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창작만화를 그릴 때는 내 가치관이 많이 투영됐어요. 하지만 역사 학습만화를 그릴 때는 출판사와 관점에 대해 논의를 해야하고 감수도 받아야 하죠. 그런데 그 만큼 공부가 많이 됩니다. 내가 배웠던 역사나 기존에 알았던 정보를 절충하게 되는 거예요."

세계사 학습만화 '만화 세계사 넓게 보기'를 전체 15권으로 완간한 만화가 이현세(55·세종대 교수)씨는 24일 "학습만화를 그리면서 내 스스로 되돌아보는 계기가 됐다"며 "이후에 그리는 창작만화에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만화 세계사 넓게 보기' 시리즈는 2008년 7월 1권 '문명의 새벽'으로 출발했다. 3년 만인 최근 마지막 권 '세계의 오늘과 내일' 출간으로 마무리됐다.

이씨가 '만화 한국사 바로 보기'에 이어 두 번째로 선보이는 역사 학습만화 시리즈다. 이씨 만화의 대표적인 캐릭터인 까치와 엄지, 동탁, 두산 등이 세계사의 현장을 누비며 이야기가 전개된다.

이씨는 "그간 창작 만화를 그릴 때 신념이나 이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며 "그저 느끼고 받아들인 것을 충동적으로 토해내는 것에 가까웠다"고 털어놓았다. "그런 모습들이 약 30년 간 창작생활에 계속되면서 독선적인 세계관으로 변해버렸다"고 진단했다.

"하지만 두 학습만화 시리즈를 그리면서 제 생각과 가치관에 발전이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저는 만화를 계속 그릴 것이기 때문에 그 변화가 참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껄껄껄."

이번 시리즈는 시간이 촉박했다. "정밀 묘사 때문"이다. "요령을 피우면서 그림을 실루엣으로 처리했더라도 이야기 전달에는 지장이 없었을 것"이라면서도 "내 그림의 기본은 디테일한 묘사다. 다른 (만화) 세계사 책들과의 차별점"이라고 전했다.

【서울=뉴시스】전신 기자 = 만화가 이현세가 24일 서울 중구 플라자호텔에서 열린 '만화 세계사 넓게 보기' 간담회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photo1006@newsis.com 2011-10-24

어려웠던 점은 "세계사의 어느 부분을 가져와서 확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었다. "왜 아프리카·중동·동남아시아의 국경선은 직각인지, 또 왜 북미는 나라들이 거대한 제국을 이루는데 남미는 여러 나라들로 갈라져 있는지 궁금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기존 세계사 교육의 문제점은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편협함'이라고 지적했다. "책의 내용이 초등학생 고학년에게도 조금은 어렵다"며 "아이들이 부모와의 대화를 통해 세계사의 다양한 면을 알아갔으면 했다"고 알렸다.

만족스러운 부분은 "세계사에 등장하는 동물들을 탁월하게 표현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라며 웃었다. "인도의 코끼리 병사, 중동의 낙타 부대, 몽골이나 로마의 대기병 등을 묘사하는 장면에 등장하는 동물 그림이 볼 만하다"고 자랑했다. "세계사 만화에서 이야기가 넘어갈 때 보통 브리지로 사용하는 것이 주로 건물"이라며 "내 경우에는 새나 노루, 호랑이, 사자, 바람, 물, 낙엽 등 자연물을 쓰려고 노력했다"고 귀띔했다.

"이현세의 세계에는 자연이 있다는 것에 가장 신경을 썼습니다. 인간만 있는 게 아니라 자연의 아름다움도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죠. 다른 어떤 작가보다 역사에 자연에 대한 존재를 많이 집어넣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가장 큰 비중을 둔 부분은 "백성의 삶"이다. "예컨대, 나폴레옹의 이야기를 그릴 때는 그의 권력욕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백성들에게 자유를 주었는지에 대해 관점을 맞췄어요. 한국사를 다룰 때는 고조선의 율법이나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등이 백성에게 쉬웠는지 등에 주목했습니다. 이런 점들이 세계사 만화를 그리는데 꽤 의미 있는 작업이 아니었느냐는 생각이 들어요."

"3년 만에 15권을 완성했는데 출판사가 재촉을 해서 힘들었다"면서도 "내게만 맡겨놓았으면 5년은 걸렸을 것"이라고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최근 사망한 리비아의 전 국가 원수 무아마르 카다피(1942~2011)를 다루지는 않았지만 보정판이나 개정판에 추가할 뜻도 있다.

【서울=뉴시스】전신 기자 = 만화가 이현세가 24일 서울 중구 플라자호텔에서 열린 '만화 세계사 넓게 보기' 간담회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photo1006@newsis.com 2011-10-24

1990년대 '천국의 신화'가 음란한 내용 등을 표현했다는 이유로 미성년자보호법 위반 혐의로 기소됐다가 무죄판정을 받기도 했던 이씨는 "성인 만화를 그린 이후 어린이 만화에서 내 이름의 존재가 없어졌다. 아이들이 내 이름을 모르더라"며 "궁극적인 목표는 한마디로 어린이들과 다시 소통하는 것"이라고 바랐다. "어린이들을 위한 창작 콘텐츠를 만들고 싶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백화점에서 나를 봐도 시큰둥해하더라. 엄마아빠가 유명한 사람이라고 가서 사인 받으라고 하면 마징가Z나 드래곤볼, 둘리를 그려달라고 한다. 나도 자존심이 있는데 아이들 모습을 캐리커처로 그렸더니 그 다음 줄이 늘어나더라."

이씨는 "그런데 학습 만화를 그린 뒤에는 반응이 조금씩 오더라고요. 어느 초등학교에서는 제 만화를 읽고 쓴 아이들의 독후감을 보내오기도 하죠. 그 뒤 사인회를 하면 까치와 엄지, 동탁을 그려달라고 해요"라며 즐거워했다.

"삼국지를 그리는 것"이 계획이다. "기존과는 또 다른 '삼국지'를 그리고 싶다. 이미 소설 '삼국지'나 고우영 해학의 '삼국지'가 있지만 전장에서 흙바람이 날리고 말이 뛰며 땀으로 범벅이 되는 '삼국지'는 없었다"며 "이현세식 연출의 새로운 '삼국지'를 보여주고 싶다"고 별렀다. "내가 그린 애니메이션 '아마게돈'으로 치명타를 입었는데 최근 다른 애니메이션 '마당을 나온 암탉' 분위기도 좋고, '삼국지' 등을 그린 후 다양한 기획을 해볼 생각이에요."

70대에는 "할아버지가 손자들에게 들려주는 동화를 그리고 싶다"는 마음이다. "60대에는 동화를 그리기 위한 발판을 다질 것 같다"면서도 "애니메이션이나 게임 등을 통해 창작만화를 시도해볼 것인지는 아직 결정이 되지 않았다"고 유보했다.

아직까지 건강은 괜찮지만 "지병에 대해서는 만화가와 외과의사가 비슷하다"는 생각이다. "손이 떨리기 시작하면 일을 하지 못하고 아무리 유명해져도 자신이 직접 해야 한다는 공통점 때문"이다.

【서울=뉴시스】전신 기자 = 만화가 이현세가 24일 서울 중구 플라자호텔에서 열린 '만화 세계사 넓게 보기' 간담회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photo1006@newsis.com 2011-10-24

가장 두려운 것은 눈의 건강이다. "많은 만화가들이 눈을 자주 깜빡여야 하는데 섬세한 그림을 그리는데 열중하다 보면 눈이 깜빡이는 게 정지가 된다"며 "그러면 눈이 뻑뻑해지고 더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된다. 눈 건강에 신경을 쓰고 있다"고 밝혔다.

적녹색약이라는 이씨는 "붉은색과 녹색이 어우러져 있으면 판독하기가 힘들다"며 "붉은 장미를 보고도 참 예쁘다는 말을 못한다"고 털어놓았다. "그림을 그릴 때는 영향을 주지는 않지만 전체적인 채색은 내가 하지 않는다"며 "그래도 나만의 독특한 색을 만드는데 도움이 될까라는 생각도 든다"고 긍정했다. "어떻게 보면 만화가를 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결점을 가지고 있는데 타고난 성향이 낙천적이라서 다행이에요."

온라인 위주로 재편된 만화 시장의 문제점을 짚기도 했다. "온라인 만화의 문제점은 작가가 무척 소비된다는 것"이라며 "작가들이 내공을 키운 뒤 작품을 발표하는 게 아니라 감성이나 트렌드에 의지해서 소모해버리니까 내용은 많아도 구성은 느슨해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그래서 외국의 그래픽 노블처럼 책으로 묶어 내기가 힘들어요. 그림을 하는 친구들 중에서 밀도 있는 작업을 잘하는 친구들은 대부분 게임회사로 가버리죠. 그곳이 여건이 좋으니까요. 앞으로 만화계가 극복해야 할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193쪽, 1만800원, 녹색지팡이<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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