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영민 작가의 역사장편소설

▲ 차영민 역사장편소설 '펜안허우꽈' ©Newsjeju
▲ 차영민 역사장편소설 '펜안허우꽈' ©Newsjeju

죽음과 고통 사이에서 난 고민할 것도 없었다. 결론이 똑같다면 굳이 어느 쪽도 선택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최소한 스스로 극단의 결론을 선택하고 싶지 않았다. 턱은 당장에라도 으스러질 듯, 그의 손에 꽉 잡혀 있었다. 만약 여기서 숨을 멎는다면 다른 것이 아닌, 지금 이 순간의 고통 때문일 것이다. 이를 곽 깨물고 얼굴을 흔들었다.

“그런다고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으냐?”얼굴을 조금 돌린다고 팔다리에 묶인 줄은 조금도 풀리지 않았다. 오히려 허리에 통증만 더했을 뿐. 하지만 턱을 붙잡은 손이 떨어지기도 했다. 눈동자를 위쪽으로 올렸다. 불빛의 거의 들어오지 않아 얼핏 사람의 형체만 겨우 보일 뿐이었다.

“아무리 살펴봐도 모를 것이다. 그래도 궁금하신가?”

그는 웃었다. 난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순식간에 양뺨은 그의 손길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머리가 어질했지만, 눈에 힘을 똑바로 주었다. 다시 주변을 살펴보았다. 그의 어깨 너머로 자그마한 틈새로 보였다. 얼핏 달빛이 새어나온 것만 같았다. 혹시나 했지만 섣불리 단정을 지을 순 없었다. 다만 머리 위로 진동이 불규칙하게 울렸다. 얼핏 사람들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자들은 오히려 숨소리조차 조심스러워하는 느낌이 들었다. 순간 머릿속이 번뜩했다. 힘껏 소리를 내질렀다. 물론 입이 재갈이 물려 있어서 소리가 멀리 퍼져나가진 못 했으나, 그래도 멈출 수 없었다. 순간, 세 개의 그림자들이 덮쳤다. 먼저 팔다리가 눌렸고, 금방 얼굴 전체가 짓눌렸다. 코가 눌렸고, 입도 완전히 엉덩이에 눌리고 말았다. 소리를 내지른다했지만 뱃속에서만 맴도는 진동 밖에 되지 않았다.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아무래도 여기가 정말 끝인가, 온몸에 힘이 빠지려던 그 순간!

쏟아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를 짓누르던 자들도 순식간에 사라지고 다시 숨통이 트였다. 눈앞엔 낯선 그림자들이 내게 다가왔다. 묶였던 줄이 완전히 풀리고, 쓰러졌던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다리가 풀려서 넘어지고 말았다. 낯선 그림자들의 부축을 받고 빛이 비추는 쪽으로 나올 수 있었다.

“이놈들이 구석구석 숨어있었군!”

밖에 나오자마자 여기서 꺼내 준 자들의 얼굴이 보였다. 고려 군사들. 그리고 이곳은 성안 한복판이었다. 주변은 여전히 고려군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녔다. 방금까지 내가 있었던 곳은 땅굴로 파인 숨은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나와 다른 고려 군사들을 사로잡았던 삼별초들이 끌려 나왔다. 이들의 모습은 얼핏 군사라기보다는 도적과 흡사했다. 옷은 거의 걸친 게 신기할만큼 너덜너덜했고, 온몸은 흙과 피로 가득했다. 머리카락은 말라버린 풀이 물에 젖은 것처럼 축 늘어졌다. 거기서 나는 보았다. 조금 전까지 나를 압박했던 자의 눈빛을. 어깨와 팔, 다리가 칼에 베여 휘청거렸지만 나와 주변을 둘러보는 눈빛은 여전히 날카로운 살기로 가득했다.

“너흰 오랑캐와 손잡은 역적들이다!”

목소리에서도 힘이 전혀 빠지지 않았다. 오히려 주변 고려군들의 발걸음을 멈출만큼 울림까지 있었다. 그러나 눈빛과 목소리와 달리 무릎을 꿇은 채, 바닥에 반쯤 엎드려 있었다.

“김통정은 어디 있는가.”

고려 군사 그의 머리채를 한 움큼 쥐고 확 잡아당겼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는 김통정과 관련된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칼에 베이지 않은 팔로 고려군의 목을 움켜잡기까지 했다. 결국 다른 고려 군사가 칼로 그의 목을 내리치고서야 진정될 수 있었다. 나머지 삼별초 군사들도 무작정 달려들었다가 모두 한 칼에 쓰러지고 말았다.

“지독한 놈들.”

조금 전까지 목이 잡혔던 고려 군사가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내뱉었다. 뒤에서 주저앉은 나를 보더니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을 잡고 일어나 다른 곳으로 이동하였다. 궁궐 앞에 마련된 임시진지에 다다르자, 김방경의 모습이 보였다.

“놈들은 찾았는가?”“잔챙이들만 있었습니다. 하온데, 그들을 발견한 장소가…….”

김방경은 나와 동행한 고려 군사의 보고를 받곤 얼굴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잠시 수염을 매만지며 생각에 빠지더니, 흩어진 군사들을 다시 모았다.

“아직 놈들은 우리 곁에 숨어 있다. 언제 어디서 나타날 진 모를 일이다. 그래서 이곳을 완전히 소멸해야 할 것이다. 모두 불을 준비하거라!”

군사들이 술렁였다. 잠시 눈치를 살피더니 모두 불과 기름을 준비하였다. 김방경의 신호에 따라 궁궐 구석구석 기름부터 뿌리기 시작했다. 작은 건물부터 불이 타오르기 시작하자, 곳곳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그쪽으로 군사들이 달려갔고, 거기서 몇몇씩 삼별초 군사들을 데려왔다.

불은 점점 세력을 넓혀 나갔다. 불길 사이로 발빠른 군사들이 들어갔다 나올 때마다 삼별초 군사들이 살아있던 죽어있던 최소한 한둘씩은 데리고 나왔다. 그러나 김방경은 계속 고개를 내저었다. 그중 소리를 지르거나 저항하는 자들은 가차 없이 칼로 내리쳤다. 나도 옆에서 살펴봤는데, 김통정은커녕 그와 가까이서 수행했던 군사들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삼별초라 해서 데리고 오긴 했지만, 이들을 과연 온전히 그들의 세력이라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모두 죽기 직전에 송장과도 같은 모습이었고, 소리를 내지르는 건 그나마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몸부림과 같았다.

김방경은 조금도 그들에게 관용을 베풀지 않았다. 김통정을 잘 모르겠다는 대답조차도 내리치는 칼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불길 속에서 솟아나는 비명보다 끌려 나온 자들의 비명이 더 깊어지고 있었다. 불길은 어느덧 궁궐의 중심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김통정이 살아도 산 것이 아닐 것이야.”

김방경은 혼잣말처럼 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주변 군사들은 고개를 갸웃하고 있었는데, 저 성문 쪽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왼팔에 화살이 깊게 꽂힌 채 등장한 기마군사는 김방경 앞에서 떨어지듯 내려왔다.

“무슨 일인가?”

“놈들이 밀고 들어옵니다.”

“놈들이라니, 무슨 소리더냐!”

“그놈들입니다. 얼른 대비하셔야 합니다.”“뭣이!”

김방경은 성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칼을 서서히 뽑아들었다. 그놈들이라니, 설마? (계속)

▲ 소설가 차영민. ©Newsjeju
▲ 소설가 차영민. ©Newsjej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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