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 서한

노무현 대통령께,

어느 덧 봄인가 싶더니 한낮의 열기는 한여름의 그것을 방불케 합니다.

언제부턴가 점점 계절의 경계가 없어지는 듯 합니다.

경계가 사라지는 것.

계절의 경계가 사라지는 것은 그리 좋은 징조가 아니겠지요.

바로 지구생명의 주기가 흔들리는 일이니까요.

하지만, 이념의 경계, 분단의 경계, 민족과 국가의 경계, 같음과 다름의 경계 이 모든 경계가 사라지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민주주의가, 우리의 평화가 추구하는 이상향이 아닌가 합니다.

그런데 지금 제주사회는 뼈아픈 경계가 굵은 선으로 도민들 사이에 놓여 있습니다. 군사기지를 둘러싼 찬반의 경계가 그것이지요. 그리고 이 경계의 내면에는 평화와 안보, 민주주의와 국가와 같은 보다 본질적인 경계들이 골깊게 놓여 있는 듯 합니다.

지금 제주사회는 그 누가 나서서 말하기 전에 이미 세간 깊은 곳에서부터, 민초의 입으로부터 4.3 이후 최대의 시련과 갈등이라는 말이 터져나오고 있습니다.

바로 해군기지 추진이 빚은 문제들 때문입니다. 같은 동네, 한 식구끼리 찬반이 나뉘어 갈등하고, 때론 폭력으로 대결하는가 하면 오래된 마을 공동체 이웃끼리 애향, 매향 하며 대립하는 이 비극적인 현상은 실로 참담하기 그지 없습니다.

그럼에도 주민동의를 전제로 기지를 추진하겠다던 국방부와 해군은 더 이상 끌수 없다며, 이의 올해들어 이의 결정을 강요해 왔고, 주민투표 요구에 대해서는 ‘안보사업은 주민투표 대상이 아니다’는 매우 선언적이고 강압적인 논리로 이를 거부하고 말았습니다.

정작 권한조차 없는 김태환 제주도정마저, 공교롭게도 특별자치의 첫 단추를 꿰야 하는 이 중요한 시기에 국가논리, 안보논리에 기대어 무리한 결정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제주도 해군기지 문제가 첨예한 갈등과 혼란으로 소용돌이칠때 정작 이 사업의 주체인 정부 당국은 마치 이를 관조하듯 뒤에서 팔짱을 끼고 있는 형국이니 찬반을 떠나 제주도민에게 이 사업은 참으로 누구를 위한 사업인지, 안보는 누구를 위한 안보인지, 이 정부에게 제주도민도 국민일 수 있는지 할 정도로 상처와 시름만 깊어갑니다.

그리고 해군기지 건설여부가 결정된 지금도 사상유례 없는 천주교 사제들의 집단단식, 의회의 행정조사 발동과 예산심의 유보 등 파국양상만 확대되고 있습니다.

더 이상 제주도민의 갈등과 결코 정상적이지 못한 기지건설 결정을 방치해서는 안됩니다. 이제는 대통령께서 나서서 이 모든 얽힌 실타래를 풀어야 합니다.

진정 제주도민의 합리적 공론을 존중하신다면 실타래의 첫 마디부터 찾아 스스로 풀어갈 수 있도록 기회를 마련해주길 간절히 바랍니다.

모든 도민이 충분한 정보와 충분한 토론을 거쳐 모두가 동의하는 정당한 절차로 이 문제를 결정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로 지금 직면한 갈등을 치유하고 해군기지의 해법을 동시에 찾는 유일한 길이 되리라 믿습니다.

대통령께 고합니다.

여전히 많은 도민들은 도대체 왜 정부가, 대통령께서 제주를 ‘세계 평화의 섬’으로 지정해 놓고, 곧바로 이와 같은 군사기지를 추진하는지 의아해 합니다.

국방부가 국무총리가 해군기지는 평화의 섬과 양립할 수 있다고 언급하였지만, 왜 그럴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더 이상 듣지 못하였습니다.

정부가 양립하다고 선언하면 양립이 되는 것인지요?

평화는 평화적 방식으로 만들어 나가는 것이라고 배웠고, 오늘 날의 평화는 결코 힘의 논리로 지켜지는 것이 아님을 현실세계가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주가 평화의 섬으로 지정될 때 이는 바로, 제주는 한반도와 동북아의 평화를 위해 평화적 방식, 평화지대로서 기여하라는 주문으로 우리는 알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4.3이라는 뼈아픈 국가폭력의 기억에서 여전히 자유롭지 못한 제주도민들은 평화의 섬 지정해 놓고 군사기지를 추진하는 이 분열적 현상앞에서 과연 어떤 태도로 나가야 할지 난감하기만 합니다.

국가가 하는 일이니 따라야 할 것도 같지만, 아무래도 이는 4.3의 상처위로 덧씌워지는 또 다른 굴레로 도민들에게는 다가올 수 밖에 없다는 것 또한 대통령께서는 깊이 헤아려주시길 원합니다.

대통령께서는 반세기 이전의 비극, 제주 4.3에 대해 최초로 사과를 표명하신 대통령으로서 제주도민에게 참으로 귀중한 존재입니다.

하지만, 그 대통령께서 자칫 또 다른 국가주의 논리로 다가올 수 있는 이 군사기지 문제와 이로 인한 갈등에 눈감으신다면 이는 제주도민에게 크나큰 상처로 남을 것입니다.

지금 대통령께서 보여주셔야 할 것은 바로 군사기지의 실체가 아니라, 평화의 섬 제주가 나아갈 미래가 어떤 것인지
그 구체적이 비전과 플랜을 제주도민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대통령께서 제주4.3에 대해 공식사과라는 실천을 더욱 빛나고 값지게 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대통령께서 행하신 4.3에 대한 공식사과가 비극의 역사를 마침내 청산하기 위한 실천이라면, 자칫 군사기지의 추진은 또 다른 비극의 역사를 조장하고야 마는 우(愚)로 남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대통령이 제주도민에게 있어서 평화의 대통령으로 영원히 기억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대통령께 호소합니다!

대통령께서는 지금의 정부를 참여정부로 명명하면서 20년전 점화된 민주주의의 과제를 완성하는 정부가 되기를 자처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주도에서 군사기지 문제를 둘러싼 갈등은 국가가 먼저냐, 주민의 의사가 먼저냐 하는 민주주의의 매우 현실적이고도 민감한 문제에서 싹터나오고 있음을 보셔야 할 것입니다.

역대 어느 정부보다도 탈권위와 민주적 절차를 강조해 온 대통령께서 이 문제를 단지 안보사업을 추진해가는데 풀어야할 부차적인 문제로 보신다면, 이는 민주정부를 자처하는 참여정부에 대한 잘못된 기억으로 남을 것입니다.

주민의 의사보다 중요한 국책사업이란 없습니다. 안보란 바로 공동체와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때 기꺼이 나설 수 있는 생활현장 우리 주민들의 행복과 신뢰가 보장될 때 만이 성립될 것입니다.

이렇게 갈등과 분열과 의심과 대결의 결과로 만들어지는 기지가 아무리 첨단의 무기와 무력을 지녔다 하더라도 과연 안보에 얼마나 기여할 수 있을까요?

이제 대통령께서 나서 주십시오. 세계 평화의 섬 제주야 말로 가장 평화적인 방법으로 가장 평화로운 세계인의 장소가 될 수 있도록 그 비전을 밝혀주십시오.

군사기지가 아닌 평화의 섬으로 한반도의 안보에 동북아의 평화정착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2007. 5. 22

제주도군사기지반대도민대책위원회 참여단체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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