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의 산실이라는 대학, 정녕 자본에 굴복당한 모습으로 비쳐져야 하는가

대학등록금 1천만원 시대를 맞이한 지금, 이러한 사태를 예상못할 정부는 아니지 않나 싶다.

지금이라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언제인가에는 이 문제가 곪디 곪아 터져야만 하는 성질의 문제였다.

국내 대학에서 한 학기 대학등록금이 900만원을 육박하고 있다.
여기다 입학금을 합하면 거진 1천만원이다.

대학등록금이 800만원 이상인 곳만 하더라도 국내에 17대 대학이 있다.

비싸면 명품으로 인정받는 극자본주의가 판을 치고 있는 이 대한민국이라는 땅에서 대학도 고자본주의 논리에 휘말리고 있다는 점을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된 지경이다.

대학등록금을 대학생 자신이 벌면서 다녀야 하는 이들에게 대학의 선택권은 좁아지고 포기하게 만들고 있다.

‘대학의 학원화’에 대한 우려는 예전부터 그 심각성이 대두되곤 했지만, 지금 현재 이러한 현상은 대학에게 당연한 일일 뿐인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대학은 더 이상 지식의 산실이라고 볼 수 없는 이익집단이 되어 가고 있다.

지식인들은 이제 침묵하고 ‘그저 이 어찌할 수 없는 현상’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배터리’가 되어 가고 있다.

배터리는 체제유지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소모품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물론 없으면 작동이 안되겠지만, 배터리는 늘 새로이 만들어지고 교체되고 다시 버려지게 된다.

대학은 대학생들을 그러한 배터리로 여기고만 있는 형국이다.

배터리는 직렬로 쓰면 금방 소모되지만 단기간에 큰 효과를 볼 수 있다.
반면에 병렬로 쓰면 그 반대다.

그렇기에 배터리를 최고 효율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직렬과 병렬 구조를 적절히 배합해야 한다.

국내 대다수의 대학은 보다 더 빨리 많은 효과를 얻기 위해 등록금을 올리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 생각하고 자본의 유입을 통한 양적 팽창만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하지만 정작 국내에서 제일 잘 나간다는 대학조차 전세계 순위에서 100위권 내에 든 대학은 단 한군데도 없다.

반면 OECD 국가 중에서도 국내의 대학등록금은 물가대비 선진국형이다.

완연한 비대칭 구조다.

그렇다면 전세계 대학 순위를 매기는 기준은 양적팽창이 기준이 아님을 자연스레 알 수 있을 터인데 국내 대학들은 자신들의 질적 수준 향상에는 별 관심이 없는 듯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 영어로 수업하면 선진국형 대학교?

말로만 국제화, 선진국의 대학들과 교류를 통해 대학의 질적 성장을 꾀한다고는 하지만 보라, 선진국의 형태를 따라간다고 한다는 짓이 영어로 수업하기다.

그것이 잘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방식의 수업은 선택적으로, 한정적으로 시행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무턱대고 전부 영어로 수업해야 한다니.

생각이 있는 정책적 결정인지 정말 한심하다 못해 어처구니가 없다.

영어로 수업하는 것은 단순히 영어로 수업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언어로 구사되는 단어 하나하나에는 그 의미가 함축적이면서 여러 해석을 낳게 해야 학생들이 그것을 듣고 자신의 가치기준 내에서 거르고 걸러내어 교수의 지식을 자기화 시킬 수 있을 때, 비로소 내 것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교육이고 배움이다.
그렇지 않으면 단순한 지식전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중고교를 거쳐 그렇게 지독하게 지식 전달만을 강요당해 왔는데 대학에서도 그러는 것은 정말 미칠듯한 시간 낭비다.

그런데 교수가 자신이 한국어로 생각한 체계에서 해당 지식에 적용되는 단어를 영어로 치환할 때 생기는 어감의 차이를 학생들에게 인지시키지 못한다면 그 수업은 오히려 더 혼란만을 가져올 수 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허수아비’라는 단어를 들어보자.

허수아비는 영어로 scarecrow 다.
하지만 이 두 단어는 전혀 다른 뜻이다.

한국에서 허수아비라는 의미는 알다시피 ‘어릿광대’, ‘허울만 좋은’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지만, scarecrow는 ‘악귀를 쫓는’ 혹은 우리나라의 ‘장승’과도 같은 개념으로 쓰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각 나라의 언어에는 시대적으로 계승되어져 오는 가치관에 따른 개념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한국 학생들에게 영어로 수업하고 그것을 영어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교육적 효과면에서 볼 때 쓸데없는 짓이다.

한국어로도 제대로 그 의미를 전달하기가 어려운 것이 대학교육인데 그것을 의미전달도 제대로 되지 않을 외국어로 강의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니, 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물론 영어권 문화를 익힌 교수와 학생들에게 영어로 수업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더 효율적으로 작용하게 된다.

그래서 그러한 구별없이 무턱대고 학생들과 교수들에게 선택권을 주지도 않고 무작정 시행하는 대학이 우스워보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 대학의 참된 교육, 정말 옛말로 치부해버리고 말 것인가

대학 내의 참된 교육이 이 사회를 구성하게 될 인재들에 대한 값진 가치관 형성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이젠 잊어버린 모양이다.

등록금을 올려야만이 대학의 질을 높일 수 있다는 주장을 해대는 대학들은 그로 인해 대학의 규모를 더 불리고 더 좋은 시설을 만들며 교수들의 연구비들을 증액시키는데 사용하고 있다.

해마다 올라가기만 하는 대학등록금은 대체 어디서 어떻게 쓰이고 있는 것일까.

이 문제에 대해 드디어 감사원이 나섰다.

모 언론 보도에 의하면 감사원이 올해 11월에 대학에 대한 재무구조에 나설 것이라고 했었으나 때아닌 대학등록금 논란이 사회의 이슈로 부각되면서 앞당겨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모양새는 최근 부산저축은행 사태로 금감원이 망가진 모습에 적잖이 타격을 입은 감사원이 명예회복에 나서기 위한 결정이라는 해석도 있다.

어찌됐든 이제 감사원은 국내 4년제 모든 대학에 대한 감사를 대대적으로 벌이겠다고 나서 그 결과에 따라 대학들이 ‘大學’이라는 그 모습의 제자리를 찾아갈 수 있을까.

실망하고 싶지는 않지만, 지금까지의 모습으로 비춰보건데 자본의 논리에 의해 움직인 대학이 비리가 파헤쳐 진다고 해서 흥부가 되진 않을게다.

그래서 별 기대가 되지도 않지만.

大學이 갖춰야할 기본 덕목은 지성적 교육의 장(場)을 조성해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데 있다.

취업률에 매달리는 대학의 현 모습만 바라보고 있으면, 과연 한 나라의 기둥이 되어야 하는 재목들을 길러내야 하는 대학에서 제대로 된 ‘진실’과 ‘정의’를 가르치고는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드는 것은 이 어찌할 수 없는 세상에 대한 당연한 분노다.

사회가 아무리 썩어간다고 하더라도 마지막까지 죽어서는 안되는 대학의 지성인들은 시대의 모습을 반영하는 바로미터임을 다시 상기시킬 필요가 있다.

지금 대학생들이 촛불을 들고 나서는 모습은 바로 대한민국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잣대다.


<김명현 기자/저작권자(c)뉴스제주/무단전재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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