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하리 글·김쾌민 그림<22>

파트2. 삶의 조각들

사랑

사랑은 어느 날, 감기처럼 온다. 누구나 사랑을 한다. 예외 없이 내게도 낙엽이 하나 둘 떨어지는 늦은 가을 어느 날, 감기처럼 그가 내게로 왔다.

간혹 안부가 궁금했을 뿐, 한 치 그리움은 없었던 그였다. 그저 서로의 안부가 궁금했을 뿐, 서로에게 사랑이 가까이 가고 있었음을 몰랐을 뿐이었다. 한 해를 보내는 겨울이 시작될 무렵, 기막힌 인연이 신기하기만 했다. 때가 돼 만나는 인연이라는 것,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영원한 숙제로 남아 있을 과제이다.

겨울 내내,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차가워진 손을 서로 녹여 줬다. 같은 생각으로 같은 길을 함께 가고 있다는 사실이 행복하기만 했다. 행복이란 편안한 마음일 때의 현상이다. 이 현상은 사랑 진행 중이라는 표시이다. 그는 내게 방긋 웃는 꽃이었다. 그윽한 우물이었다. 점점 서로의 우물 속에 빠져 들어가기 시작했다. 빠질수록 출렁이는 기쁨. 기쁨을 주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사랑을 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비밀이다. 그러나 사랑이 기쁨과 행복만을 주는 것이 아니다. 사랑이 시작되면 이별도 가슴 한켠에서 시작된다고 한다.

고요히 깊어갈 수록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바람은 영그는 그리움의 열매였다. 한 때, 부서져 버리고 싶을 만큼 작렬했던 사랑들이, 고통마저도 아무렇지 않게 사랑 안에서 희석이 됐다. 사랑이 주는 다행이라는 결과였다. 흡사 사랑은 와인과 같았다. 사랑으로 주는 와인 한 모금은 내 몸안에서 향기로운 꽃잎들이 됐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별을 두려워하면서도 사랑을 하려고 한다. 사랑은 묘한 힘을 갖고 있어서, 사랑이 주는 아픔은 칼날 같지만 그래도 용서가 되며 이해가 되는 이유는 상처를 낫게 해주는 묘한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은 슬픔마저 녹여 노을빛이 되어 내 가슴을 물들여 줬다./설피 살걸음 걷는 나의 이 땅 위에서, 발박하는 생 앞에 조금씩/별빛으로 혹은 봄빛으로 혹은 불꽃으로 조용히 타고 있었다./농축된 알맹이들이 붉은 선혈처럼 내 살 안에 녹고 있었다./황홀함 때문에 하마터면 울음 터트릴 뻔 했던 밤, 조용하게 그러나 기쁨으로/꽃 몽우리가 터지듯, 가슴 터질 듯한 울음을 기어이 울고 말았다./그가 만들어 준 사랑이라는 가슴 밭에서./꽃밭, 꽃 위에서 꽃처럼, 나비처럼 날고 있었다./그가 짜놓은 사랑이라는 그물 안으로 스멀스멀 잠기어 /혼곤히 잠이 들면/한 없이 열리는 하늘이 보였다./참으로 푸른 하늘이었다.//사랑은 /한 알의 씨앗으로, 어느 날엔 한 방울의 물로/꽃을 피웠다./온 몸 적시는 선명한 빛, 참 곱다.”(김하리 ‘사랑’ 전문)

사람은 이성에 앞서 감정이 먼저 온다. 따뜻한 말은 상대방의 낯설기가 해제된다. 상대방이 마음을 여는 신호이다. 그러면 대화가 쉬워진다. 단 한 번의 만남에도 오랫동안 만났던 것처럼 느껴지는가 하면, 오랫동안 만났는데도 서먹한 분위기가 되기도 하는 것은 서로의 마음속에 흐르는 기류가 차갑기 때문이다. 서로에게 불편한 의식을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봄을 연상하게 하고, 별과 달을 가슴에 떠오르게 하며, 그리고 아름다움을 다 어쩌지 못해 시를 쓰게 만드는 힘이다.

사람의 뇌 속에는 ‘아미그달라’라는 단백질이 들어 있다고 한다.‘아미그달라’는 공격적이거나, 듣기 싫은 말을 들으면 뇌에서 입력되지 않도록 차단하는 물질이라고 한다. 이 작용은 생존본능에 의해 차단된다고 한다. 사랑을 하거나 따뜻한 말은 사람 마음을 녹여주는 역할을 한다. 사랑이라는 엔돌핀이 뇌 속에서 나오기 때문에 행복해지며, 모든 것들이 아름다워 보이는 이유다. 상대방을 바라보는 눈빛이 따뜻하고 차가운 것도 단박에 알 수 있듯이, 마음에 상처를 받은 사람에게는 사랑을 주는 마음과 따뜻한 말 한마디가 어느 치료보다 훌륭한 치유가 된다는 사실이다. 마음을 열게 하는 소통의 길은 진실뿐임을 기억해야 한다.

요즘 방송에서는 동물에 관한 소재를 많이 다룬다. 인간이 아닌 동물이 인간과 소통하며 서로 사랑을 공유한다는 점이며 동물로서는 할 수 없는 행동들을 해내기 때문이다. 문명이 발달하는 만큼 동물들의 지혜도 발달하는 모양이다. 어떤 중년의 남자가 사람들에게 심한 상처를 받고 산으로 갔는데 어느 날, 우연히 산에서 돌에 끼여 꼼짝 못하고 있는 구렁이를 만나 돌을 치워주는 그 날 밤부터 어떻게 알았는지 집으로 찾아왔다고 한다. 다시 산에 데려다 놓으면 또 오기를 반복했다. 지금은 아예 남자의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살면서 새끼들을 많이 낳고 살고 있다. 남자는 구렁이로 하여금 마음의 상처가 깨끗이 나았다고 했다.

어미 소가 허약한 새끼소를 낳았다. 다리에 힘이 없어 자꾸만 쓰러지는 새끼의 다리를 어미 소는 쉬지 않고 혀로 핥아주고 있었다. 농장 주인이 새끼를 데리고 병원에 가려고 안고 가자 고개를 길게 빼고 새끼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울부짖으며 바라보는 어미 소의 눈에 눈물이 흘렀다. 몇 시간 후, 주인이 새끼를 데리고 왔다. 어미 소는 새끼 두 다리를 더 열심히 핥기 시작하자 옆에 있는 소들이 와서 새끼소를 핥아주기 시작하였다.

인간에게만 이성과 감정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지만 문명의 발달과 더불어 동물들이 영리해졌기 때문에 동물에게도 생각과 감정이 생겼다고들 말하기도 한다. 인간이 아닌 동물이 하는 행동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재미로 본다. 모성애와 사랑은 인간에게서나 동물에게서나 통하는 것이다.

과일 한쪽을 맛있게 먹었을 때, 혹은 소주 한 잔으로 피곤이 풀릴 때, 혹은 달콤한 와인 한 잔으로도 행복을 느낄 때 그 순간은 행복하다. 삶은 순간으로 이뤄진다. 이는 살아 있음의 확인이다. 몇 년 전, 지인 한 분이 외국을 다녀오면서 나에게 비싼 아이스와인을 선물했다. 달콤함이 최상이었다. 선물 주신 분의 사랑도 느낄 수 있어서 행복이 이런 것이구나 느낄 수 있는 날이기도 했다.

“바람 깊다, 입술 맞대는 순간/피어나는 꽃 되다, 불꽃 되다/목구멍까지 차오르다/설피 살걸음으로 오는 걸음/부풀어 터지는 붉은 선혈들, 살 안에서/불꽃 되다, 별빛 되다 /하마터먼 울음 터트릴 뻔 했다, 하/저리도 몹쓸 달콤함./바람 짙다, 환한 햇빛/시린 가슴 녹인다, 하염없이/물드는 노을 빛, 하늘 아래 잠들다 /열리는 하늘 아래 총총 별빛 되는/밤, 이미 우리는/꽃이 되었다/나비 되었다, 바람은 바다 된다/깊고 푸르다, 출렁인다, 아/너무나도 아득한 꿈, 온 몸 물들인다//무상(無想) 중에 두고 온 사랑/물가에 드리우면 달빛마저 차오른 /선명한 꽃이거나 얼음이거나//참/달콤하고 감미로운 붉은/꽃잎, 꽃잎/꽃이거나 얼음이거나”(김하리 ‘아이스 와인을 마시며’ 전문)

아이스와인을 마시고 난 후의 온 몸에 퍼지는 과정을 시로 썼다. 달콤한 아이스와인처럼 사랑이 온 몸에 퍼진 것처럼 느껴졌다. 오랫동안 나의 머릿속에서, 가슴 속에서 달콤함으로 남아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별을 생각하면서 사랑에 빠지진 않는다. 다소 두렵고 불안한 요소가 섞여 있기는 해도 사랑은 부드럽고, 달콤하고, 모든 것들을 아름답게 보여주기 때문에 사랑이 주는 치유의 힘은 크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감성과 이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성적이면서도 감성이 혼합된 사랑을 함께 하기 때문이다.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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