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8년 2월 15일)

향연(香烟)이 곧게 오르고 맑은 햇빛이 창가에 비쳤다. 바람도 따뜻하고 새소리도 들렸다. 눈이 녹아 봄물이 되니, 같이 온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며 말하기를 "오늘의 유람은 하늘이 빌려준 것입니다."고 하였다. 밥을 재촉하고 조심히 나섰다. 영곡(
이어 남쪽 산기슭을 취하여 올랐다. 소나무가 있는데 잣나무도 아니고 삼나무도 아니고 전나무도 아니었다. 우뚝우뚝 늘어서 있는 것이 모두 깃대와 양산 덮게 모양이다. 스님은 계수나무라고 하였다. 산척(山尺)이 나무를 찍으면서 이를 하얗게 만들어 돌아오는 길을 표시 하였다. 나는 장난말로 "너도 또한 계수나무를 찍는 사람이냐?"고 하였다.
반리쯤 가자 풀과 나무는 전혀 없고, 만향(蔓香:등줄기 따위의 향기)으로 산등성이가 뒤 덮여 있었는데, 이파리 모양새는 측백 종류이다. 미풍이 잠깐 일어 기이한 향기가 가득하였다. 고개를 돌리니 산방 · 송악 두 산이 이미 발밑에 있었다. 여러 날 내린 비로 흙덩이나 나무의 먼지가 씻기어 내렸으며 남쪽 바다에는 음습하고 어두운 기운이 물러가니, 가는 곳마다 신선의 취향이요, 걸음걸음마다 기관(奇觀)이다. 돌아다니다가 청순 스님이 지초(芝草) 몇 줄기를 캐내어 나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저는 지난 밤 꿈에 어떤 사람이 영지(靈芝)를 당신에게 드리는 꿈을 꾸었습니다. 깨어나서 이를 심히 이상하게 생각하였는데, 드리게 되니 은근히 서로 꿈과 부합합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웃으며 말하기를 “당나라 사람의 시에「신선 재질이 있음을 스스로 알지 못하였으니 10년 긴 꿈이 자화지(紫華芝)로다」라고 한구절이 있는데 바로 이를 말합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 때 적설이 녹지 않은 곳이 있었는데, 모두 말하기를 “이 깎아지른 골짜기는 깊이가 가히 10여 길이나 되니, 천개 봉우리의 눈들이 바람에 날리어 모두 이곳으로 들어와서 5월에도 아직 다 녹지 아니합니다.”라고 하였다. 나와 따라온 사람들은 두려워하며 계곡 밑을 건넜다. 눈 위의 커다란 소나무는 한촌쯤만 푸를 뿐이었다.
산 밑에서 존자암까지가 30여 리 가량이고, 존자암에서 여기까지가 또한 30여리가 된다. 산꼭대기를 우러러보면 오히려 평지와 같은 이른바 고산(高山)이다. 봉우리 형세가 절벽과 같이 서 있으니, 보기에 솟아나온 것 같다.
곧 말을 버리고 지팡이에 의지하여 올랐는데 열 걸음에 한번 쉬었다. 목이 말라 견디기 어려웠다. 심부름꾼으로 하여금 바위 밑으로 가서 물을 떠오게 하여 한 모금 마시니 꿀물 미음을 마시는 듯하였다.
절정에 도착하였다. 구덩이 같이 함몰되어 못이 되었고, 돌사닥다리에 기대어 아래를 굽어보니, 물은 유리와 같고 깊이는 측량할 수가 없었다. 속세의 풍광은 멀리 삼천리 밖에 떨어져 있었다. 난새 퉁소 소리를 듣는 듯하고 지초의 수레를 보는 듯하다. 그 굽어 둥그렇게 된 모습과 돌이 쌓인 모양은 마치 무등산(無等山)과 같지만, 높이와 크기는 배나 된다. 세상 사람들이 전하기를 무등산과 한라산을 형제로삼았다고 하는데 반드시 이 때문일 것이다.
산위에 돌들은 모두 검붉은 색깔이다. 물에 담그면 뜨니 또한 이상한 일이다. 눈으로 보이는 한계를 말한다면, 해와 달이 두루 비치는 곳과 배와 차가 미치지 못 하는데 에까지 모두 바라볼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의 시력에 한계가 있어 하늘과 물 사이에 있을 뿐이니 한스럽다. 모든 사람이 말하기를 “사람들이 이곳에 놀러오면 연일 소나기 비가 내리는데 오늘과 같이 맑게 개인 날은 있지 않았습니다.”라고하였다.
하늘 끝과 바다 위를 바라보니 둥근 물체가 있었다. 수레 덮개 같기도 하고, 혹 희고 혹 다르기도 하였다. 점점이 벌려 놓은 것이 바로 바둑판 위에 바둑돌과 같았는데, 모두 섬이라고 하였다. 청순 스님은 말하기를 “저는 해마다 여기에 오르는 게 한두 번이 아닙니다. 남쪽 큰 바다에는 섬들이 전혀 없고 구름뿐이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서로 힐난한 끝에, 그 물체가 점점 가까이 다가와서 살펴보니 곧 구름
상봉을 따라 내려온 뒤 남쪽으로 돌아 두타사(頭陀寺)로 향하였다. 가는 길은 절구처럼 패인 곳이 많았다. 작은 대와 누런 띠들이 그 위를 덮고 있는 까닭에 말의 통행이 심히 어려웠다. 15리쯤 가자, 길은 험하고 낭떠러지로 끊겼다. 내려다보니 두타사는 심히 멀지 않았으나, 깎아 내린 듯한 낭떠러지에 매달려 있었다. 눈이 깊어서 허리까지 찼고 또 으슥한 계곡이 있었다. 이에 꿰어 놓은 물고기들처럼 매달려내려오는데, 습지에 빠져 느끼는 고통이란 말할 수도 없었다. 낭떠러지 밑에 있는 큰 계곡을 건너서 절로 들어갔다.
절은 두 계곡 사이에 있으므로 또한 쌍계암(雙溪庵)이라고도 한다. 골이 깊고 으슥하여 또한 가경(佳境)이다. 사람과 말은 먼 길로 돌아서 온 까닭에 초경에 도착하였다. 정의현감이 술 두병을 보내어 왔다. 밝은 달이 골 가득 비쳤으나, 피곤하여 드러누워 일어나지 못하니 한탄스러웠다.

우연히 선려 따라 영지를 캐고 돌아오는데
샘 골에 구름과 안개가 끼어 돌문을 두드리네.
암자의 종소리 멎으니 상방산(上方山)은 고즈넉한데
계곡에 뜬 밝은 달이 새삼 넌출까지 비추어 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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