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시 연동 강미숙

“선생님, 당신이 그립습니다!”

30년을 교단에서 아이들을 가르쳤지만, 아직도 전 저의 이름 뒤에 ‘선생님’이라는 말을 붙이기가 왠지 어색합니다. 18년을 배워 30년을 가르쳐온 교단이지만, 아직도 부족한 나를 이끄시는 참 스승님이 계십니다.

지금으로부터 40여 년 전, 1972년
첫 발령을 받아 청운의 부푼 꿈을 갖고 우리에게 오신 선생님,
눈을 감으면 4학년 때, 햇살이 잘 들어오는 서귀중앙초등학교 1층 서쪽 첫 번째 교실, 꿈이라는 씨앗이 처음 싹튼 교실이 떠오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하얗게 미소 띤 얼굴이 서 계십니다. 수많은 인연들이 스쳐가며 외우고 지워버린 이름들 중에 아직도 지워지지 않는 세 글자! 그 분은 바로 고․정․하, 당신 이십니다.

언제나 우리들 뒤에서 이름을 부르며 격려해주셨던 선생님!
어느 점심시간이었습니다.
운수업을 하시던 아버지 일이 잘 안되어, 한 때 도시락을 지참하지 못하고 학교에 갔었습니다. 점심시간이 되면 늘 가는 곳이 있었습니다. 학교 뒤 백엽상이 있는 텃밭이었죠. 그 날도 온갖 맛있는 냄새를 풍기며 즐겁게 먹는 친구들의 모습을 볼 수 없어서 교실을 나서기 위해 책을 챙기는 제 등 뒤로
“강미숙, 잠깐 기다려봐! 점심시간마다 어디 가니?”
하고 부르셨습니다. 그저 친구가 불렀으려니 하고 뒤돌아 봤을 때, 선생님께서는 제 앞으로 오시며,
“오늘은 나하고 같이 먹자, 응? 따라와 봐”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날 선생님은 제 손에 도시락이 아니라 책이 들려 있었다는 것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곤 제 자존심을 생각하여 마무말도 물어보지 않으셨습니다. 숙직실에서 꾸역꾸역 넘어가지 않은, 선생님의 도시락을 같이 먹으며 어린 나이에 ‘나도 선생님이 되어야지’하고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했습니다. 그 날의 이 조그만 사건은 내 인생의 턴인 포인트(turn-in-points)가 되었습니다. 매일 매일 벌어지는 학교생활이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공부의 눈’이 트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선생님! 그날 저에게 던져주신 그 사랑의 끈이 있기에 오늘 저가 이렇게 서 있습니다.

학교가 끝나면 선생님께서는 우리들을 당신 자취방에 오라고 하여 공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방학 때에는 선생님 자취방은 늘 만원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불법과외인 셈인데도 선생님은 한 번도 돈을 받거나 어떤 대가를 요구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저 제자들이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을 보며 흐뭇해하셨습니다. 때론 학교에서 밤늦게 산수(수학)를 가르쳐주셨지요. 참 이상한 점은 교실 형광등 불빛아래서는 잘 사는 친구도 못 사는 친구도, 공부 잘 하는 친구도 못하는 친구도 모두 하얗게, 아름답게 빛나 보인 점이었습니다. 이렇게 공부가 끝나고 교무실에서 새어 나온 긴 불빛 삼아 깜깜한 넓은 운동장을 삼삼오오 짝지어 뛰어갔던 기억은 가물가물하기만 합니다.

주말에는 제주시 고향에도 가실만한데 일부러 우리들을 나오라고 하여 천지연 폭포에서 징검다리를 건너면서 놀기도 하고 조약돌도 줍고, 서귀포항 주변의 퇴적암도 관찰하고 바닷가 맷돌에 묻은 기름때도 닦았던 기억이 납니다. 자연탐구학습과 봉사활동을 한 셈이지요. 활동이 끝나면 삼매봉까지 걸어서 가거나 아니면 솔동산을 걸어 올라와 매일시장에 들러 보는 과일 이름도 가르쳐주곤 하였습니다. 그 때 저는 처음으로 원숭이가 좋아한다는 바나나를 보았고 내 주먹 만 한 참외도 보았습니다. 무더울 때는 아이스크림 ‘콘‘을 사주셨는데, 대부분의 아이들이 처음 먹어보는 낮설은 거라 ‘이런 거 싫어한다.’며 내숭부리며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얼마나 촌스러웠을까, 아니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시간들이었습니다.

서귀포초등학교와 우리학교는 핸드볼 적수였지요. 우리 반 숙자는 핸드볼 주장인데 경기가 있는 날이면, 운동장 흙바닥에 앉아 땅거미가 질 때까지 목이 터져라 응원도 함께 하셨습니다. 경기에서 이기면 선생님들이 숙자를 헹가리 쳐 주기도 하였습니다.
책이 귀한 시절이라 저희들에게 ‘한국자유교양대회’에서 추진하는 도서를 구입하여 매일 읽을 수 있도록 지도하셨는데, 전도대회에서 당당하게 단체 우수상을 받는 날 기뻐하시는 선생님의 모습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양팔을 높이 만세 부르며 우리 1반이 제일 멋지다며 외치던 모습이 어제 일 같기만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문학의 싹을 키위 주신 선생님!
흑표지 뚜껑에 200자 원고지를 철한 글짓기장은 저의 문학의 터전이었습니다. 아직도 기억합니다. ‘색연필’이라는 제 동시를 읽고 동그라미 열 개를 해주시면서
“참, 재미있게 표현했구나!”
저는 그날 너무 기뻐서 교실 뒤 수돗가에서 남몰래 동그라미를 세고 또 세어보았습니다. 동그라미는 열 개! 최고 점수였습니다. 그 날부터 저는 그 ‘동그라미 열 개’를 받으려고 글짓기를 열심히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자연히 글을 쓰게 되었고, 글짓기장이 한 권, 두 권 채워지는 보람 속에 저의 글밭도 다져져갔습니다. 그래서 6학년 때 제주신문사 주최 ‘3월 학생문예’에서 ‘한라산’이라는 제목으로 최우수상을 받았고, 여고 때는 ‘한라문화제백일장대회’에서 ‘고향’이라는 제목으로 최우수 당선을 하는 등 많은 글짓기 대회에서 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그 날 선생님은 빨간 동그라미 열 개 안에 저의 문학에 대한 한줄기 희망도 그려 넣어주셨습니다. 그것은 마중물 교육이었습니다.
기억하시나요? 저가 어른이 되어 결혼하고 학교생활하면서 잠시 선생님에 대한 기억이 잊혀질 즈음, 한창 열린교육이 불어오던 무렵, 한림 청소년수련원에서 1박2일 워크숍 하면서 선생님과 반가운 해후를 하였지요. 그 때, ‘나에게 영향을 준 선생님’ 이라는 주제로 저가 발표를 했는데, 자리에서 듣고 계시던 선생님께서는 울고 계셨습니다. 복도에서 만난 선생님의 눈가에는 촉촉이 눈물이 맺혀 있었습니다. 저는 그 눈물을 기억합니다. 선생님, 아직 미약하지만 저의 문학사랑은 그 때, 초등학교 4학년 때 싹이 텃나 봅니다.

9년 전, 저의 첫 동인지를 보시고 기쁨을 감추지 못하셨던 선생님!
특수교육을 전공한다고 할 때는 새로운 길을 걸어간다고 용기를 주셨고,
교감 연수 지명 받을 때는 저 보다 더 좋아하시면서 ‘잘했져, 잘했져’ 하시던 선생님!
주연이가 첫 그림 전시회를 하던 날에는, 양손 가득 꽃다발을 들고 와서 하루 종일 전시실에서 제자들과 담소 나누며 행복해하시던 선생님! 우리의 선생님!

그러나 40년의 시간이 물처럼 흐르고, 그 제자들이 이제 사 철들어 스승님의 사랑을 깨달아갈 즈음, 제자들의 성공하는 모습도, 아름답게 사는 모습도 다 지켜보지도 못하고 하늘나라 가신 우리의 스승님!
서귀중앙초등학교 7회 제자들이
스승의 날이면 은사님 모시고 밥 먹고 노래방 가고 알콩달콩 살아가는 제자들의 살아가는 이야기 들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는데……
이제, 더 이상 그런 시간이 오지 않음에, 다시는 그런 모습을 볼 수 없음에 그저 애닮기만 합니다. 선생님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을 것 같았는데……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음을 철없던 제자는 이제사 깨답습니다.

제자 사랑과 나눔을 몸소 실천하셨던 선생님! 나의 스승님!
스승님께 받은 사랑을 실천하려고, 제가 받은 사랑을 다시 저의 제자들에게 후배들에게 되돌려주겠습니다.
오늘은 그 어떤 이름보다 자랑스러운 당신 이름 불러봅니다. 고․정․하 교장선생님!
영원히 당신의 이름을 기억하겠습니다.

사랑으로 가르치고, 그 배움으로 존경하는
그리운 고정하 교장선생님, 당신이 그립습니다!
오늘도 우리의 카페 ‘서귀중앙초등학교 7회’ 추억의 장소에서 첫 부임하셨던 앳되고 앳된 당신 모습 뵙니다.
영원하신 우리의 스승님!

2012년 5월15일 제31회 스승의 날에, 제자 강미숙 올림
저작권자 © 뉴스제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