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과 서울시장 그리고 귀신
청계천과 서울시장 그리고 귀신
  • 뉴스제주
  • 승인 2011.09.12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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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길진의 시크릿 가든<118>

1974년 영국은 떠들썩했다. 세계 최악의 하천이었던 런던의 템스 강에 연어가 나타난 것이다. 1883년 자취를 감춘 뒤 91년만의 일이었다. 그동안 영국의 노력은 눈물겨웠다. 죽음의 강이었던 템스 강을 살리기 위해 무려 100년을 투자했다. 그 결과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강이 될 수 있었다.

영국 런던에 템스 강이 있다면 서울엔 한강이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돌이켜 볼 때 서울의 진짜 템스 강은 청계천이다. 청계천의 원래 이름은 ‘개천(開川)’으로 조선 왕조가 도성 안의 생활하수와 북악산, 인왕산, 남산 등에서 흘러나오는 하천수를 흘려 보내기 위해 재정비한 하천이다. ‘청계천(淸溪川)’이라는 이름은 일제강점기 일본이 지은 이름이다.

조선시대 청계천은 끊임없이 말썽을 부렸다. 이유는 범람과 토사의 축적이었다. 조선 후기 영조는 1760년 무려 20만 명을 동원한 57일간의 공사를 강행했다. 토사를 거둬내고 수로를 직선으로 변경한 뒤, 양안에 석축을 쌓았다. 이 대공사는 240년 전 청계천 준설 보고서인 ‘준천계첩’에 생생히 기록돼 있다. 덕분에 한동안 청계천은 준천이 필요 없을 정도로 온전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후에는 재정곤란으로 보수에 소홀하자 그만 골칫거리로 전락하고 만다.

조선말부터 청계천 주변엔 하루에도 수십 구씩 이름 모를 시신들이 버려졌다. 천변은 늘 오폐수로 전염병이 끊이지 않았다. 6·25 동란 직후에는 판자촌이 즐비하게 늘어서 비만 오면 오물들이 청계천으로 흘러들어가 악취가 진동했다. 결국 청계천은 서울에서 사라져야 할 최악의 하천이라는 불명예를 안고 전면 복개공사를 당했다. 하천의 생명이 끝난 것이다.

1958년 복개가 시작돼 1977년 마장동 신답철교 공사로 더 이상 볼 수 없었던 청계천이 2005년 10월 1일 수통식을 통해 되살아났다. 나는 영국 템스 강의 기적보다 한수 위인 청계천의 기적을 보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 종로 창천동 일대에서 학교를 다녔던 나는 오간수다리 밑으로 흐르는 청계천을 바라봤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때의 청계천은 오염이 심해 도저히 회생 불가능해 보였다.

청계천이 복개된 후에도 나는 청계천 주변에 가기를 꺼렸다. 이유는 영가들이었다. 앞서 말한 대로 조선말, 잦은 범람과 돌림병 등으로 청계천 주변은 시신들이 둥둥 떠다닐 정도였다. 그 많은 시신의 주인인 영가들도 하천 주변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알다시피 청계천은 밑에 흐르는 물을 그대로 두고 위에 뚜껑처럼 아스팔트로 포장한 상태였다. 그러니 천변을 떠돌던 영가들도 아스팔트로 인해 고통을 호소했다. 가뜩이나 더러운 물속에 방치됐던 것만으로도 서러운데 해도 달도 볼 수 없는 냄새 나는 청계천에 갇혀 있어야 하니 얼마나 괴로웠겠는가. 그들은 내게 아스팔트를 거둬달라고 소원했지만 나는 뭐라 답할 수가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청계천이 복원됐고 인공적으로 흐르는 맑은 물속에는 물고기가 헤엄치고 있다. 미국 하버드대에서는 디자인스쿨 석·박사 과정 학생들을 대상으로 ‘청계천 하버드 스튜디오’라는 강의를 개설, 성공사례를 연구 중이라고 한다. 이런 성공적인 복원 덕분에 영가들의 탄식도 줄어들었다.

얼마 전 복원된 청계천변을 지인과 걸으며 지난 시간을 회상했다. 안전과 문화재 복원, 장애인 산책로 등 아직 여러 가지 문제점이 남아있지만 청계천을 거니는 시민의 마음속에는 되살아난 청계천이 흐르고 있었다. 사람은 자연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

청계천이 서울의 상징이라면 시장은 서울의 수장이다. 그런데 최근 무상급식 주민투표 문제로 서울시장 자리를 내놨다. 이에 따라 시장 보궐선거에 출마할 것인지을 두고 정치판이 시끄럽다. 그런 이유로 지인들을 만나면 “다음 서울시장은 누가 될까요?”란 질문을 많이 받는다. 서울시장은 서울시민만의 관심사가 아니다. 서울은 대한민국의 수도다. 그래서 서울시장은 소통령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만큼 서울시장이란 자리는 예나 지금이나 중요한 자리가 아닐 수 없다.

서울시장을 조선시대에는 한성판윤이라고 불렀다. 영의정 버금가는 실세를 누린 이 자리는 정승이 되기 전에 반드시 거쳐야 할 자리였다. 판윤을 차지하기 위한 당파간의 경쟁도 무척 심했다. 따라서 한성판윤은 친가는 물론 외가 3대까지 철저히 살펴 당파에 크게 치우치지 않는 인물로만 등용했다.

황희, 맹사성, 서거정, 최명길, 박문수 등 숱한 위인들이 거쳐 간 한성판윤은 그 자체가 나라의 얼굴이었다. 한성판윤만 살펴봐도 나라 돌아가는 상황을 대충 짐작할 수 있다. 34세에 장원급제한 이가우는 헌종부터 철종까지 무려 10번이나 한성판윤으로 등용, ‘판윤대감’이라는 별명을 얻었었다고 한다. 이에 비해 1890년 고종 27년에는 1년 동안 무려 25명이나 한성판윤이 교체돼 반나절 판윤이 나올 정도로 시국이 불안정했다.

그렇다고 한성판윤의 월급이 많았던 것도 아니다. 고작 쌀 두 섬, 콩 한 섬 다섯 말, 지금으로 치면 쌀이 네 가마에 콩이 세 가마인 박봉의 자리. 이를 감안했던지 한성판윤에게만 특별히 판공비를 지급했다. 판공비란 공무를 처리하는데 드는 비용으로, 이를 특별히 나라에서 챙겨준 걸 보면 한성부에 얼마나 잡다한 공무가 많았는지 알 수 있다. 아주 가끔씩 한성부도 이권(利權)이 될 만한 업무를 수행했다.

대표적인 업무가 한성부 호적정리. 3년에 한 번씩 호적정리를 하면 파지, 쓸모없는 종이가 남았다. 종이가 무척 귀하던 시절이라 이것을 관리들에게 수고비조로 지급하면 꽤 많은 돈이 들어왔다고 한다.

그러나 받는 돈에 비해 한성부 관리들은 업무량이 너무 많았다. 관내 분쟁을 해결하고 죄인의 죄를 묻는 등 도성 내 안녕과 치안을 한성부에서 담당했다. 왕이 행차할 때는 경호담당, 환경미화, 무허가 노점상 단속, 화재예방 및 진화, 여기에 불씨 항아리의 불씨 나눠주기까지 모두 한성부에서 담당했다.

조선시대에는 신주단지와 불씨 항아리가 가장 중요했다. 특히 불씨를 꺼트리면 재수 없는 일이 생긴다고 해서 아낙네들은 필사적으로 불씨를 지켰다. 간혹 불씨를 꺼트리는 일이 생기면 불씨를 받기 위해 한성부로 달려갔다. 불씨는 옆집에서도 ‘복이 나간다’며 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씨 항아리 지키기에는 한성부 관리들의 부인들까지 동원됐다고 한다. 교양과 지덕을 겸비한 부인들은 조용히 남편을 내조하며 밖으로는 백성들을 위해 불씨 항아리를 관리했다. 그 덕분에 한성부의 불씨는 24시간 꺼지지 않았다고 한다.

청계천이 다시 흐르면서 서울의 기운도 달라졌다. 한성판윤을 보면 조선의 운을 알 수 있듯, 서울시장을 보면 대한민국의 미래를 알 수 있다. 누가 서울시장이 되느냐를 떠나 차기 서울시장은 이런 사람이 됐으면 한다. 서울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아끼고 발전시킬 수 있는 사람, 단 한 번도 서울로부터 마음이 떠난 적이 없는 사람, 서울이 갖고 있는 역사적 의미를 명확히 이해하고 있는 그런 사람 말이다. 한성판윤의 역사를 되짚어보며 차기 한성판윤에게 기대를 걸어본다.

후암미래연구소 대표 www.hooam.com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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