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큰 사건을 꼽으라면 6·25전쟁과 1988서울올림픽이 맨앞에 나올 것이다. 6·25전쟁은 자유 대한민국을 수호하기 위한 전쟁이었고, 서울올림픽은 한국이 분단국가로는 처음으로, 전 세계 국가 중 16번째로 인류의 최대 종합제전을 성공 개최한 의미가 있다.

1998년 9월17일에는 고(故)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위원장을 비롯한 IOC 위원 4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서울올림픽 10주년 기념식 및 IOC집행위원회가 서울에서 열렸다. 다른 어떤 올림픽도 10주년을 이렇게 성대하게 치른 적이 없다. 그만큼 서울올림픽은 한국은 물론, IOC 그리고 세계사적으로도 큰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필자는 올림픽 유치계획 때부터 유치전, 그리고 서울올림픽의 시작부터 마무리까지 SLOOC(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 수석부위원장으로, 그리고 IOC위원이자 IOC의 조정관으로 모든 과정에 직접 참여했다. 올해는 한국이 두 번째 올림픽(2018평창동계)을 유치한 까닭에 9월을 맞아 그때의 감동을 되새기며 서울올림픽의 의의를 생각해 보려고 한다.

◇유치

서울올림픽은 박정희 대통령 때인 1978년 제42회 세계사격선수권대회의 성공 개최에 이어 발안돼 두 번의 국민체육심의회의(최규하 총리, 남덕우 부총리, 박찬현 문교부 장관, 정상천 서울시장, 김택수 IOC위원, 박종규 대한체육회장, 김운용 세계태권도연맹 총재)에서 거론됐으나 결론을 내지 못했다. 이후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로 중단됐다가 제5공화국 초기에 이규호 문교부 장관이 전두환 대통령에게 국운 융성을 위해서는 유치가 꼭 필요하다고 건의하면서 불이 지펴졌다. 정말로 시작은 몰라도 너무 모른 상태에서 세계에 도전장을 낸 것이었다. 실제로 주어진 시간은 불과 2~3개월이었지만 개발도상국가, 그것도 분단국가로는 사상 처음으로 올림픽을 유치하는 쾌거를 달성했다.

서울올림픽은 출발부터 한국민의 의식과 한국에 대한 세계의 인식을 바꾸어 놓았다. 한국은 1981년 9월30일 서독 바덴바덴(Badenbaden)의 IOC총회에서 일본의 나고야를 52대27로 물리치고 제24회 하계올림픽을 서울로 가져왔다. 우리도 놀라고 세계가 놀란 사건이었다. 당시 한국은 야간통행금지가 있었고 칼라TV도 없고, 툭하면 한강이 범람하고 소련 및 동구권과는 국교도 없었다. 유치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국민들도 이때부터 달라지기 시작했다. 준비할 것이 산재해 있었다. 각 종목별 국제심판조차 제대로 없었고, 존재하지 않는 경기단체(근대5종, 카누, 루지)도 있었다. 올림픽을 치르기에는 재정적, 물적, 인적 자원이 많이 부족했다. 서울올림픽은 그 준비과정을 통해 우리 국민을 대동단결로 이끌었고, 문화국민으로서 긍지를 안겨주었다.

◇규모

1988년 9월17일부터 10월2일까지 16일간 열린 서울올림픽은 160개국에서 1만3304명(선수 9417명, 임원 3887명)이 참가했고 23개 정식종목, 2개 시범종목, 2개 전시종목 총 237개 세부종목 등 역대 최대 규모로 치러졌다. 경기장 34개, 80개 훈련장이 사용됐고, 물자비용 709억 원에 사용차량만도 2566대였다. 기록도 풍성했다. 세계신기록 33개, 세계타이기록 5개, 올림픽신기록 227개, 올림픽타이기록 42개가 작성됐다. 1만5740명의 신문기자와 방송요원, 1만288명의 심판과 회의대표자, 48개국 900명의 청소년 캠프 참가자, 그리고 스페인 왕비, 말레이시아 국왕, 일본 수상을 비롯한 162개국 3400명의 VIP, 80개국에서 온 3만 명의 문화행사 참가자, 24만 명의 관광객이 축제에 직접 참가했다. 유료관객만 350만 명이었다. 또한 22만3893명의 자원봉사자가 서울올림픽에 동원됐는데 경기운영, 개폐회식 문화행사, 안전업무, 성화 봉송, 지원업무에 동원됐다. 소련의 모스크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Moscow Philharmonic Orchestra)를 비롯한 동구권문화도 이때부터 한국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성적

성적은 소련(금55, 은31, 동46), 동독(금37, 은35, 동30), 미국(금36, 은31, 동27), 한국(금12, 은10, 동11) 순으로 한국은 이때부터 동·하계 올림픽에서 종합 10위 이내에 드는 스포츠강국이 됐다. 또 우리의 국기 태권도는 개회식 매스게임과 4일간의 시범경기와 경기를 통해 세계에 그 위용을 드러냈다. 최근에 모 정부 고위관리가 앞으로 태권도를 한국의 브랜드로 키우겠다는 말을 했다고 하는데 태권도는 서울올림픽, 아니 그 이전부터 이미 한국의 국가 브랜드였다.

◇국제적 의의와 남북체육교류



【서울=뉴시스】1988년 서울올림픽 카누경기에서 시상하고 있는 김운용 전 IOC 부위원장의 모습. 2011-09-08
서울올림픽은 12년간 계속됐던 동서냉전시대의 올림픽 보이콧을 종식시켰다. 당시 소련 대통령이었던 고르바초프는 2년 전 한국에 왔을 때 필자에게 서울올림픽이 동유럽사회주의 국가의 민주화를 앞당기는 데 도움이 되었다며 감사의 뜻을 표하기도 했다.

남북체육교류도 이때부터 본격화됐다. 서울올림픽의 반을 내놓으라는 북한과는 IOC 주재하에 로잔에서 4번의 남북회담을 개최한 것이다. 비록 분산개최는 이뤄지지 못했으나 올림픽을 계기로 남북이 체육을 매개로 해 전면 접촉했다는 의의가 있다. 이에 앞서 1983년 사할린 근해에서 KAL기 격추사건, 1987년 미얀마(당시 버마) 상공에서의 KAL기 폭파 등이 있었다. 성의있는 남북체육회담은 소련권의 서울올림픽 참가의 명분을 주고 보이콧 없는 성공올림픽에 기여했다.

◇흑자올림픽

전 세계 신문은 물론이고 특히 TV가 180시간 생방송으로 서울올림픽경기를 보도했고, 이 과정에서 한국문화가 세계에 소개됐다. 이때 필자가 교섭한 TV방영권으로 미국 NBC 3억200만 달러, 유럽방송연맹(EBU) 2800만 달러, 일본 TV풀(POOL) 5200만 달러, 호주 1000만 달러, 소련을 위시한 전 공산권을 망라하는 동구권방송연맹(OIRT) 300만 달러, 중남미방송연맹(OTI) 292만 달러, 한국 KBS 250만 달러(계약상으로만) 등 총 4억1000만 달러의 수익을 올렸다. 주화 판매도 1억1000만 달러에 달했다.

올림픽을 계기로 한국의 방송기술도 세계 수준으로 발전했다. 올림픽이 끝나고 선수촌과 기자촌으로 사용한 잠실아파트의 분양이익금 3000억 원을 포함해 올림픽 수익금으로 국민체육진흥공단을 만들었다. 이를 토대로 대한체육회(KOC)와 각 경기단체에 대한 지원금 제공과 메달리스트에 대한 연금지원이 시작됐다. 연금제도는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는데 이제는 인플레이션을 좀 감안할 때가 된 것 같다.

서울올림픽 때 재일교포 기부금(일화 40억 엔)으로 건립한 것이 지금의 올림픽파크텔이다. 또 이때 이익금에서 KBS 100억 원, 예술인총연합회 100억 원, 서울평화상 100억 원, 장애인올림픽 100억 원을 각각 출연했다. 예술인총연합회는 반대가 많았지만 내가 밀어붙였다. 또 200만 달러는 로잔의 IOC박물관(Olympic Museum)에 기부하기도 했다. 흑자 올림픽이었던 서울올림픽은 한국을 스포츠강국으로 만든 뿌리라고 할 수 있다.

◇서울은 세계로

서울올림픽은 우리 국민이 하나가 되어 긍지와 단결을 바탕으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스포츠, 학술, 의료, 과학, 통신, 방송 등 모든 분야에 큰 성취를 이끈 계기가 됐다. 또 그것을 바탕으로 우리 국민은 '무엇이든 하면 되고 할 수 있다'는 긍지와 자신감을 갖고 이후 본격적으로 세계 속에 뛰어들게 됐다. 실제로 올림픽 이후 한국은 민주화, 산업화, 북방외교 등 국제교류, 남북관계 개선 등 눈부신 발전을 했다. 이처럼 서울올림픽은 우리에게는 단순한 스포츠행사가 아니라 동아시아의 변방국가였던 한국이 세계로 도약하는 한 역사적 전환점인 것이다. 다방면에 걸친 한국의 눈부신 발전에 서울올림픽이 중요한 동인(動因)이었음은 분명하다.

◇서울올림픽 정신과 그 유산



【서울=뉴시스】김운용 전 IOC 부위원장이 1986년 3월26일 미국 NBC와 서울올림픽 방영권을 체결하고 있다. 2011-09-08
서울올림픽은 유치부터 성공개최까지 숱한 난관을 이겨낸 기적의 이벤트다. 그렇기에 기념일에 몇 사람이 형식적으로 모여 축연을 여는 것으로 끝낼 것이 아니라 서울올림픽의 정신과 유산을 살려 한국이 일류국가로 달리도록 해야 한다. 특히 최근처럼 대내적으로는 국론분열이 심하고, 대외적으로 무한경쟁이 펼쳐질 때는 온 국민의 힘을 한데 결집하는 서올올림픽 정신이 꼭 필요하다.

또한 서울올림픽의 본래 영역인 스포츠 분야에서도 각성이 필요하다. 서울올림픽 이후 세계 10대 스포츠 강국으로 발전한 한국 체육의 현주소는 위태롭기만 하다. 2010아시안게임에서 라이벌 일본을 제쳤다고 하지만 이는 솔직히 비(非)올림픽 종목에서의 선전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2012년 런던올림픽의 경우 한국의 금메달 목표치는 일본의 절반 수준이다. 종목별로 보면 남녀축구는 이미 일본에 역전당했고, 레슬링, 유도, 농구, 배구, 하키, 핸드볼, 탁구, 태권도 등 주요 종목의 국제경쟁력은 과거에 비해 오히려 퇴보했다. 엘리트, 학교, 생활체육이 골고루 발전하는 정책을 시행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올림픽을 앞두고 체육부가 생긴 바 있다.

그런데 이른바 진보정권 10년을 거치면서 점차 체육의 의미가 축소되더니 아예 정부조직에서 체육이라는 말이 사라져 버렸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 이후 간신히 문화와 관광 사이에 체육을 끼워 넣었지만 앞으로도 체육이 문화체육관광부에 예속되는 것이 맞는 것인지 아니면 청소년체육부라는 형식으로 독립하는 것이 타당한지 숙고해 볼 대목이다. 본격적인 고령화시대로 접어드는 까닭에 더욱 그러하다.

서울올림픽을 돌아보니 최근 우리의 국제대회 유치에 꼭 교훈으로 삼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서울올림픽은 인류의 평화 시 최대종합제전으로 단순한 스포츠 경기가 아니라 우리나라가 세계 속에 뛰어들고 국민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의식을 깨우친, 나라를 일으키는 일이었다. 그리고 스포츠 행사 성공의 두 가지 여건인 훌륭한 운영과 자국민 선수의 훌륭한 성적을 이뤄냈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종합4위를 차지했다. 엄청난 흑자도 기록했다. 그런데 감사원 자료에 의하면 지난 3년간 한국이 유치한 국제행사는 28개나 되고 국비 1조676억 원이 투입됐다. 그런데 거기서 나온 수익금은 겨우 1918억 원이라고 했다. 단순계산이라고 해도 엄청난 손실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대회 유치 때마다 각종 연구소에서 ‘64조’니 ‘40조’니 하는 믿거나 말거나 식의 장밋빛 경제효과를 발표한다. 이제 중요행사를 모두 유치한 한국은 앞으로 있을 인천, 광주, 평창 대회를 알뜰하게 잘 치르고 무분별한 국제대회 유치도 이제 그만해야 한다. 월드컵경기장도 매년 혈세를 쏟아 붓고 있다. 대구 세계육상선수권대회도 대충 잡아도 2600억 원이 손실이 났고, 향후 매년 경기장 유지에도 20억~30억 원이 든다. 정말이지 장밋빛 경제효과 발표가 무색한 현실이다. 국민의 피 같은 세금은 자치단체장의 치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국방이나 복지 등 더 소중한 곳에 쓰여야 한다.

서울올림픽과 2002월드컵에서 알 수 있듯 스포츠만큼 국민화합 효과가 큰 영역도 없을 것이다. 서울올림픽 기념일을 맞아 더불어 사는 사회, 전 국민이 한 마음, 한 뜻을 갖는 국운융성을 모두가 한 번쯤 생각해봤으면 한다. 서울올림픽 성공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뛴 우리 국민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이제는 서울올림픽 이후 세대도 많은 만큼 이 뜻깊은 역사의 쾌거를 후세들에게 산교육으로 전달했으면 한다.

끝으로 1988년 9월17일 서울올림픽 개막일의 하늘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날은 날씨가 너무도 좋았다. 하늘까지도 우리를 축복해 주었던 것이다.

[김운용 전 IOC 부위원장]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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