쥐려고 할 때 막사 안으로 몽골 군사 몇 명이 급히 들어왔다. 안에 있던 군사들이 내쫓으려고 했으나, 바깥에서 온 군사들은 가뿐 숨을 몰아쉬며 버텼다. 

“성문이 허물어졌사옵니다!”

순간, 모든 시선이 김방경과 홍다구에게 향하였다. 눈을 감고 있던 고려군들도 묶인 상태였지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홍다구는 다시 그들에게 물어보았다. 성문이 열린 게 확실하냐고 

“저희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사옵니다!”

홍다구의 얼굴은 조금 전보다 더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꽉 쥐고 있던 칼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 자리에서 김방경과 고려군은 모두 포박을 풀었고. 몽골군을 뒤로 한 채 고려군영으로 돌아왔다.

“성문이 무너졌사옵니다!”

돌아오자마자 고려 군사들도 똑같은 보고를 올렸다. 김방경은 그걸로 멈추지 않고 직접 군사들을 대동하여 함께 성문 근처까지 다가갔다. 나도 그 자리에 함께였는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단단했던 성문은 완전히 녹아내린 상태였다. 그 뒤로 삼별초 군사들이 몇몇이 보이긴 했으나. 그 수가 얼마 되진 않았다. 성벽 위에 올라갔던 삼별초 군사들도 각자 자리에서 허둥지둥하는 모습이 눈에 먼저 들어왔다.

“장군, 명을 내리시지요.”

고려군 부장이 김방경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그는 선뜻 대답을 내놓지 않고. 일단 군영으로 군사들을 모두 물렸다. 그의 행동에 군사들의 시선은 갈피를 못잡고 있었다. 그중 몇몇은 당장이라도 선봉에 서겠다는 외침도 있었지만. 그마저도 들은 체 하지 않고 일단 자신만의 막사로 돌아왔다. 최측근 부장 몇과 나를 남겨두고 나머지는 모두 막사 밖으로 내보내었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그가 먼저 물부터 한 잔 들이켰다.

“몽골 군영에서 이상한 얘길 들었지.”

김방경의 목소리에 모두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 이상한 얘기인즉슨, 삼별초가 성문 안에서 아예 나올 엄두조차 못 내는 건 저 안에서 병이 돌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 몽골군 군영 쪽 일부 식수가 삼별초와 공유하고 있었는데. 거길 이용한 몽골 군사들 일부가 쓰러지거나 이상한 증세를 보인다는 것이었다. 지금 상황에서 과연 저 안으로 들어가도 되는 일인지 망설여진다는 게 김방경의 근심이었다.

“확실한 내용도 아니잖습니까?”
“본래 병이라 함은 허약한 이들만 괴롭히는 법이옵니다.”

부장 중 하나가 한껏 목소리를 더 높였다. 그러면서 직접 자신의 수하만 데리고 저 안에 들어갔다 나오겠다고 밝혔다. 김방경은 일단 망설였지만 그렇다고 말릴 명분도 없었다. 전투가 아니라 정탐이란 조건을 달고 고려군 일부를 성문 안으로 들여보내었다. 그 사이 몽골군 쪽에서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최소한 이쪽으로 군사들을 보내어 홍다구의 의중이라고 밝힐 법도 하건만 그런 것도 전혀 없었다.

성문 안에 들어간 고려군사들 일부는 금방 돌아오겠다는 말과 달리 밤이 깊을 때까지 소식이 없었다. 다른 군사들이 그들의 행방을 알아보겠다고 나설 정도였다. 하지만 김방경은 일단 기다려보자며 군영 전체가 계속 불을 밝혀두라는 명만 내릴 뿐이었다. 하늘에 달이 한참 기울어질 때쯤, 성문 너머에서 그들의 돌아오기 시작했다.
일단 단 한 사람이 낙오 없이 온전한 모습이었다.

“장군, 저, 그것이.”

하지만 큰소리치며 들어갔던 부장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함꼐 다녀왔던 군사들도 식은땀만 연신 흘리는 중이었다. 김방경은 그들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고 있었다.

“저곳에 괴수들이 장악했사옵니다!”

뒤이어 나온 보고에 모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일단 성문을 지키던 삼별초 군사들은 고려군이 다가가자, 도망치면서 쉽게 내주었고. 거기서 내성까지 살펴보았는데. 일단 흙으로 높게 쌓은 외성보다 낮았지만. 돌과 나무로 견고하게 쌓아뒀고. 그 바깥을 장식한 건 바로 사람들이었다. 전장을 치르면서 쓰러졌던 자신들의 시체, 그중 머리를 울타리처럼 줄줄 걸어두었다고 한다. 거기서 흐르는 물이 자연스럽게 몽골군 군영으로 향하는 시내까지 닿는 중이었고. 전반적으로 숨도 제대로 쉴 수 없는 악취가 자욱하게 뒤덮었다는 것. 내성 곳곳에 삼별초가 매복을 했는데. 그나마 미리 알아차리고 피했기 망정이지, 잘못하면 완전히 고립될 뻔한 적도 있었다고 밝혔다. 겉으로 보기엔 크게 다친 곳이 없었지만. 그들의 기습을 막아내며 퇴로를 찾느라 생채기도 생기고, 빙빙 돌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무엇보다 매복한 삼별초 군사들도 요상한 탈을 쓰고 괴이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는 것. 잘못 들어갔다가는 생각보다 피해 규모가 커질지도 모른다는 내용까지 덧붙였다.

“그곳에서 숨어지내던 백성을 만났사온대.”

내성 인근에 굴을 파고 살던 백성이 전하기를. 내성은 이미 병이 돌기 시작했고. 그나마 피해서 밖으로 달아나려다 붙잡히면, 내성 성벽에 머리만 걸리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이미 내부는 식량이 부족하게 된지 오래됐고. 힘이 약한 자들을 먹잇감으로 삼는다는 소문도 있다는 얘기도 있었다. 그때쯤 김방경이 탁자를 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그 정도란 말인가!”
“그저 소문이긴 한데. 아주 거짓 같진 않사옵니다.”
“어찌하면 좋을꼬.”

다시 자리에 앉은 김방경은 눈을 감았다. 직접 성문 안에 다녀온 군사들이 다소 과장되게 표현했다 하더라도 절대 쉽게 넘길 부분은 아니었다. 설령 사실이 아니더라도 얘기가 나돌고 있는 자체로 군사들의 사기에 영향을 미칠 게 뻔하였다. 김방경은 나를 제외하고 모두 내보냈다.

“여기서 잘못하다가는 탐라를 영영 잃을 수도 있소. 무슨 말인지 아시오?”

탐라를 영영 잃을 수도 있다니, 거기까지는 의중을 살필 순 없었다. 다만 그는 삼별초 토벌 그 이후까지 계산하는 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이토록 신중함을 유지할 필요가 있단 말인가. 밤은 점점 깊어져가고 있다. 성문은 무너졌고 이미 그 안을 충분히 살피고 왔다. 이상한 얘길 갖고 나왔지만 지금 고려군과 몽골의 전력을 완전히 마비시킬 정도는 아니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토록 망설인단 말인가. 

소설가 차영민.
소설가 차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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