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1년 9월 23일)


임제의 한라산 등정 기에 이어서 김상헌(金尙憲 : 1570~1652)의 등정 기를 실코자 한다.
김상헌은 1601년 8월 10일에 안무어사로 어명을 받고 9월 22일에 제주에 들어와서 재직하다 다음해인 1602년 1월 25일에 되돌아갔다. 그는 그간에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하여 <남사록(南槎錄)>을 만들기도 하였다.
오늘은 그 첫 번째로 한라산 산신제를 올리기 위하여 등정했을 때의 기록부터 살펴보고자 한다.

1601년 9월 23일. 아침에 비가 내리다가 뒤늦게 개임.
제주 객사에 묵다. 영암 도갑산(道岬山) 스님 설순(雪淳)이 목사를 따라 들어와서 뵈었다. 이어서 시권(詩卷)을 내놓았는데, 첫머리 시편이 곧 외조부가 경신년에 예조판서가 되었을 때 써주신 것이다. 7언 절구 두 수인데 필적이 완연하다.
저녁에 판관이 와서 아뢰기를 “한라산 제물(祭物)이 다 갖추어졌습니다.”라고 하였다. 뒤떨어진 호송선 일곱 척이 추자도로부터 들어왔다. 배 안에 있던 물건들이 모두 없어졌고, 떠내려가거나 물에 빠지는 것을 면하였는데, 죽은 사람이 하나도 없었으니 다행한 일이다.

1601년 9월 24일. 맑음. 한라산 절정 밑에서 묵다. 새벽에 일어나 잠자리에서 조반을 먹고 남문을 나섰다. 5리 되는 곳에 이르러 계곡 하나를 건넜다. 비가 오래 내린 뒤라서 질퍽거리는 길이 여름 장마 때와 같다. 20리쯤에서도 또 물 하나를 건넜다. 동학(洞壑:골)은 수 10여 리이고, 풀 덥힌 길이 계곡을 따라 나 있었다.

계곡 좌우에는 늙은 나무들이 골짜기에 걸려 있었다. 곳곳에 단풍든 나뭇잎들이 볼 만하였다. 시냇물의 양쪽 언덕은 높이 열길 또는 대여섯 길쯤 되는 절벽들이 병풍처럼 서 있다. 절벽이 끊어진 곳은 무지개문처럼 되어 있고, 그 속은 굴이 되었다. 시냇물은 바위 밑을 숨어 흐르기도 하고, 솟아나면서 흐르기도 한다. 시내에는 크고 작은 돌들이 이리저리 놓여 있었다. 쇠 바구니 같기도 하고, 엎드린 호랑이

산기슭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 제주 읍으로부터 여기까지의 거리가 40여 리이다. 그 사이 오는 길은 언덕과 들에 키 큰 나무가 없었고 오직 거치른 띠들로 어지럽게 막혀 있었으며, 또 사람들도 살지 않았다. 산 어귀로부터는 구름에 쌓인 나무들이 사방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날씨가 흐렸는지 개였는지 분간할 수 없었다. 사시사철 구름과 안개가 늘 끼므로 풀과 나무들이 번들번들 윤기가 있다. 혹 5~10리 사

존자암(尊者庵)에 도착하여 조금 쉬었다. 산기슭으로부터 이곳까지의 거리가 또한 40리 이다. 앉아서 남쪽 바다 만리 밖을 바라보니, 햇빛이 넓고 깊게 수은(水銀)빛으로 드리워져 있었다.

차(茶)를 마신 뒤 드디어 절정으로 향하였다. 여기를 지난 이후로 잡스러운 초목들은 다시없고 오직 소나무와 이깔나무와 박달나무가 그늘을 이루며 푸르게 모여 있었다. 제주 성 사람들이 모두 아뢰어 말하기를 “오늘은 해가 이미 늦었습니다. 여기서 산 정상까지의 거리가 40여 리인데 행로가 극히 위험합니다. 이 산은 비록 청명하여 구름 한 점 없는 날이라도, 만약 사람과 말이 시끄럽게 길을 밟고 다니면, 산산이 꼭 여러 날 비를 내려서 씻어냅니다. 하물며 지금 비가 올 뜻한 징조가 있습니다. 저곳에 오르고 나면 사방에 의지하고 가릴 곳이 없는데, 만일 비바람을 만날 것 같으면 어둡고 길을 잃어 나아가지도 물러서지도 못하게 될 것입니다. 절대로 앞으로 가시면 아니 됩니다. 절 뒤에 깨끗한 땅을 청소하고 단을 만들어 제사를 올리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나는 듣지 않고 그대로 가기로 하였다.노상에서 천불봉(千佛峰)을 바라보았다. 한쪽 면은 설산(雪山)인데, 마치 금강산의 중향성(衆香城)과 같다.

천불봉(千佛峰)
멀리 보니 괴석들이 높고 험함을 다투는데
스님들이 손잡고 절하는 모습을 잘도 만들었네.
이는 응당 사문들이 북위를 도망칠 때
조각배로 바다 건너 이곳으로 들어온 것이려니.
진시황의 채찍은 다리 놓더라도 미치기 어렵고
설법하는 생공이 강론을 하더라도 듣지 않으리.
비바람 맞아온 지 몇 천 년이나 되었을까?
이제는 이끼가 끼어 머리마저 파랗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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