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영민 역사장편소설 '펜안허우꽈'
▲차영민 역사장편소설 '펜안허우꽈'

이 순간, 분명히 올 것이라고 나나 김통정이나 모두 예측 가능한 일이었다. 다만 믿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또다시 반복된 추적 그리고 위협. 더 이상의 기회는 없으리라고는 서로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이쯤되면 나 역시도 모든 걸 내려놓고 우리의 운명을 저들에게 맡겨야 함도 직감했다. 

“곧 저들이 오겠군.”

김통정의 목소리에 힘이 한껏 빠져 있었다. 화살이 박힌 채 돌아온 자는 잔뜩 충혈된 눈으로 입을 크게 벌렸지만, 거기서 어떠한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떨리는 손을 김통정에게 내뻗은 채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주변에 있던 자들이 화살을 뽑아냈지만 피는 나오지 않았다. 순식간에 얼굴부터 팔까지 시퍼렇게 식고 말았다. 

“모두 불러라.”

김통정의 호령에 흩어진 사람들이 하나둘 모였다. 그러나 누구도 선뜻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다. 하늘과 땅에 시선이 분산되었고, 대열도 상당히 흩어져 있었다. 그 와중에 구석구석 비어있는 자리도 보였다.

“우린, 살아야 한다. 그렇다면 죽음을 뛰어넘어야 할 것이야.”

그의 말을 우리는 모두 알아들을 수 있었다. 누구도 선뜻 호응하지 않았다. 심지어 가장 가까이 그를 지키는 자들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떠는 모습을 감추지 못 했다. 당장 나 역시도 그랬다. 그동안 수많은 죽음의 순간을 아슬아슬하게 뛰어넘었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이곳은 애초부터 사람들이 살지 않은 곳이다. 거기다가 탐라와 관련이 없는 사람들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어쩌면 탐라에 들어왔으리라는 증거도 이곳에 모인 사람들 말고는 없다. 이들은 자신들이 온 흔적마저도 완전히 지우고 바람처럼 자리 잡은 것이다. 고려군과 몽골군 저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선택지는 어차피 정해진 것이나 다름 없었다. 더구나 김통정이 그 중심에 있다면 망설일 것도 없었다. 답이 명확한 것에 행동도 빠르게 마련이다. 그러나 지금 여기 모인 자들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선택할 사항은 단 하나, 이곳을 저들의 손에서 완전히 빼앗아야 한다. 그렇다면 무턱대고 계속 지키고만 있을 수 없는 일. 이곳을 벗어내 저들의 심장을 완전히 도려내야 한다. 그러나 내 입장에서는 꼭 그럴 수도 없는 것이, 승산이 없지 않은가. 어떻게든 저들의 시선을 피해 탐라부터 벗어나야 하건만. 지금 상황에서는 그조차도 도모하기 만만치 않았다. 난 그 와중에 김통정에게 다가가 권했다. 당장 이곳을 떠나야 한다고.

“알고 있네, 앉아서 죽을 순 없지. 어떻게 살아냈는데.”

해석이 달랐다. 김통정은 자신의 처소에서 무기를 하나 꺼내들었다. 누군가가 버려둔 것인데 지금은 그의 유일한 무기인 셈이다. 모인 사람들도 하나둘 자신들의 무기를 챙겼다. 

“오기 전에 저들을 맞이 해야 할 것이야.”

앉아 있으면 사방으로 쏟아질 것이고, 나아가면 정면으로 부딪칠 것이다. 당장의 머릿수로는 뭐든 승산이 없지만 그나마 가능한 방법은 정면뿐. 모두 축 늘어진 어깨를 애써 세우고 김통정의 호령에 따라 움직였다. 한 발 한 발 나아갈 때마다 땅이 울렸다. 마을 밖으로 나갈수록 진동은 미세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길목에 드러난 틈새로 하나둘 제몸 하나 얼른 감추는 자들이 등장한 것인데 김통정은 분명 보았으나 시선을 돌렸다.

“그저 앞만 보아야 할 것이야. 그것이 살아낼 유일한 방법이다.”

목소리의 떨림이 바람을 타고 사방으로 퍼졌다. 머리를 뒤덮은 나뭇가지들 사이로 내리쬐는 햇볕만이 그나마 떨리는 어깨를 다독일 유일한 손길이었다. 저 멀리 바다가 조금씩 드러날 때쯤 눈앞에 펄럭이는 깃발을 보았다. 사방은 탁 트여 있고, 깃발을 중심으로 꽤 길게 검은 그림자들이 늘어서 있었다. 

“저들이군.”

그 와중에 말 몇 마리가 대열에서 빠져나와 우리 쪽으로 달려왔다. 김통정은 망설임 없이 자신의 어깨에서 활을 꺼내 화살로 하나씩 쓰러뜨렸다. 눈을 한 번 끔뻑일 때마다 말이 쓰러졌고, 곧이어 병사들이 쏟아지듯 전진했다. 

“가만히 서 있으면 쓰러질 것이야.”

김통정이 오른손으로 칼을 쥐고 하늘로 높이 치들었다. 누구보다 먼저 달려나갓다. 나도 덩달아 그의 뒤를 바짝 따랐지만, 정작 내 손에는 무기가 없었다. 바닥에 주운 돌멩이 하나뿐. 그래도 달리고, 또 달렸다. 맞은편의 함성이 점점 가까워질수록 뒤쪽으로 찬바람이 강하게 불었다. 순간 뒤를 돌아보았다. 누구도 그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를 않았다. 오히려 하나둘 왔던 길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머리 위로는 맞은편에서 쏘아 올린 화살들이 하늘을 뒤덮었다. 내가 그를 불렀지만 뒤돌아보지 않았다. 오히려 더 빠르게 저들에게 달려나갔다. 나도 잠시 멈칫했지만 가만히 있을 수도 없었다. 일단 발을 더욱더 재촉했다. 선봉으로 나온 고려군 군사들의 얼굴이 하나둘 보일 때쯤 다시 고개를 돌렸더니, 아무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원래 없었던 것처럼, 길게 자란 풀들만 바람에 좌우로 정신없이 나부꼈다. 그 순간, 김통정의 비명과 같은 소리가 다시 시선을 앞쪽으로 끌어당겼다. (계속) 

소설가 차영민.
소설가 차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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